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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Aug 29. 2019

22일: 개미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 그 얄팍한 계산

람부탄(Rambutan)과 개미

아이의 영어 과외 선생님(이자 요리 박사인) 집시에게 들으니 8월의 대표적인 과일은 람부탄이라고 한다. 뭐든 제철일 때가 가장 맛있는 법이니 팔라르 마켓에서 바나나와 망고를 사면서 람부탄도 함께 데려왔다. 람부탄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흔한 과일로 묘하게 생긴 붉은 껍질을 까면 반투명한 아이보리색의 과육이 드러난다. 과육은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워 매력적인 향과 함께 달콤한 과즙이 팡팡 터져 나온다. 과육 가운데에는 엄지손톱만한 씨가 들어있어서 먹을 때 과육을 입에 넣어 이리저리 굴리면 씨가 쉽게 발려 나온다. 설명을 길게 할 필요도 없이 나는 람부탄을 아주 좋아한다.


람부탄(Rambutan)


역시 제철과일이라 그런지 가격도 1kg에 85페소(약 2000원)밖에 하지 않았다. 망고는 이제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터라 새로운 람부탄이 기대되었다. 트라이시클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중에 장바구니를 멘 어깨가 간질간질하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작고 까만 개미가 어깨에서 팔뚝으로 바삐 내려가고 있던 중이었다. 팔라르 마켓이 노천에 있는 재래시장이다 보니 파리나 개미가 유독 많이 보였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지만 몇 번 다니다 보니 이제는 그것도 익숙해졌다. 람부탄은 정말 달콤한 과일이다. 그러다 보니 개미가 많이 몰려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단 개미를 집 안으로 들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나 고민되었다.


현관을 열자마자 일단 싱크에 물을 가득 받고 람부탄을 그 안에 우르르 쏟아부었다. 물에 한참 담가 두었더니 예상대로 정말 많은 개미가 물 위에 둥둥 떠다녔다. 그중에 몇몇은 무사히 싱크에 닿아 밖으로 기어 나왔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원래 나는 모기, 파리, 바퀴벌레를 제외하고 곤충(혹은 벌레)을 죽이지 않는다. 특히 뜨거운 보도블록 위에서 애처롭게 기어 다니는 지렁이가 보일 때마다 나뭇잎이나 작은 나뭇가지를 이용해서 축축한 흙이 있는 곳으로 옮겨놓는 것도 나의 기괴한 습관 중의 하나다. 집 안에 작은 거미가 발견되면 그냥 모른 척 놔두거나 밖으로 놓아준다. 그러나 아이는 나와 달리 나비와 잠자리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곤충과 벌레를 무서워한다. 벌레가 보이는 순간 겁에 질려 그 공간에 머물지를 못한다. 작은 벌레를 피해 아이가 도망쳐 숨는 꼴이다. 그래서 나는 무자비한 학살자처럼 람부탄에서 나온 개미를 하나도 남김없이 눌러 죽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하나도 남김없이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시 흐르는 물에 하나씩 정성 들여 씻어내었다. 람부탄 껍질의 수많은 돌기 사이에 은신해있는 개미를 색출하면서 씻으려니 번잡스러울 뿐만 아니라 시간도 꽤 오래 걸렸다. 이쯤 되니 재래시장에서 람부탄을 사들고 온 일이 후회되었다. 다 씻은 람부탄을 접시에 담아 일단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적당히 시원해졌다 싶을 때 꺼내어 아이에게 먹어보라고 건네었다. 접시 위에 산발한 붉은 머리들이 잔뜩 쌓여있는 괴상하고도 놀라운 형상에 아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이는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람부탄 중의 하나를 가리키며 "이거 뭐야?"라고 물었다. 그 손끝에는 길을 잃은 개미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에이 틀렸다, 먹지 않겠구나.


잘 씻은 람부탄 (a.k.a. 개미소탕작전)


됐다, 나라도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지. 과즙이 팍 터져 나오지 않게 조심히 껍질을 까니 그 안에 하얗게 드러난 속살이 탐스럽기만 하다. 그 옛날 젤리뽀를 빨아먹듯이 입술을 대니 과육이 쉽게 딸려 나온다. 와, 진짜 맛있다. 요즘은 프랜차이즈 뷔페 레스토랑에 가면 냉동상태로 제공되는 람부탄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냉동된 상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늘 람부탄을 사서 먹었는데, 그중 단연 최고인 듯하다. 과즙이 넘치도록 차있고 신선한 것이 역시 과일은 제철에 먹어야 하는가 보다.


"엄마 부탁에 내가 딱 한 알 먹어준다!"


얄팍한 계산

개미는 동화 속에서 부지런함의 교훈을 일깨워주는 "착한" 곤충이다. 그리고 도심 속 아스팔트의 작은 틈이나 보도블록 사이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개미이다 보니, 아이들은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작은 생명체들의 움직임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한다. 이 아이들 중 하나가 커서 개미에 관한 책을 쓰고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는 멋진 이야기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의 첫 작품이자 가장 유명한 소설 <개미>는 특히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소설 <개미>가 전 세계에서 약 200만 부 정도 판매되었는데 그중 100만 부 이상이 한국에서 팔린 것이라고 한다.


나는 오늘 "착한" 개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집 밖에서 만나는 개미는 흥미로운 대상이지만, 집 안의 공간에서 개미와 함께 지내는 것은 여러모로 안될 일이다. 음식에 몰려들어 위생상이나 미관상 좋지 않다. 자다가 혹시라도 개미에게 물릴 수도 있는 일이고  무엇보다도 아이가 벌레를 무서워한다. 이렇듯 내가 개미를 죽일만한 합당한 이유는 넘쳐난다. 나에게 해를 끼친다면 살려둘 수 없는 일 아닌가.


혹시 개미뿐만 아니라 세상의 다른 것들을 판단할 때도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의 기준이 오로지 나 자신의 잣대에 따른 것은 아니었는지... 람부탄 속에 아직도 살아있을지 모르는 개미를 찾으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요즘 세상에 철학적 담론은 가당치도 않다. 대학생 시절 정의에 관한 이야기나 삶의 가치에 관한 이야기들을 소주병들을 늘어놓은 채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열정적으로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내 학생들에게 "너의 인생관이나 삶의 목표는 무엇이니"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질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나의 대학생활은 언제나 이 초록병과 함께


과거 모더니즘의 향수가 지배했던 대학은 느리고 답답할지언정 각자의 진지한 고민거리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은 (여전히 정체가 모호한) 4차 산업시대를 맞이하여 일단 뭐든지 뒤섞고 보는 융복합이 권장되고 빠르고 경쾌한 효율성이 미덕이 되었다. 턱을 괴고 앉아 고민하거나 내 선택의 가치를 판단하는 시간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모든 것들이 단편적이고 말초적이며 일시적인 것들로 바뀌었다. 그래서 세상은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고, 이 속에서 각자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더욱 격렬해졌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에게 이로운 것들을 남들보다 빨리 그리고 더 많이 쟁취해야 하고, 나에게 해로운 것들은 모두 제거해버리는 본능적 수준의 선택이 합리적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우리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의 수만큼 더 많은 갈등과 미움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었다.


이 아수라장에서 과연 나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 또한 그런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거나 일을 하지는 않았는가. 수많은 사회적 이슈나 문제들을 정의라는 관점보다는 나 자신의 유불리(有不利)를 따져 판단하지는 않았는가. 살아남으면 안도하고 배제되면 분노하지 않았는가. 혜택을 보면 기뻐하고 불이익을 당하면 세상을 욕하지 않았는가. 과연 나는 얄팍한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개미야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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