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직업체험 놀이공간인 키자니아는 서울과 부산에도 있다. 나와 남편은 주말이나 방학에 붐비는 어린이 전용 공간을 찾아가 기꺼운 마음으로 고생을 자처하기에는 둘 다 너무 늙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 내 아이의 아빠는 50대 엄마는 40대이니, 주변 친구들의 부모들에 비해 활동적으로 놀아주기에는 체력이 따라주지를 않는다. (미안해 아들)
마침 아이와 둘이 장장 30일을 마닐라에 있을 예정이니 미리 출발 전에 어떤 특별한 경험을 아이에게 줄 수 있을까 인터넷을 열심히 검색해보다가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키자니아가 있다는 반가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한 번도 데려가 주지 못한 곳이니까, 엄마와 함께하는 해외여행(혹은 단기 어학연수) 중에 키자니아에 가면 정말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마침 7월 31일까지 여름 할인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 1인 입장 요금으로 동행한 어른 1인을 무료로 입장시켜주는 프로모션이었다. 그래서 행사 마지막 날이었던 7월 31일로 예약하고 한국에서 일찌감치 결제까지 마쳤었다. (게다가 평일이니 주말보다는 덜 붐빌 것이다)
미리 진키에게 이 일정을 알려주고, 오늘 수업은 저녁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랩 카를 예약해서 오전 10시쯤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오늘 하루는 아이를 위한 놀이공간에서 아이가 원하는 만큼 머물다 올 생각이다. 오랜만에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 같아 하루 일정을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혼자 뿌듯하다. 마닐라 키자니아는 보니파시오 글로벌 시티(BGC)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마닐라 한복판에 우뚝 솟은 맨해튼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련되고 반듯하게 정돈된 도심지역이다.
마침내 우리는 키자니아에 왔다. 아이도 나도 첫 방문이다 보니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각 공간들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낯설었다. 이곳은 아이들이 비행기를 타고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설정이라 입구는 탑승 체크인을 하는 것처럼 꾸며져 있고, 직원들은 모두 파일럿과 승무원 복장이었다. 입구안에서 승무원 복장의 직원이 마이크를 들고 서서 이 곳의 시설물을 이용하는 방법을 친절하게 (영어로) 설명해주었다. 아마도 이때였던 것 같다. 아이가 겁을 먹었다.
공항처럼 꾸며놓은 마닐라 키자니아의 매표소
참을성 테스트
내부는 압축해놓은 디즈니월드나 유니버설 스튜디오처럼 빈틈없이 잘 꾸며져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종합병원과 응급실, 그리고 소방서와 건설공사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아이들을 기다리는 무표정한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있다. 키자니아는 여러 가지 직업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별적으로 운영되는데, 복합 상영관처럼 각 체험의 시작시간과 종료시간이 모두 다르다. 그래서 체험과 체험 사이의 시간 계산을 잘해야만 오랜 기다림 없이 보다 많은 직업체험을 할 수 있다. 또한 각 체험의 성격에 따라 일정 금액을 키자니아 화폐로 (임금 명목으로) 주기도 하고, 일정 금액을 차감하기도 한다. 시간뿐만 아니라 예산 계획도 잘 세워야 하니 이곳에 처음 방문한 우리는 이 독특한 시스템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아담하지만 짜임새 있게 잘 꾸며놓았던 마닐라 키자니아
체험 안내판: 참여 가능인원과 연령 그리고 소요 시간과 비용이 적혀있음
일단 첫 번째 체험을 선택하도록 하자. 오늘 하루를 여유 있게 비워두었으니 이 많은 체험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이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 일단 무엇부터 시작하고 싶은지 물었더니...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엄마, 나 체험을 안 하고 싶어. 나 괜찮으니까, 그냥 안 하면 안 될까'라고 오늘의 시나리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대사를 내뱉었다. '선생님들 하시는 말씀도 못 알아듣겠고, 부끄럽고 겁나서 체험을 하고 싶지 않아'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아! 어쩌란 말입니까.
