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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Aug 03. 2019

3일: 어쩌다 마닐라 오션 파크

갑작스러운 수업 취소와 주말의 복잡한 아쿠아리움의 이중주

당혹스러운 통보

30일은 여행으로서는 다분히 긴 시간이고, 영어 연수를 위해서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그래서 진키에게 시간이 허락된다면 주말에도 수업을 해줄 수 있는지 양해를 구했다. 마침 이번 주는 특별한 일이 없으니 토요일 일요일 모두 수업이 가능하다고 했고 오전 9시로 약속을 잡았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아이는 아침 7시에 부지런히 일어나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하고, 간단히 아침을 먹고, 책상 앞에 앉아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시계를 보니 이미 9시 30분, 아무런 연락이 없다. 어찌 된 일인지 걱정이 되어 문자를 남겼다. 잠시 후 돌아온 문자는 몸이 아파서 오늘 수업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일단 알겠으니 잘 쉬라고 답장을 보내 놓고 잠시 턱을 괴고 앉아 곰곰이 이 상황을 복기해보았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여럿 있었다. 사실 어제 첫 수업에도 한 시간 반 정도 지각을 했다. 이유는 지금 하고 있는 단기 프로젝트 업무 때문에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시간 맞춰 오기에는 교통체증이 너무 심했다고 했다. 이제 막 서로 알아가는 단계였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핑계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라 생각하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이틀 연속 시간 약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당일 수업 취소도 약속한 시간이 훨씬 지난 후에, 그마저도 내가 먼저 연락을 해서 겨우 알 수 있었다. 혹시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것은 아닐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시간 약속을 어기는 것은 아닐까? 필리핀의 시간 개념은 한국과는 다른가?


내가 탄 롤러코스터는 다시 빠른 속도로 바닥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택시

일단 수업은 취소되었고 오늘 하루는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까. 뾰족한 생각이 들지 않자 클룩(KLOOK)에 접속하여 마닐라에서 지금 즐길만한 게 무엇이 있을까 검색해보았다. 클룩은 케이케이데이(KKday), 트립어드바이저(Tripadvisor), 마이리얼트립(Myrealtrip) 등과 같이 여행지 주변의 즐길거리와 여행상품을 간편하게 예약할 수 있는 자유여행자들을 위한 플랫폼이다. 선택까지는 단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오늘의 목적지는 마닐라 오션 파크(Manila Ocean Park)다. 이미 등록해 놓은 신용카드가 있었기에 클릭 딱 한 번으로 입장권을 예매할 수 있었다. 이는 현장에 가서 입장권 구매를 위해 줄을 설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아이는 해양생물을 그 무엇보다도 좋아한다. 특히 다양한 종류의 해파리를 사랑한다. 나는 아이와 손을 잡고 함께 무중력 상태에서 나부끼는 해파리의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조직을 바라보는 시간을 사랑한다. 내 손에 전해지는 아이의 보드라 살결이 해파리의 움직임과 어울려 깊은 감각적 몰입을 준다. 이처럼 우리는 각기 다른 이유로 해파리를 애정 한다.


마닐라 오션 파크의 매표소


마닐라는 서울을 능가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도시다. 특히 트라이시클과 지프니처럼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다양한 형태의 차량이 매연 가득한 도로를 점령한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것만 같다. 이번에 와서 보니 복잡한 도로 상황은 베이징과 거의 맞먹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냥 혼자 걷다가도 잘 넘어지는 아이를 이렇게 혼잡하고 정신없는 환경에 내놓기가 겁이 났다. 전형적인 과잉보호 행태라 할 수 있다.


도로를 가득 채운 지프니(Jeepney)


일단 그랩 카 예약을 시도했다. 주말의 피크타임인지라 가격이 공항에서 숙소까지 왔던 요금의 두배를 육박하였다. 동시에 구글에 접속하여 일반적인 택시요금을 비교했더니 그 차이가 컸다. 그래서 (제한된 예산을 가지고 한 달을 버텨야 하는 상황이라) 단지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기로 했다. 택시가 잘 보이지 않아 금세 초조해졌다. 벌써 오전 11시가 지나고 있는 시간이라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이때 나와 아이가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변에 서 있는 게 명백해 보이는데도, 한 얌체 같은 젊은 여자가 우리 바로 앞 3미터 정도에 앞질러 선다. 그 앞으로 다시 앞질러 설까 잠시 고민하다가 모양새가 빠지는 것 같아 관두었다.


