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문정 Sep 04. 2019

23일: 귀걸이

다시 찾은 콘래드 마닐라와 언제나 맛있는 딤섬

숙제

8월 16일 금요일 오전 9시 30분이 조금 지난 시간,  와야 할 집시는 오지 않고 갑자기 문자 한 통이 들어왔다. 급한 일이 생겨서 영어수업시간을 바꾸었으면 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오후에 먼저 메이가 수업을 하고 집시는 저녁에나 수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갑작스럽기는 해도 오늘 일정이 이렇게 변경되었으니 이참에 미뤄두었던 숙제 하나를 해결하기로 했다.


얼마 전 마닐라로 놀러 왔던 작은 시누가 호텔 객실에 귀걸이 하나를 떨어뜨리고 간 것을 청소하던 직원이 찾아 둔 모양이었다. 콘래드 마닐라 호텔은 이 상황을 작은 시누에게 정중하고도 친절한 메일로 알려주었고, 마침 마닐라에 여전히 체류 중인 올케, 그러니까 내가 대신 찾아가기로 했다. 문제는 콘래드가 대규모 고급 호텔이다 보니 모든 것들이 분명한 절차와 적합한 증명서류를 요구했다. 그래서 작은 시누는 호텔 측에 제출할 위임장과 본인의 여권 사본을 나에게 미리 보내주었다. 나는 이 둘과 함께 나의 여권까지 잘 챙겨 호텔로 향했다.


콘래드 마닐라의 프런트 데스크


덕분에 쾌적한 콘래드 마닐라 호텔의 로비를 다시 방문할 수 있었다. 저번에는 비가 많이 내려 회색빛 하늘이 너른 창을 채우고 있었다면 오늘은 맑은 푸른빛이 가득 차 있었다. 직원에서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친절하게 절차를 설명하고 위임장과 두 사람의 여권을 모두 요청했다. 그리고 잠시 기다려달라면서 로비에 앉아있을 것을 권했다. 분실물은 자신이 속한 부서가 아니라 객실관리 부서에서 따로 관리하기 때문에, 담당자가 연락을 받고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마침 객실 체크아웃 시간과 맞물려서 그런지, 매우 붐비는 리셉션(reception desk)에 비해 로비는 한산한 편이었다.


한산했던 콘래드 마닐라 로비


푸른 하늘이 가득 차 있던 창


아이는 그 막간을 (야무지게) 이용하여 와이파이 전용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나는 창 밖을 바라보며 눈호강을 했다. 삼십 분 정도가 지났을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혹시 아까 그 직원이 우리를 잊었거나 못 찾는 것은 아닐까... 노파심에 다시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내가 귀걸이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 뒤 아이가 앉아있던 소파로 돌아왔다. 게임에 열중하던 아이가 고개를 들고 배가 아프다고 말한다. 늘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는데, 바로 해결하지 않으면 큰 일 날 것처럼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아 화장실을 찾느라 진땀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세상에 닮을 것이 없어서 나의 과민성 대장 증세까지 닮은 것인지...


콘래드 마닐라 로비의 아름다운 전망


일단 아이 손을 끌고 화장실을 찾아 나섰다. 마침 프런트 데스크 왼편으로 화장실 입구가 보였다. 아이는 배가 아팠다는 사실도 잊은 듯이 화장실에 들어서면서 와~ 소리를 내며 경탄했다. 적어도 스무 개는 되어 보이는 대형 화장실에 사람이 하나도 없이 고요하고 정갈했다. 여기서 명상 수업을 진행해도 무리가 없을 듯했다. 아이는 종알종알 화장실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늘어놓으며 기분 좋게 볼 일을 봤다. 이 경험을 통해 아이의 호텔 사랑은 더욱 깊어질 듯했다.


콘래드 마닐라 로비에 마련된 화장실


화장실에서 나오니 마침 리셉션의 직원이 나를 찾고 있었다. 두 장의 서류에 친필 서명을 하고 그렇게 무사히 귀걸이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마주한 것 마냥 반갑기만 했다. 이 앙증맞은 귀걸이가 버려지지 않고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니, 귀걸이에게도 잘 된 일이었다.


