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문정 Aug 06. 2019

4일: 극한체험 장보기

먹고 살기가 이렇게 힘들어요

일요일 수업

어제 갑작스러운 수업 취소에 이어 과연 진키가 오늘 주말 수업을 하러 올 것인가 솔직히 확신이 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수업 시간에 맞춰 아이를 준비시키고 현관의 노크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약속시간에서 단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감사하게도) 진키가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마주한 그녀의 얼굴은 며칠 사이 더 핼쑥해진 것이 정말 아파 보였다. 핑계가 아니었구나, 정말 아팠구나.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그저 우연히 겹쳐진 사건들로 상대방을 단정 짓거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지워냈다.


주말 수업은 2시간만 하기로 했다. 진키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더니 최근에 일이 몰리게 되면서 하루 평균 2~3시간 정도밖에 잠을 자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 되어 몸이 상한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고 아이 수업에 더욱 집중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도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다. 제발 그녀의 말대로 이루어지기를! 짧은 시간이지만 내가 파악한 진키는 타고난 성격이 차분하고 다정다감하여 우리 아이와 잘 어울리는 듯했다. 여전히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면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 점을 제외하면 대체로 다 좋았다. 두 시간의 수업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고, 남은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장을 보러 가기로 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아이를 잘 먹여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 의무감의 무게에 비해 음식 솜씨는 대체로 평균에 못 미친다. 그래서 아이가 먹는 것에 더 흥미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SM 

필리핀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가장 익숙한 장소로 쇼핑몰을 꼽게 될 것이다. 뜨겁게 달구어진 낯선 거리는 많은 것들이 뒤엉켜 복잡하고 시끄럽다. 게다가 온몸은 땀으로 젖어 불쾌한 데다가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다리도 아프다. 어디라도 앉아서 시원한 음료와 함께 인스타그램을 하면서 잠시 쉬고 싶은 딱 그때,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곳은 바로 SM 몰 혹은 아얄라(Ayala) 몰이다. 두 복합쇼핑몰 모두 필리핀의 10대 기업에 들어가는 SM과 아얄라 그룹에 의해 운영되는 곳으로 필리핀 전역의 크고 작은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이고도 번화한 곳이다. 보통 필리핀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 최소한 이틀에 한번 꼴로 (대부분 매일 출근하듯이 드나드는 경우가 더 많은) SM 몰이나 아얄라 몰을 찾게 된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지역에서 2~3킬로미터정도 떨어진 곳에 SM AURA(아우라)가 있다. 15층의 우리 숙소 창밖에서도 보이는 이곳은 주변의 건물과 확연하게 비교되는 유연한 곡선이 돋보이는 미래적 디자인의 하얀 건축물이다. 세기말적 도시 한복판에 우주선이 사뿐하게 내려앉는 모양새로 콜라주를 해 넣은 것처럼 주변의 경관과는 매우 이질적인 모습이다. 창밖에서 보이는 위치는 기껏해야 차로 5분 이내에 도착할 것 같지만, 복잡하게 얽힌 도로망과 하루 종일 이어지는 교통정체로 20~30분 이상 걸릴 때도 많다.

 

SM AURA(아우라) 건물의 독특한 형태


그레이스 레지던스의 상가에도 작은 슈퍼마켓이 있지만 편의점과 비슷한 구성으로, 여기서 채소 육류 해산물 과일 등의 제대로 된 식재료를 사기는 어렵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SM 몰에 위치한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야지만 아이가 먹을 음식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숙소 상가 안에 몇몇 식당이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아이는 나와 달리 현지 음식을 시도하는데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일단 알던 형태와 빛깔 그리고 냄새가 아니면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우리 상가 안에 특이하게도 태국 국숫집이 있다. 태국이라니! 아이에게 한 번만 같이 가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지만 매정한 이 녀석은 엄마의 식성이나 취향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나중에 아이를 집에 두고 잠깐이라도 혼자 나와서 먹을 생각이다.


마닐라에 도착한 지 오늘이 4일 차, 그 사이에 벌써 두 번이나 SM 몰을 찾았다. 카페, 맛집, 쇼핑을 위한 게 아니라 단지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기 위해서였다. 한번 장을 볼 때마다 마음가짐은 딱 일주일치를 사 가지고 오자는 것인데, 처음 장보기에서 어깨가 끊어질 정도로 바리바리 사 고 왔는데도 부족하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품목들이 계속 생겨났다. 그래서 떨리는 마음으로 SM 몰로 장을 또 보러 와야 했다. 그까짓 장을 보는데 떨릴게 뭐 있나 싶겠지만, 문제는 오고 가는 길에 있었다.


