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개 아래에 둔 스마트폰을 꺼내서 시간을 보니 이제 막 새벽 5시가 지나고 있었다. 아직 깰 시간이 아닌데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나 같은 잠순이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잠결에 들은 비행기 소리 때문이었나. 사실 이 레지던스는 비행기 항로 바로 아래에 있다. (물론 이 치명적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여기 레지던스를 예약했다) 이 동네는 공항과 아주 가까운 탓에 10~20분에 한번 꼴로 굉음을 내며 거대한 항공기가 건물을 가로질러 날아간다. 손을 뻗으면 비행기 날개를 잡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낮게 날아간다. 그나마 모든 창문을 닫고 있을 때에는 그럭저럭 견딜만하지만, 창문을 열어두었을 때는 공습경보 후에 날아드는 적의 전투기처럼 일상의 공간을 무자비하게 뒤흔든다. 보통 더울 때는 에어컨을 켜 두고 비가 올 때는 창문을 닫아야 하니, 가끔 실내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두는 때를 피하고는 비행기 소리에 놀라는 일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아니던가!
평생 볼 비행기를 여기 그레이스 레지던스에서 다 본 듯
비행기가 날아가는 소리에 자연스레 눈길이 창 밖으로 향했다.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 아스팔트 도로와 시멘트 길은 새벽에 내린 소나기로 짙게 젖어있었다. 그리고 복잡한 건물 사이로 보이는 야자수와 남국의 이름 모를 나무들은 더욱 선명한 녹색 빛을 띠며 회색의 도시 풍경에 미약하게나마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문득 밖의 공기를 마시고 싶어 거실의 작은 창문 2개를 모두 열었다. 그 순간 시원하고 상쾌한 공기가 좁은 실내로 빠르게 휘감겨 들어왔다. 그리고 새벽의 공기와 함께 온갖 소음도 불청객처럼 따라 들어왔다.
자동차와 트라이시클이 만들어내는 높고 낮은 불협화음의 소음, 닭들의 경쟁적인 울음소리, 그 사이의 공백을 채우는 알 수 없는 도시의 여러 소음들, 그리고 그 모든 소리들을 단 한 번에 압도하는 비행기의 굉음. 세상에나! 이렇게 이질적이면서도 높은 밀도로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소리의 집합을 지금까지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어느 것 하나 서로 어울리는 소리가 없는데도, 그것들이 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우연히 뭉쳐져 만들어낸 조합이 전혀 불쾌하지 않고 되려 활기차다. 게다가 도시 전체가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복잡한 퍼즐처럼 온갖 것들이 뒤섞인 이곳, 마닐라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다양한 감각의 자극을 즐기다가 문득 낡은 러닝셔츠에 남자 트렁크 팬티 차림의 잠옷을 입고 우두커니 이 곳에 서있는 내가 낯설어졌다. 도대체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우연히 떨어진 운석처럼 내가 왔던 한국과 여기는 우주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