결국 만나게 된 시누의 귀걸이


복잡한 마닐라 베이는 그레이스 레지던스에서 왕복 2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이기 때문에 지난번 시누와 조카를 만난 이후 다시 올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귀걸이를 찾으러 온 참에 우리 동네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맛집에서 근사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콘래드 호텔에서 나와 몰 오브 아시아(MOA)로 옮겨 아이와 함께 식당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나의 기대와는 달리 아이는 더운 날씨에 컨디션까지 좋지 않은지 먹을 것에 통 관심이 없었다. 식당가를 대중 한 바퀴 돌았는데도 아이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딱히 좋다고 말하는 게 없던 와중에, 마침 작년 3월 마닐라 여행 중 남편과 둘이 찾았던 식당이 눈에 띄었다. 여기 <루강마을(鹿港小镇)>은 대만 계열 식당으로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어서 그런지 항상 손님이 가득 차 있다. 


루강 식당(lugang cafe)


<루강마을(鹿港小镇)>의 수타 제면실


아이에게 딤섬을 먹고 싶은지 물었더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듯 "바로 그거야"라고 외쳤다. 우리는 손을 잡은 채 식당 앞 대기석에 나란히 앉았다. 차례가 되어 안내받은 2인석에서 빠르게 주문을 이어갔다. 새우 샤오마이와 파인애플 볶음밥, 그리고 나를 위한 조개 채소 볶음탕을 시켰다. 아이와 함께 오니 작년 남편과 함께 했던 테이블의 음식과는 색깔부터가 달랐다. 성인의 상차림에는 기름이 번들거리는 갈색과 자극적인 빨간색이 주도적이었다면 오늘의 상차림은 빨주노초 동심의 색깔이 한가득이다. 특히 파인애플 볶음밥은 스케치북에 알록달록한 색종이 가루를 뿌린 것처럼 앙증맞고 이쁘기까지 했다. 이곳까지 와서 이런 음식들을 시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아쉬우면서도 내 앞에서 모처럼 맛있게 먹는 아이를 보니 이 시간이 감사하고 기뻤다. (이 고마운 마음을 시누의 귀걸이에게...)


모처럼 아이가 잘 먹었던 식사


다시 영어공부

즐거운 점심식사를 마친 뒤 오후에 있을 영어 수업을 위해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상상을 초월하는 교통 체증으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메이와의 수업이 시작되었고 두 사람의 낭랑한 목소리가 작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두 시간의 수업이 끝난 뒤 집시가 올 때까지 저녁을 먹고 좀 쉬기로 했다. 집시와의 수업은 저녁 6시부터 시작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6시 30분이 넘어도 집시는 오지 않았다. 마닐라의 끔찍한 교통 정체를 잘 알기 때문에 7시까지는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7시 20분이 다 되어간다. 집시는 늦어도 밤 10시에는 출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시간 이후에 수업을 하는 건 여러모로 무리다.


'오늘 수업은 하지 말자'는 내용의 문자를 입력하는 도중에 갑자기 현관에서 노크소리가 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었더니 비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땀에 젖은 집시가 문밖에 서있었다. 연락도 없이 늦은 것도 문제였지만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었던 집시가 의아하면서도 놀라웠다. 얘기를 들어보니 집시는 아무리 기다려도 지프니가 오지 않아 차라리 걷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동네(마카티 시티)에서 여기까지 두 시간을 넘게 걸어왔다고 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집시의 검은색 크록스 샌들은 먼지 투성이었고 가장 먼저 화장실에서 발을 씻어야 할 정도로 고된 길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이와의 수업을 위해 여기까지 수고를 무릅쓰고 와준 것이 고맙기도 하고, 두 시간이나 걸어야 했던 그 상황이 안쓰럽기도 했다.


나는 나의 숙제를, 집시는 집시의 숙제를 다 하기 위해 먼 길을 오고 갔던 하루였다.

작가의 이전글 22일: 개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