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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Sep 07. 2019

24일: 마지막 토요일

주말의 영어수업은 카페에서

주말 수업

마닐라에서 보내는 마지막 토요일도 영어수업이 잡혀 있었다. 조금은 특별하게 보냈으면 하는 마음에 집시에게 집 앞 스타벅스에서 영어수업을 하는 것이 어떤가 물어보았다. 집시는 정말 좋다며 큰 웃음으로 답했다. 약속시간이 오전 9시 30분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우리는 스타벅스 입구에서 만났다. 집 밖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토요일 아침, 한산했던 우리 집 앞 스타벅스


오전의 스타벅스는 무척 한가했다. 두 사람은 안쪽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바로 수업을 준비했다. 집시에게 어떤 메뉴가 좋은지 물었더니 "무엇이든 초콜릿으로 만든 것이라면 다 좋다!"라고 말하며 즐거워했다. 집시를 위해 '초콜릿 칩 프라푸치노' 벤티 사이즈와 따뜻한 몬테크레스토 샌드위치 그리고 초콜릿 도넛을 주문했다. 아침식사도 제대로 못했을 시간이라 양이 부족하면 안 될 일이었다. 영찬은 초콜릿 음료를 나는 언제나처럼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오늘의 스타벅스 음료 삼총사


나는 아이와 집시 맞은편의 긴 테이블 한편에 자리 잡고 가져 간 노트북으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즐기며 말랑말랑한 글을 쓰고 있자니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온 몸 구석구석 행복이 밀려왔다. 글을 쓰다가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거나 표현이 고민될 때 고개를 들면 저 앞에 앉아있는 아이와 집시의 모습이 미술작품처럼 아름다웠다. 집시의 밝은 표정과 아이의 명랑한 몸짓을 보니, 오늘의 수업은 잘 되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글을 쓰다가 바라본 아이와 집시


글의 맛

마닐라에 와서 벌어진 좌충우돌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어서 시작한 브런치 글쓰기였다. 생각해보니 일상을 글로 옮기며 소박한 기쁨을 느껴본 것이 참으로 오래된 일인 듯하다. 그동안 논리적이고 논증적인 글을 써야 했다. 혹은 유려한 수식과 추상적 개념이 지배적인 비일상적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이었다. 연구자의 입장에서 때로는 비평가의 관점에서 다루는 글은 단 한 번도 만만했던 적이 없다. 정교한 패턴의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내 나름의 기준에서 한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글은 넘치거나 부족해서는 안되고, 진부하거나 난해해서도 안되었다.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전해주는 좋은 미술작품은 사실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의미가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누군가는 상징적인 시각 체계로 이루어진 작품의 의미를 잘 풀어서 전달할 필요가 있다. 예술의 세계와 일상적 세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이 둘은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서 하나로 묶이기도 한다. 그 본질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인데... 진실, 믿음, 신념, 사랑 등과 같은 우리 인생의 중요한 화두와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예술과 삶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가장 가까이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운 좋게도 미술을 가르치고 미술에 관한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특히 내가 사랑하고 지지하는 작가에 관한 글을 쓸 때 큰 보람을 느껴왔다. 또한 내가 선택한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도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제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과제처럼 고민을 거듭해야만 겨우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던 내가 여기 마닐라에 와서 가장 열심히 그리고 기쁘게 한 일이 "글쓰기"였다. 일기조차 쓰지 않은지 참으로 오래된 내가 일상을 글로 옮기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글의 기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정교하거나 논리적이지 않아도 일상의 흐름을 따라 전개되는 문장들의 경쾌한 리듬이 내 마음에 들었다. 푸른 식물이 광합성을 하듯이 내 일상을 담은 글이 다시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래서 마닐라 한달살기가 순조롭게 잘 이뤄지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느껴본 글쓰기의 행복


아이와 영어과외교사 집시의 주말 영어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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