뭐든 모험으로 바꾸는 능력

이틀 전 처음으로 SM 몰에 왔을 때 푸드코트에 들러 직접 아이에게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게 해서(원래는 주문까지 시키려 했으나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간단히 이른 저녁을 먹고 난 뒤 슈퍼마켓으로 가서 카트를 끌며 이것저것 신나게 담았다. 두 사람의 일주일치 식료품을 계산하고 나서야 산처럼 쌓인 짐을 보고 뒤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욕심을 너무 냈나. 아이에게는 식빵 하나를 들어달라고 부탁하고, (다른 식료품들에 눌려 뭉개진 식빵은 곤란하다) 양쪽 어깨와 양쪽 팔에 주렁주렁 짐을 걸고 앞뒤로 휘청거리며 택시를 타러 나왔다. 날은 벌써 어두워졌고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일단 그랩 카를 예약하려고 앱에 접속하는데 연결조차 잘 되지 않는다. 내가 구입한 스마트폰 요금제가 갑자기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것저것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았던 점이 후회스러웠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겨우 그랩 초기화면에 연결되었는데 주말이라 예약 자체가 불가능했다. 열 번이 넘도록 시도해봐도 예약이 안된다는 똑같은 메시지뿐이었다. 낭패였다.

 

쾌적하고 화려한 SM 몰에서 보내는 즐거운 한 때


우리가 머물고 있는 그레이스 레지던스에서 여기 SM 몰까지 무료 셔틀을 운행하고 있는데, 오는 길에 4시 15분 차를 이용했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차 시간이 저녁 8시 15분인데 기다리기 애매한 시간이라 그랩 카를 타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잡히지 않는 택시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사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7시 50분이 다 되었다. 이렇게 되었으니 그냥 조금 더 기다리다 셔틀을 타고 가자. 그래서 아이와 함께 아까 셔틀에서 내렸던 지하 주차장 입구를 향해 무작정 걸었다. 그 거리가 어마어마했다. 곧 어깨가 끊어져나갈 것 같았다. 그리고 아이가 뒤쳐질 때마다 챙기면서 걷기도 어려웠다. 일단 지하주차장에 마련된 간이 승차장에 앉아 셔틀을 기다리는데 문득 불안했다. 사실 아까 운전사에게 되돌아가는 셔틀 출발장소를 따로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상식적으로 내렸던 곳에서 태우겠지...라는 생각으로 앉아있는데 초조한 마음은 우리 주변으로 달려드는 모기만큼이나 위협적이었다. 우리 앞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승합차들이 들어와서 사람들을 태우고는 다시 빠져나갔다. 우리가 타고 온 그 셔틀이 아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하고 그쪽으로 다가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서성거렸다. 어디 물어볼 곳이 마땅치 않았다. 당혹스러운 눈빛의 아이는 한 밤 중에 엄마가 복잡한 주차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결국 시간은 8시 20분이 지났다. 셔틀은 아마도 다른 정류장을 이용하는 모양이다. 장을 보고 난 뒤 1시간 30분이 넘도록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아이 보기가 민망해진 나는 '네가 엄마 때문에 고생이 많다'며 '미안하다'라고 말한 뒤, 다시 복잡하고 거대한 쇼핑몰 안으로 들어섰다. 젠장! 필리핀의 크고 작은 모든 쇼핑몰은 입구에서 보안 검색을 꼼꼼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입구에 들어설 때 그 산더미 같은 짐을 내려놓고, 내 크로스 가방 안을 열어서 보여주고, 다시 바닥에 엉망으로 쓰러진 노란 봉투 더미를 급하게 추슬러 (그 와중에 어쩔 줄 모르는 아이까지 챙겨서) 앞으로 곧장 걸어 나갔다. 쇼핑몰 내 안내판에는 택시 승차장 표시가 잘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상점의 직원들에게 물어물어 결국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 정 반대쪽 건물 밖에 있던 택시 승차장을 찾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엄청난 줄이 서있었다. 그럼에도 안도의 긴 숨을 내뱉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저 줄에 서기만 하면 어떻게는 택시를 타고 이 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니까. 한참을 기다린 후에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길을 잘 모르는 기사에게 내비게이션으로 가는 길을 일러주면서 마침내 그토록 그리웠던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밤 9시 50분. 집 근처 쇼핑몰에서 장을 보고 오는데 무려 6시간이 걸렸다. 이 얼마나 탁한 능력인가. 지극히 평범하고 무미한 일상적 경험을 극적인 탐험으로 바꾸는 이 능력, 그래서 나와 함께 있는 아이가 고생이다.


