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 마켓 그리고 보니파시오
이런저런 이유로 자주 찾았던 SM몰 바로 맞은편에 버스터미널처럼 지프니가 가득 차있는 공간이 있다. 지프니를 오르내리는 수많은 인파들로 정신없는 그곳 바로 뒤에 전형적인 미국 아울렛처럼 보이는 낮은 초록색 지붕의 건물이 몇 개 모여있는데, 이곳이 바로 마켓 마켓(Market, Market)이다. 마닐라 체류 25일째 되는 오늘에서야 마켓 마켓을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마닐라 관련 여행 블로그에서도 관련 소개글을 쉽게 찾기 어려운 이곳의 첫인상은 SM몰에서는 느끼지 못한 현지인들의 생기 넘치는 모습들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마켓 마켓은 정말로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침 일요일이라 그런지 가족단위의 방문객으로 상점이며 식당이며 사람들도 가득 차 있었다. 외부에 있는 상점은 주로 간단한 푸드코트와 과일가게, 꽃가게 그리고 각 지방의 특산물들을 모아서 판매하는 편집샵들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BBQ를 전문으로 하는 레스토랑이 한두 군데 있어서 거리는 식욕을 돋우는 냄새가 가득했다. 특히 거대한 레쵼(Lechon: 필리핀 통돼지 구이)을 걸어둔 뷔페식 식당은 대기줄이 길게 늘어선 것을 보니 맛집인 듯했다.
자그마한 회전목마가 어린 손님들을 태우고 귀여운 자태로 뱅글뱅글 돌고 있는 뒤편으로 아얄라 몰(Ayala Malls)의 입구가 보인다.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 생각보다 거대한 규모에 먼저 놀라고,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인파에 또 한 번 놀랐다. 주말의 아얄라 몰은 남녀노소 가족단위 방문객으로 아이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걷기 어려울 정도로 혼잡한 지경이었고,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에는 복잡한 인파 속에서 차례대로 줄을 잘 서서 올라타야 할 정도였다.
각층마다 모두 다른 테마의 쇼핑이 가능했다. 가구에서 패션용품, 그리고 관광기념품에서 전자제품까지 말 그대로 없는 것이 없었다. 딱히 물건을 사지 않아도 슬렁슬렁 배회하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규격화된 SM 몰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필리핀 현지인들의 취향과 일상을 가까이에서 느끼며 이곳저곳을 계획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서성이다가 거대한 미러볼이 걸린 것 마냥 온통 반짝이는 곳을 우연히 발견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미 그곳으로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곳은 거대한 문구점이자 장난감 가게였다. 파티용품부터 아이들 장난감과 각종 문구들이 빼곡히 쌓여있었다. 레고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난감들이 중국에서 수입한 값싼 제품인 듯했는데, 그 색감이 유명한 팝아트 작가들도 감히 흉내를 내지 못할 만큼 화려하고 과감했다. 그 노골적이고도 대담한 색들의 향연에 나는 어린아이처럼 흥분되었다. 아이도 놀란 토끼 눈으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용케도 비눗방울 장난감 코너를 발견했다. 한참을 고르고 고른 후에 아이는 아이스크림 콘 모양을 한 자그마한 비눗방울 장난감을 사달라고 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인가, 아이가 금세 힘들어하면서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그래서 아이에게 맛있는 초콜릿 음료나 케이크를 사주겠다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구글 지도를 열고 가장 가까운 곳의 카페를 검색해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스타벅스가 두어 곳 있었다. 그나마 더 가까운 지점을 목적지로 정한 뒤 아이와 함께 보니파시오의 깨끗한 도심을 함께 걸었다. 한낮의 햇빛은 따가웠지만 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 잠시나마 여행자의 가벼운 발걸음을 즐길 수 있었다. "산책 성애자"인 나에게 보니파시오의 쾌적한 거리는 언제나 즐겁게 걸을 수 있어서 한국에 돌아가서도 가끔 생각날 것 같다.
