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문정 Aug 17. 2019

17일: 첫 수영

바람이 부는 날에는 수영이나 할까

넘치지 않도록

아이의 영어 수업을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이나 쉬기로 했고, 원래 작은 시누와 미리 얘기되었던 것도 이틀 내내 만나서 함께 놀기로 었다. 그런데 조카 입장에서 보면 엄마와 오붓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숙모와 어린 사촌 동생과 나누어야 하니, 그것도 어찌 보면 불공평한 일인 듯했다. 특히 내가 조카의 엄마를 독점하다시피 계속 떠들고 있으니 또 다른 '엄마와 아들'의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해외여행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 어제 늦은 밤에 헤어지면서 '내일은 엄마와 아들 단 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바란다'라고 인사를 전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 연락하자'라고 그렇게 마닐라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여유로운 아침, 침대에 누운 채로 잡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모든 관계에서 그리고 여러 상황에서 늘 고민되는 것이 '적당한 때'를 찾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선과 면들이 있고 그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팽창과 수축의 방식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고 다시 떠나보내고, 사랑을 하고 상처를 준다.


이러한 관계 속의 유동성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작품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애초에 말레비치는 감상적이고도 서정적인 관점에서 그의 기하학적 형태들을 캔버스 위에 펼쳐놓은 것은 아니지만, 중력의 법칙에 벗어나 부유하듯 유영하는 여러 색깔의 도형들이 언제부턴가 '너와 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모두가 본질적으로 다르고 결코 섞일 수 없으며 개체적 고립은 불가피하다.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작품들


마침내 첫 수영

실로 오랜만에 해가 떴다. 지루했던 장마가 지나간 듯 이제 본격적으로 야외 활동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수업이 없는 화창한 토요일,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손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는 역시나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늘따라 아이의 가늘고 하얀 팔다리가 눈에 거슬렸다.


"수영하자!"


바로 이어지는 아이의 볼멘소리는 가볍게 무시하고 옷장에서 수영복과 래시가드 그리고 물안경과 킥판(swimming float)을 후다닥 꺼냈다. 장바구니에 비치타월 두 장를 구겨 넣고 레지던스 단지 내 수영장으로 향했다. 그레이스 레지던스에는 수영장이 2 있다. 하나는 반듯한 직사각형의 25미터 규격 수영장이고, 나머지 하나는 영유아를 위한 다양한 수심의 수영장이 수련 잎사귀처럼 겹쳐있는 리조트 풍의 수영장이다. 물을 두려워하는 아이는 영유아용 수영장에서 놀기를 원했다.


그레이스 레지던스의 25미터 규격 수영장


그레이스 레지던스의 아름답게 디자인된 영유아 풀


그동안 비가 계속 내려 수영장을 이용하지 못했다. 레지던스에서 지낸 지 17일 만에 첫 수영이라니. 먼저 수영장을 이용하기 전에 등록을 해야 한다. 이름과 묵고 있는 주소를 적고 사인을 하고 난 뒤 샤워를 하고 수영장에 들어가라는 안내를 받았다. 직원들에게 샤워실이 어디인지 물어서 찾아갔는데 차가운 물 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이와 나는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겨우겨우 몸을 씻고 수영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맑은 하늘과는 달리 오늘따라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그러고 보니 토요일 낮 수영장에는 나와 아이 둘 뿐이다.


용감한 엄마가 먼저 나서서 물에 들어갔다. 아이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세상에, 물이 너무 차다. 안 되겠다 싶어서 아이를 안아 올려서 꼭 끌어안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다가 곧 적응되었는지 킥판을 찾았다. 벌써부터 아이의 입술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이를 킥판에 매달리게 하고 내가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발차기를 한참 시켰다. 빨리 체온을 올려야 했다. 그동안 외삼촌과 몇 차례 배운 수영이 무색할 정도로 아이는 얼굴에 물이 튀기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아이는 곧 자기 나름의 놀이 방법을 찾아냈다. 따뜻한 나라의 수영장 가면 항상 하던 그 놀이였다. 바로 '수영장의 낙엽 청소하기'로 킥판을 들고 다니면서 물 위에 떠있는 낙엽을 하나씩 건져 킥판에 모으는 간단한 놀이이다. 이 지루한 일을 아이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몰입해서 즐겼다. 아이의 입술이 점점 파래져간다. 그만 집으로 가자는 말에 아이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계속 낙엽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청개구리가 따로 없다.


수영장 낙엽 청소 놀이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한편에 벗어놓은 크록스 신발이 들썩이고 비치 타월을 넣어 둔 천가방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나는 수영장 밖에서 아이를 불렀으나 소용없었다. 아이만의 창의적인 킥판 사용법과 수영장 활용법을 터득하고 나니 밖으로 나오기 싫은 모양이었다. 거센 바람으로 수영장의 물은 어지러운 파동을 일으키며 출렁였다. 겨우 달래서 밖으로 나온 아이는 진한 보랏빛 입술을 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두 장의 비치타월로 머리부터 발 끝까지 김밥 말듯이 둘둘 감아서 집으로 데리고 올라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시켰다. 오늘의 짧은 물놀이가 생각보다 즐거웠는지 아이는 또 가자고 한다. 지금까지 수영장 가는 것을 미뤄왔던 그 아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갑자기 물놀이가 좋아진 모양이다.  

작가의 이전글 16일: 가족상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