저 앞에서 빈 택시가 보인다. 내 앞의 여자는 정신없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 기회다 싶어 내가 먼저 재빨리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다. 우리를 향해 달려오던 택시를 뒤늦게 발견한 여자가 도로변으로 나아가 순식간에 가로챘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었다. 출발하려는 택시를 붙잡아 앞좌석 쪽 차문을 열고 기사에게 항의했다. "방금 아까 내가 불러서 온 것이 아닌가, 왜 이 여자가 차에 타도록 놔두었는가, 우리가 타야 한다." 난처한 표정의 기사는 어쩔 줄 몰라하고 뒷좌석의 여자는 따갈로그어로 기사에게 그냥 빨리 출발하라는 뉘앙스로 사납게 말을 뱉었다. 결국 택시는 엉뚱한 사람을 태우고 출발했다. 그 모든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던 아들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표정과 말투가 무섭다고, 지금 엄마 마음이 너무 급한 것 같으니 조금만 더 느긋하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딱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옳은 소리였다.


마닐라의 택시


아쿠아리움

마닐라 오션 파크는 여러 테마의 전시형 아쿠아리움이 쇼핑몰에 입점해 있는 상점들처럼 각기 다른 입구와 출구를 사용했다. 입구에서 미처 지도를 챙기지 못한 우리는 쉽게 길을 잃었다. 동선이 자연스럽게 흐르듯이 연결되는 형태가 아니라 일층과 이층을 계속 가로질러야만 원하는 테마의 아쿠아리움을 찾을 수 있는,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색다른 (아주 복잡한) 구조였다. 때마침 토요일 주말 오후였기에 가족 단위의 방문객으로 어느 곳이나 매우 혼잡했다. 한 달간 마닐라에 체류하는 동안 아이와 함께 한번 정도는 올 줄 알았지만, 그것이 토요일이 될 줄이라고는 오늘 아침까지도 상상하지 못했다.


여기저기 붙어있는 광고 문구에 따르면 이곳은 필리핀 최초의 아쿠아리움으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는데, 그만큼 공간 구성이나 설비들이 노후되었다. 좁은 공간 안에서 마네킹처럼 움직임 없이 가만히 서있던 펭귄들, 요란한 조명과 조악한 조형물로 이루어진 (에어컨 바람이 가장 시원했던) 크리스마스의 마을, 1000페소를 내면 산소가 공급되는 커다란 헬멧을 쓰고 거대한 수족관 내부를 걸어 다닐 수 있는 (해양생물들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를 줄 것이 명백해 보이는) 언더 워터 워킹 프로그램 모두 어딘지 모르게 조금씩 불편했다. 특히 필리핀에서 서식하는 맹금류를 거대한 그물에 가둬놓은 야외 전시장은 독수리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을 제공했지만, 그 아래로 펼쳐진 바다 위를 가득 메운 온갖 쓰레기들에 마음이 심란해졌다. 인간 최대의 재앙은 플라스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번 더 하게 되었다.


아쿠아리움을 좋아하는 아이


아무리 큰 아마존 유역의 물고기도, 사납게 생긴 상어도 아이의 마음을 훔치지는 못했다. 아이는 연신 해파리를 찾았다. 이런 집요한 녀석 같으니라고. 문제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만 해파리관을 찾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직원에서 물어서 찾았는데도 결국 길을 잃고 말았다. 두세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찾아낸 해파리 특별 전시관은 검은 커튼에 가려진 신비로운 입구의 위용에 비해 실제 내용은 단출했다. 가정에서 관상용으로 키울법한 소형 해파리들이 크고 작은 수족관에 담겨 무지갯빛 색깔로 변하는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한적하게 유영하고 있었다. 아이는 그저 눈앞의 해파리를 보며 기뻐했다. 얼굴 위로 밝게 번지는 아이의 미소를 보며 또다시 오늘 하루치만큼의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해파리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아이