등에 땀이 스미려고 하는 차에 마침 스타벅스에서 도착했다. 이른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매장은 한산했다. 창가의 푹신한 소파가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나는 늘 그렇듯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아이는 초콜릿 음료를 주문했다. 아이에게 와이파이 전용 스마트폰을 건네주고 한 시간 동안 원하는 유튜브 영상을 봐도 좋다고 허락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는 아이는 대단한 집중력을 보이며 그 한 시간을 온전히 즐겼다.
그 앞에 앉아서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브런치에 들어가 그동안 내가 쓴 글을 읽으면서 맘에 들지 않은 문장들을 수정했다. 마닐라 도착 직후에 쓴 글들은 현재로부터 떨어져 나간 시간이 오래되어 그런가.... 글에 담긴 감정들이 지금의 나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아직도 마닐라에 머물고 있는데 이곳의 경험을 3인칭 관점에서 시간차를 두고 읽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과거와 현재가 겹치는 공간에서 과거형의 문장들로 기록된 기억을 꺼내보면서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의 풍경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25일을 머물렀다. 이 익숙하고도 특별할 것 없는 공간이 언젠가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겠지...
빈속에 들이킨 진한 아메리카노는 조금 무리였던 것 같다. 공복과는 다른 둔탁한 감각이 명치에서 번져갔다. 이제 비어있는 위장에 음식을 공급해야 할 시간이었다. 여전히 시공간 감각을 잊은 채 완전한 몰입 상태에서 영상을 즐기는 아이를 억지로 현실로 소환해야만 했다. 이제 점심 먹을 시간이라고 얘기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아이에게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었다. 역시나 딤섬이 먹고 싶다고 한다. (여기는 정녕 중국인가 필리핀인가!)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구글 평점이 높은 딤섬 식당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싱가포르 음식을 하는 곳이었다. 적당한 가격에 편하게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캐주얼한 곳이었다. 아이를 위해 새우를 넣은 만두와 돼지고기와 새우를 섞어 만든 샤오마이 그리고 나를 위한 닭발 조림을 주문했다. 메뉴판을 넘기다가 반가운 음식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락사(LAKSA)!!
락사는 말레이시아 전통 요리로, 15세기쯤 말레이반도로 이주해온 중국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생선이나 닭으로 우린 매콤한 국물에 쌀국수를 넣어 만들어 그 맛이 한국의 어죽(민물생선국수)과 매우 흡사해서 처음 맛 본 이후 나는 락사의 광팬이 되었다. (나의 첫 해외여행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말레이시아다. 그래서 말레이시아의 음식과 과일에 대한 기억이 매우 선명하다) 락사는 시큼하고 깔끔하게 매운 아쌈 락싸(assam laksa)와 코코넛 밀크를 많이 넣어 부드러운 락사 르막(laksa lemak)이 있다. 물론 나는 아쌈 락싸 타입이다. 그런데 이곳 왕푸의 락사는 진한 코코넛 밀크향이 지배적인 락사 르막이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만난 락사가 너무나도 반가웠다.
여행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 제각각일 것이다. 인스타그램에 올려놓은 사진들은 언제라도 그때 그 여행으로 우리를 이끈다. 또한 기차 안이나 작은 카페에 앉아서 혹은 늦은 밤 호텔 침대에 기대어 두서없이 끄적였던 여행기들은 그때 그 여행의 호흡을 고스란히 간직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에게 가장 강력한 여행 추억 매개체는 다름 아닌 "음식"이다. 강한 향과 맛을 지녔다면 그 기억은 좀 더 선명하게 각인된다. 혹은 특별한 순간이나 장소에서 먹은 음식도 오래오래 기억된다. 오늘 우연히 마주한 락사는 나를 그 옛날 십 대 그리고 이십 대의 어리석으면서도 늘 신나 있었던 그때의 나를 아주 잠깐 떠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