결국 아이를 반쯤은 달래고 반쯤은 협박해서 영어를 잘 이해하지 못해도 충분히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골라 집어넣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부모는 내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다. 결코 그런 엄마가 되지 않으려고 일상의 여러 선택의 순간에서도 내 안의 심판관을 끊임없이 소환하며 자기 검열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내 안의 심판관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포승줄로 묶어 가두어버렸다. 여기까지 와서 '그래, 알았어. 네가 하기 싫다면 하지 말자. 네 의견이 가장 중요한 거야. 그럼 우리 그냥 밖으로 나가서 다른 놀거리를 찾아보자'며 가식을 떨 수는 없었다.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아이에게 무엇이라도 경험하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번만은 네가 엄마 마음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인기가 많았던 종합병원 체험장 앞의 보호자들
응급실 직업 체험실
여기 마닐라 키자니아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직업은 소방서와 응급실, 그리고 종합병원이었다.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엉덩이를 뒤로 빼며 무조건 들어가기 싫다고 버티는 아이를 (강제로) 집어넣은 곳은 맥도널드 치즈버거 만들기 체험, 샌드위치 만들기 체험, 과자 공장에서 초코칩 쿠기 만들기 체험과 같이 눈치로 대충 따라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세 번의 체험 모두 처음에는 극도로 경계하며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결국 엄마의 강요에 못 이겨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을 하고 들어갔다. 그런데 15분 정도의 체험을 마치고 나올 때에는 어이없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 패턴을 무려 세 번이나 연달아 반복하는 것을 보고는 역시 사람은 자기 성격대로 살 수밖에 없구나 싶었다. 세 번의 체험을 마치고 나니, 먹을 것들이 가득 생겼다. 그래서 적당한 곳을 찾아서 아이가 만든 햄버거와 샌드위치를 나눠 먹었다. 알고 보니 키자니아가 맛집이었구나.
마닐라 키자니아(KidZania)에서 경험한 치즈버거 만들기 체험
아이는 엄마가 음식을 먹을 때나 배 부를 때 평소보다 더 허용적이고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 앞에 놓인 햄버거와 샌드위치를 다 먹어 갈 때쯤 아이는 '엄마, 이제 집으로 가도 될까요?'라며 애교스러운 몸짓으로 조심스레 묻는다. 그래, 졌다 졌어. 키자니아에 입장한 지 단 2시간 만에 나왔다. 갓 정오를 넘긴 그 시간에 퇴장하는 사람은 오직 우리 둘 뿐이라, 나가는 출구를 안내하는 직원조차 우리를 보고 놀랄 정도였다.
극강 미니멀 치즈버거와 지옥에서 온 에그 샌드위치
사랑하지만 다 좋아할 수는 없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모두 좋아할 수는 없다. 아마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냥 운명처럼 서로에게 주어졌다.
나는 아이를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사랑한다. 그렇지만 아이의 모든 면면을 다 좋아하지는 않는다. 특히 성격 부분에 있어서 유독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지점들이 꽤 있다. 나와 아이의 성격은 물과 불처럼 정말 다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낯가림이나 수줍음이 없는 편이었다. 친구들을 쉽게 사귀었고, 내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항상 내 생각이나 의견을 말하는데 적극적이었고, 새로운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해서 결국 여행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반면 아이는 매사에 극도로 느리고, 조심스러우며, 겁이 많은 편이다. (학교 급식시간은 늘 우리 아이가 마지막이라고 한다.) 스스로 말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를 좋아하고, 남 앞에서 돋보이는 것보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조용히 앉아있는 것을 즐긴다. 예전에 말한 대로 우리 아들의 꿈은 '진짜'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도 여러 번 고비의 순간이 왔다. 가령 에그 샌드위치를 만들 때 모든 아이들에게 달걀이 2개씩 제공되었다. 달걀 껍데기를 벗겨 볼에 넣어 으깬 후 마요네즈와 버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이는 귀금속 세공 장인처럼 손가락 두 개씩만을 이용하여 달걀을 잡고 정교한 나전칠기 공예를 하듯이 좁쌀만 한 크기로 껍질을 하나하나 정교하게 떼어내고 있었다. 이미 대부분의 아이들이 달걀을 으깨 마요네즈에 버무리는 작업이 끝났는데도 주변의 상황은 아랑곳없이 오로지 자신의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결국 프로그램 보조 직원이 아이의 달걀 껍데기를 모두 까주어야 했다. 하아...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많았으나 그냥 말하지 않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