거울 벽과 강렬한 조명이 인상적인 해파리관


또다시 택시

마닐라 오션 파크의 자랑, (그러나 가련하고 측은한 주인공들의) 물개쇼가 끝나자 오후 3시 30분이 막 지나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서둘러 출구를 빠져나왔다. 이 많은 주말 인파 속에서 택시 경쟁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관람객들이 순식간에 내 좌우에 늘어섰다. 택시 승차장이 따로 없었기에 순서라는 것은 없었다. 일단 빈 택시가 들어오면 먼저 나서서 잡는 사람이 임자였다. (가뜩이나 굼뜬) 아이 손을 잡은 채로 들어오는 택시를 재빠르게 선점하기란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일단 마닐라 오션 파크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휑한 산책로를 따라 걸어 나오니 저 앞에 철문이 보였고, 그 철문에 매달려 안쪽을 노려보고 있는 많은 남자들도 시야에 들어왔다. 아뿔싸, 순간 긴장되었다. 태연한 척 문을 나서는 순간 그들은 내게 달려들며 택시와 트라이시클을 흥정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앞만 보고 걸어 나갔다. 호객꾼 무리를 벗어나자 더욱 삭막한 도로가 나타났다.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닌지 후회되었다.


마닐라 오션 파크의 하이라이트 "물개쇼"


그때 마침 손님을 태우고 들어오는 택시를 발견했다. 일단 손을 흔들며 탑승의사를 내보였다. 고맙게도 택시는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승객이 내리자마자 나는 아이를 재촉하여 재빨리 택시에 올라탔다. 우리를 향해 뒤돌아보는 기사는 놀랍게도 이가 거의 다 빠진 60~70대의 할아버지였다. 게다가 간단한 영어단어조차 구사하지 못하는 전격 로컬 기사분이셨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손짓 발짓을 해가며 목적지를 설명했다. 가까스로 행선지를 알아들은 할아버지 기사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말씀하시는 내용의 뉘앙스가 거리가 너무 멀고, 차가 많이 막혀 600페소는 받아야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집에서 여기까지 올 때 미터기로 350페소가 나왔고, 여기에 차량 정체에 따른 추가 요금 50페소를 보태어 400페소를 지불한 터였다. 나는 할아버지 기사님과 계속 흥정을 했고 결국 450페소로 어렵게 합의를 봤다.


흥정을 마친 그때만 해도 몰랐다. 본격적인 모험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할아버지 기사님의 택시는 주인을 닮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낡았다. 차가 달릴 때마다 바닥이 들썩여 두 발에 불안한 진동이 그대로 전달되었고 (이러다가 밑이 뚫려 차 아래로 빠지는 것은 아닌가 불길한 상상이 계속되었다) 등받이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오른쪽 어깨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과열로 불이 나는 것은 아니겠지. 멀쩡한 BMW도 도로 한복판에서 불이 나기도 하는데 어쩌나) 등받이는 가운데가 푹 꺼져 똑바로 앉아있을 수가 없었기에 상체를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운전석 쪽에 이 곳과 어울리지 않게 스마트폰 거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어차피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인지라, (또한 기사님이 목적지를 제대로 알고 계시는지도 분명하지 않았기에) 달리는 택시 안에서 몸을 앞으로 숙여 직접 내 스마트폰을 그 거치대에 고정시켰다. 액정 화면에는 가장 최적의 경로를 안내해주는 구글 내비게이션이 구동되고 있었다. 설정 메뉴에 들어가 음성 안내 언어도 필리핀 따갈로그어로 변환시켜 놓은 상태였다. 이제 할아버지 기사님은 내비게이션이 안내해주는 대로 운전하시면 가장 빠른 길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기사님은 지도를 읽을 줄 모르셨다! 내비게이션 쉴 새 없이 경로 이탈에 따른 새로운 경로 설정을 하느라 정신없이 분주했다. 계속 흘러나오는 따갈로그어 음성 안내도 그냥 쉽게 무시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할아버지 기사님은 자신 앞에 놓인 화면이 목적지로 가는 경로를 나타낸다는 것을 대충 짐작하셨던 듯하다. 그 순간 나는 할아버지 가까이 몸을 숙인 뒤 오른팔을 내밀어 연신 왼쪽 오른쪽을 가리키며 운전을 보조했다.


어느새 우리는 함께 웃으며 왼쪽 오른쪽,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도로를 잘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기사님의 입장에서 나의 과장된 동작과 긴박하게 외치는 "레프트!" "라이트!"라는 소리가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이렇게나 열심히 그리고 간절하게 기사님을 응원하며 함께 길을 찾아나가는 상황 자체가 기이했었다. 마침내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 택시요금을 건네자 할아버지 기사님은 정말 환하게 웃으셨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할아버지,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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