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부 재심(再審)의 긴 여정
1. 영복이 형님의 마지막 부탁
박은성 씨는 이제 가정적으로도 안정되었고, 아이들도 무럭무럭 잘 자라 주었다.
그는 한방 침술사로서 널리 알려져 소문을 듣고, 그의 진료를 받기 위해 한의원으로 직접 찾아오고, 환자가 몸이 많이 불편한 경우에는 직접 왕진을 나가기도 했다.
한의원을 찾는 환우들 가운데는 물론 남자들도 있으나 대체로 부인병으로 찾아오는 여성 환자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여 원장님이라 마음 편안한 점도 있을 것이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불교에도 꽤 오래 동안 심취했던 까닭에 어느 누구와도 한방 치료는 물론이고 심리적 상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어서 환자들의 마음 또한 심리적으로 편안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한의원은 차분하게 점점 더 번성할 것이었다.
모든 것이 차차 안정되어 가고 제자리 잡아가고 있을 때, 그에게는 늘 마음 한 구석에 평생을 두고 해결해야 할 마음의 숙제가 있었다.
그것은 박은성 씨, 그가 젊은 시절부터 가슴속에 숨겨진 아픔, 항상 그들이 말하는, 전과자, 거기다 ‘빨갱이’, ‘소위 사상범(思想犯)’이라는 억울한 딱지를 떼는 일이었다.
그들이 처음 붙잡아 수사할 때부터 그렇게 몰아가 붙여진 이름이지만, ‘사상범’이라는 딱지는 친형제들마저 혹시라도 자기들에게 어떤 피해가 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를 멀리했다.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상은
늘 그랬다.
그런가 하면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의형제를 맺어 ‘형님’, ‘아우’하고 지내던 ‘영복이 형님’은 항상 박은성 씨를 항상, 친동생처럼 여기고 가끔 집 가까이까지 찾아와 만나곤 했다.
"친형제도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하지요. 영복이 형은 늘 나를 찾아와 염려하며,
‘너는 꼭 재심을 신청하여 무죄판결을 받도록 해라!’고 그렇게 당부했어요."
"또한 항상 아내와 아이들 일을 챙기며 마치 자기 일처럼 염려하고 도와주었어요.
친형도 그런 형이 없지요. 그러니까 얼마 전에도 일부러 여기 우리 집까지 찾아와 그렇게 당부를 했어요.
소화가 잘 되는 ‘추어탕’으로 점심을 같이 하고 뒤돌아 가는 길이었어요. 그때 바람에 형님의 머릿결이 막 휘날리더라고요. 그렇게 가셨던 영복이 형을 다시 못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렇게 가면서도 내 걱정을 하시는 형님이었어요.”
하고 박은성 씨는 당시의 ‘영복이 형님’을 뒤돌아 생각하며 너무나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영복이 형’이 마지막 가면서까지 당부한 ‘재심을 신청하여 무죄판결을 받는 것’은 형님의 당부뿐만 아니라 본인으로서도 언젠가는 꼭 해결해야 할 가슴속에 안고 있는 가장 큰 과제였다.
더구나 지금까지 그의 가슴을 그렇게 아프게 하였고, 무엇보다 이제는 잘 자라서 곧 사회에 나갈 두 자녀에게 떳떳한 아버지가 되어야겠다는 바로 그 생각이었다.
그 간절한 소망은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다시 재심을 신청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 시작을 해야 할지 그는 알지 못했다.
이때, 박은성 씨의 옛 수감 동료였던 ‘김 모' 씨가 연락을 해와 알게 된 ‘변 모’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변 모 기자님인가요? 저는 박은성입니다. ‘김○일’씨 아시죠? 그 사람하고 저하고 대구교도소에 함께 있었는데 그 사람이 변 선생을 만나서 ‘간첩딱지’를 뗐다며 저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줬어요. 혹시 시간 되시면 좀 만날 수 있을까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약속하고 만나 차 한 잔을 앞에 시켜놓고 그는 자기의 억울했던 사연을 쏟아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하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몰라서 수십 년을 그냥 억울한 채로 살았어요. 부대 선임이 하도 때리고 괴롭혀서 죽으려고 탈영한 것이 북한으로 넘어간 것으로 꾸며졌어요.”
그는 억울해했다. 그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난 뒤, 우선해야 할 일을 정리해 보았다. 먼저 국가기록원과 국방부, 군 검찰 수사단에 그의 기록이 있는지 확인하도록 부탁했다. 몇 개월 동안 그의 기록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있는 기록은 박성은 씨가 수감되어 있던 대구교도소의 수감기록과 국방부에 보관되어 있던 그의 ‘판결문’뿐이었다. 군 수사기록은 이미 수십 년 전에 폐기된 뒤였다.
“기록이 없으니 어쩌죠? 당시 기록을 보면 제가 억울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그는 절망하고 있었다. 그가 건넨 판결문과 수용자기록을 검토해 보았다. 그곳에 그를 체포했다는 최 모 일병, 그를 구타했다는 선임하사 이 모 선임 등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 모 일병, 이 모 선임의 소재를 알 길이 없었다. 고문이 있었다고 하나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혹시 15사단이나 춘천보안대에서 조사받을 때 같은 부대원을 만나거나 아는 사람을 만난 적 없나요?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고문이나 불법구금을 증언해 줄 수 있을 텐데요.”
“춘천 보안대에서 만난 사람이 이 모 선임하고 최 모 일병이었는데 그 사람들 모두 어디 사는지 알지 못하니 어떻게 하겠어요. 그 사람들 주소라도 알면 찾아가서 사실대로 증언해 달라고 바지라도 붙잡고 부탁이라도 해볼 텐데…….”
“가족 중에서 혹시 조사를 받은 분들은 없나요?”
“가족 가운데 조사받은 사람은 없어요.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조카 최 모가 나 때문에 조사를 받고 고생했다는 말을 했다는데 그 '최 모'한테 가서 한번 물어볼까요?”(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