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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Aug 06. 2019

5일: 진키(Jinky)

내 아이의 영어 과외 선생님 이야기

세 번째 영어 수업

수업시간을 11시로 정했다. 아무래도 진키는 (나와 마찬가지로) 아침형 인간은 아닌 듯했다. 다행히 11시 30분에는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매 회 수업을 세 시간으로 정한 터였기에 시계를 보며 눈금 세 칸을 세어보니 2시 30분까지 수업이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진키에게 수업 중간에 아이와 함께 점심을 먹을 것인지 물어보았더니 흔쾌히 수락하였다. 적당한 시간에 상가로 나가 '이나살(Inasal)'과 함께 아이가 먹을 치킨텐더를 포장해서 돌아왔다. 그리고 커다란 접시 위에 밥과 함께 나름 예쁘게 담아냈다. 진키와 아이는 즐거운 점심시간을 함께 가졌다. 잠시 후 두 사람 모두 깨끗하게 접시를 비운 것을 보고 기뻤다.


이나살은 대표적인 필리핀 현지식이라 할 수 있는데, 필리핀의 바콜로드(Bacolod) 시에서 유래된 것으로 닭을 특별한 소스에 절였다가 불에 구워내는 것이다. (돼지고기도 같은 조리법으로 만들어 먹지만 이나살하면 보통은 닭이다) 일반적으로 고기를 BBQ 할 때 간장을 많이 사용하는데 반해, 이나살은 각 지역의 비법 소스를 사용해서 더 깊은 감칠맛이 난다. 필리핀식 불고기라 생각하면 가장 비슷한 계열의 맛이 아닐까 싶다. 살코기 안까지 잘 배인 소스의 적당히 달콤하고 짭조름한 맛은 한국인이라면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 아이는 제외하고) 이나살은 맛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가격도 정말 저렴하다.


가장 유명한 체인점 망 이나살(Mang Inasal)을 기준으로 커다란 닭다리(Paa)와 밥 한 덩이가 104페소(약 2500원)이고, 날개를 포함한 가슴 부위(Pecho)와 밥 한 덩이가 117페소(약 2800원)다. 이번에 마닐라에 와서 아이에게 요리를 해주고 난 후 막상 내 것을 차려먹기 귀찮고, 여기까지 와서 (내가 만든) 어설픈 한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싶지 않을 때 그랩 푸드를 이용해서 이나살을 자주 배달시켜 먹었다. 집 앞 슈퍼마켓에서 사 온 시원한 산미구엘(San Miguel) 한 병과 함께 하니 나라님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은 나만의 소박하지만 완벽한 정찬이었다.


망 이나살(Mang Inasal)의 닭다리(Paa) 세트


진키(Jinky) 이야기

나와 아이가 잠시 머무르고 있는 이 곳은 그래도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마닐라로 오기 전에 나는 진키에게 살고 있는 동네를 알려주면 그곳에 숙소를 잡겠다고 알렸고, 와서 보니 생각보다 이 지역이 안전하고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막연하게 20살의 젊은 여성이 부모와 함께 중산층 동네에서 사는데도 자기 등록금을 스스로 마련한다니 참으로 생각이 바르고 독립적이라고 여기고 있던 터였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몇 마디 대화가 오가게 되었는데, 자기에게는 제2의 엄마가 있는데 그녀도 한국인이라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말이 갑자기 집에서 나와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그때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한국인 단짝 친구의 엄마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지내게 되었는데, 무엇이라도 보답을 하고 싶었기에 단짝 친구의 여동생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어 시험을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고, 결국 합격시켰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그녀의 영어 과외 경력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16살 여동생을 보살피며 홀로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고 했다.


나는 모계 쪽의 유전적 영향으로 지나치게 연민이 많다. 물론 우리 엄마에 비하면 난 새발의 피 (그 안의 헤모글로빈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그래도 진키가 덤덤하게 늘어놓는 이야기에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저 대견하다 멋지다 등의 전형적인 영어식 표현을 늘어놓으면서 그녀의 영어 과외교사로서의 경력에 대해 물으며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더 이상 진키에게 자세한 가족 이야기를 들을 자신이 없었고, 혹은 그 과정에서 그녀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말하게 될까 봐 그것도 걱정되었다. 그동안 가르친 학생들이 약 스무 명 정도 된다고 한다. 더욱 열심히 해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을 이었다.


그날 밤 진키에게 미처 말로 전하지 못한 마음을 장문의 문자로 대신했다. '나는 네가 독립해서 게다가 어린 여동생까지 보살피며 생계유지를 위해 고군분투하는지 몰랐다'라고, '너의 이야기를 듣고 네가 정말 대견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독립은 정말 멋진 일이지만 혼자서 밥을 먹기 귀찮을 때가 많으니 우리 아이 수업이 있을 때에는 우리랑 함께 식사를 하자'라고 전했다. 곧 진키에게서 답장으로 온 문자를 보니 나의 진심이 제대로 잘 전달된 모양이다. 마침내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모두들, 굿 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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