수전 손택 《 여자에 관하여 》

차가운 거울에 비친 우리의 폐허

by 책방별곡

​수전 손택의 문장들은 결코 다정하게 독자를 위로하지 않는다. 그녀의 글은 차라리 서늘한 수술실의 조명처럼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사회의 환부들을 날카롭게 비춘다. 지성계의 매혹적인 이단아였던 그녀가 오십 년 전에 남긴 통찰이 2026년 한국 사회에서 치열하고 날 선 형태로 폭발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를 휩쓴 20대의 남녀 갈등은 전례 없이 격화되어 왔다. 그 첨예한 갈등의 상징적인 기저에는 언제나 '군가산점 폐지'를 둘러싼 논쟁이 자리하고 있다.
​손택은 사회가 성별에 따라 어떻게 희생과 보상의 구조를 교묘하게 분리하고 통제하는지 갈파한 바 있다. 대한민국의 20대 남성들은 국가로부터 강요된 헌신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상실감을 안고 있다. 여성들은 여전히 일상과 노동 시장에 만연한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낀다.
​손택의 렌즈를 통해 바라본 이 젠더 갈등은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싸움이 아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결합된 견고한 억압의 구조가 자신들의 책임을 은폐한 채, 불안하고 취약한 청춘들을 좁은 링 위로 밀어 넣어 서로의 파이를 뺏고 뺏기는 제로섬 게임을 벌이게 만든 것이다. 구조를 향해야 할 분노가 가장 가까운 성별을 향한 증오로 치환되는 현상, 손택이 경고했던 '고립된 약자들의 파편화'가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시선을 가정으로 돌려보면, 또 다른 형태의 대립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고부갈등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과해 누군가의 아내로, 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며 무수히 많은 관계의 지형도를 그려오다 보면 이 갈등이 단순히 성격 차이나 세대 차이로 환원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억압받는 자들은 종종 억압자의 논리를 내면화하여 또 다른 약자를 통제하려 든다."
​손택이 지적했듯 사회적 억압은 종종 억압받는 당사자들의 손을 빌려 재생산된다. 가부장제라는 시스템 속에서 자신을 지워내며 힘겹게 살아남은 시어머니 세대는, 자신이 견뎌낸 희생과 규범을 며느리라는 새로운 여성에게 동일하게 요구한다.
​이는 결국 시스템이 스스로 손을 더럽히지 않고 여성들을 이간질하여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대리전이다.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억압하는 가해자가 되어야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받을 수 있는 구조. 고부갈등은 손택이 평생토록 경계했던 내면화된 억압이, 어떻게 여성들의 연대를 파괴하고 고립시키는지 보여주는 내밀하고 서글픈 증거이다.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운 20대의 외침 속에도, 반복되는 고부간의 서늘한 침묵 속에도, 결국 그 밑바닥에는 '나의 고통을, 나의 희생을 알아달라'는 처절한 인정 투쟁이 자리하고 있다.
​수전 손택은 우리에게 값싼 화해를 종용하지 않는다. 대신 서늘하게 조언한다. 우리가 서로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구조가 만들어낸 '오독'에 속아 서로를 베고 찌르는 일은 멈출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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