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황순원의 <소나기>

by 청목

올해 들어 7월,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폭염의 날씨는 일찍이 겪어 본일이 없다.

그럴 때일수록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가 쏟아져 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다.

엊그제 도서관에 가려고 길을 나섰는데 한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서관이 그리 멀지 않고 가까운 까닭에 미리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지만 돌아서지 않고 내처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굵어지면서 퍼붓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비를 흠뻑 맞았지만 잠시 비를 맞으면서도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때로 무엇인가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양평에 있는 임 형을 찾는다. 일전에도 몇 번인가 그런 일이 있고. 아예 하룻밤을 같이 묶으며 밤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침 일찍 대충 집안일을 정리하고, 배낭을 챙겨 나섰을 때는 어느새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날은 전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차를 타고 가면 보다 빨리 갈 수 있지만 대중교통은 시간이 더 걸려도 마음은 편안하다. 가면서 책도 볼 수 있고 신문도 뒤적이고 졸리면 잠시 눈을 붙일 수 있다. 용산에서 출발해서 양평역 다음 역인 용문, 그곳이 종점인지라 마음 놓고 눈을 붙여도 내릴 곳을 지나쳐갈 염려도 없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지만 이곳의 변화는 전철이 개통되면서부터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것 같다. 전에는 길이 좁아 막히고 하루 몇 번 있는 열차가 있었지만 용문산 등산객 말고는 한적했었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역에서 내려오니 포장마차가 빼곡하게 줄지어 서 있고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각설이 타령 비슷한 뽕짝 노랫가락이 넘실대는가 하면 손님 부르는 소리, 물건값 외치는 소리가 뒤섞였다. 어떤 이는 벌써 흥에 겨워 막걸리 한 잔 잘 걸치셨는지 발로 박자를 맞추며 콧노래를 부른다.


마치 어린 시절 사람들로 붐볐던 장터의 모습이 다시 내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어쨌거나 사람들로 북적대는 모습이 오랜만에 사람 사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줘 반갑고 정겨웠다.

그곳 양평 해장국에 순대도 한 접시 시켜놓고 시원한 막걸리 한 잔 기울이고 싶었다.

마침, 임 선배가 역 출구에서 기다린다는 전화가 왔다. 미리 와서 기다렸다니 미안하기도 하고 고마웠다.

벌써 아침 등산을 다녀오는 길인지 카우보이모자에 얼굴은 햇빛 가리개 마스크 차림이라 처음에 잘 알아보지 못했다.

차에 올랐을 때 흐렸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앞 유리창에 비껴서 떨어졌다. 이곳은 지난 주말에도 소나기성 비가 내렸다고 한다. 거의 주말마다 그렇게 큰 비는 아니지만 다른 곳처럼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한다.

듣기를 소나기는 쇠 등을 두고도 다툰다고, 이곳 양평 그리고 용문산이 가까운 지형적 특성으로 소나기가 자주 내리는 것이 아닐까 여겨졌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빗줄기가 굵어졌다 가늘었다를 반복했다. 집 가까운 식당에 들러 늦은 점심에 반주를 곁들여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여론에 뜨고 있는 아무개 소설가 이야기가 나왔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는 그저 문학은 사람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긍정적인 측면, 누가 뭐라 해도 문학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 여긴다.


임 선배는 손재주도 있고 성품이 부지런해서 울안 잔디밭도 잘 가꾸었고, 호도, 감, 사과 등 과수들의 열매 또한 풍성하게 열려 있었다. 마당에 있던 평상의 높이를 낮추는 일로 오후 한나절을 보내고 저녁 무렵 용문산 자락으로 나가 잘한다는 그곳 냉면집을 찾아갔다. 냉면으로 간단히 저녁을 대신하고 밤을 맞았다.

밤이 되면서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고즈넉하게 점점 어두워지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보통 소나기 올 때처럼 천둥 번개까지 동반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어두워지는 창밖에서 빗줄기가 계속 이어졌다. 사람들은 살아오면서 지난날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혹은 짝사랑으로, 때로는 어떤 마음 아픔으로 아물지 않는 상처를 자신의 가슴속 어딘가에 묻어두고 살기도 한다.




우리나라 산천이 어느 곳이나 대개가 그러하듯 아름다운 산이 있는가 하면 넓은 들녘으로 맑은 개울물이 돌아 흐른다. 특히 양평은 지형적으로도 그럴 뿐 아니라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가 생각나게 하는 곳이다.

소설의 주인공 시골 소년은 서울에서 내려온 해맑은 얼굴의 소녀를 개울가에서 처음 만난다. 개울가 징검다리에 또 소녀가 길을 가로막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그런데 막상 개울가에 소녀가 보이지 않으면 금방 허전해진다. 그때, “이 바보!”하며 던졌던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고 생각날 때마다 손이 닳도록 만지작거린다.

어느 날 둘이서 함께 산에 갔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난다. 그리고 비를 피해 수숫대 단 세워놓은 가리 안으로 들여보내 소녀가 비를 맞지 않게 하고, 저는 밖에서 오는 비를 다 맞고 버티었다.

이제 소나기는 그쳤지만 개울물이 불어나 소년은 소녀를 등에 업고 건너간다.

그날 소나기를 맞고 앓아눕게 된 소녀,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마지막 남긴 말,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널 때 소녀의 분홍색 스웨터 앞자락에 황토물이 들었다. 그리고 소녀가 죽기 전 ‘그 옷을 그대로 입혀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때 소년은 잠을 못 이루고 어두운 뒷방에서 혼자 소리 없이 울고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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