또 이어지는 모험

이틀 만에 또 장을 보러 올 줄은 몰랐다. 그래서 비장한 마음으로 한국에서 가져온 거대한 장바구니까지 챙겼다. 군장을 정비하고 꼼꼼하게 챙기는 군인의 마음이 이러할. 시행착오는 한 번으로 족하다. 오늘은 가급적 빨리 움직여서 동선을 최소화한다. 게다가 오늘은 평일이니 지난번과 같은 택시 대란은 없을 것이다.

 

SM 슈퍼마켓의 다양한 과일들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오크라(Okra)


숙소의 쾌적한 로비에 앉아 우아하게 그랩 카를 예약한 뒤 건물 입구에서 쇼핑몰 입구까지 원스톱으로 아주 편안하게 올 수 있었다. 망설임 없이 바로 슈퍼마켓으로 돌진하여 딱 필요한 만큼만 카트에 담아서 (그런데도 양이 저번에 비해 크게 줄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계산을 마치고 여러 개의 봉투들을 큰 장바구니에 가능한 많이 눌러 담고, 그래도 남은 두어 개의 봉투는 따로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중앙 출입문 쪽으로 가서 그랩 카 예약을 시도해보았다. 역시나 오늘도 예약이 되지 않는다. 그 길로 바로 택시 승차장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어라, 평일 낮인데도 사람이 많다. 택시가 자주 들어오지 않아서 주말에 비해 대기줄이 잘 줄어들지 않는다. 하나둘셋넷다섯... 무심결에 내 앞에 선 사람들의 머리를 자꾸 세게 되었다. 옆에 선 아이는 쉴 새 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유튜브 방송과 게임 이야기를 해대고 있다.


이제 내 앞으로 셋 남았다. 그런데 갑자기 종말이라도 온 것처럼 하늘이 까매지면서 순식간에 돌풍과 함께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과장이 아니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한국에서 우리는 이것을 태풍이라 부른다. 일순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가고, 나처럼 택시를 오래 기다린 사람들은 건물의 처마 밑으로 최대한 줄의 행렬을 흩트리지 않은 상태로 숨었다. 가련하게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홀딱 젖고 말았다. 바람이 얼마나 거세었던지 그곳의 경비원들은 제일 먼저 택시 승차 사인이 그려진 철구조로 된 안내판을 눕혀놓았다. 그렇다, 그 날씨는 작은 철구조물뿐만 아니라 아기돼지 삼 형제의 나무집과 벽돌집도 손쉽게 날려버릴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


그 난리 통에 아이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깡충깡충 뛰기 시작했다. 깔깔깔 웃는 아이의 얼굴은 분장한 개그맨처럼 보일 정도로 과장된 놀람과 기쁨이 뒤섞여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그 순간이 아이에게는 그 어떤 사건보다도 극적이고 강렬했던 모양이다. 만약 리조트 안 수영장에서 이러한 아이의 모습을 목격했다면 그 원초적 기쁨과 순수함에 감탄하며 아이와 함께 그 순간을 만끽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복잡한 도심 속 쇼핑몰의 택시 승차장, 게다가 이 난리통 속에서 자칫하면 내 차례를 놓칠 수 있다. 내 세 번째의 순서를 사수하는데 모든 정신을 쏟아야만 했다.


결국 성공적으로 내 차례를 사수했고, 이번의 택시 기사는 감사하게도 우리 숙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잠시간이나마 긴장을 풀고 차창밖으로 보이는 폭우 속의 거리를 바라보니 이 좁은 택시 안이 아기 요람만큼이나 안전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이 순간 택시 안에 있는 것이 감사할 뿐

 

작가의 이전글 3일: 어쩌다 마닐라 오션 파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