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뻔했다. 이번 마닐라 여행의 목적은 아이의 영어공부였다. 폭풍처럼 휘몰아친 에어비앤비의 강렬한 사건 때문에 도대체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그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왜 하필이면 마닐라로 영어공부를 하러 왔는가. 그리고 왜 이 여자는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가. 이 부분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내 과거 경험과도 일부 관련되는데, 우리 엄마는 교육열이 대단하신 분이었다. (그 사실을 당신만 모르시는 듯하다, 그저 남들처럼 기본만 겨우 했던 엄마라고 생각하실 거다.) 나는 시키는 대로 곧잘 따르던 아이라, 부모 입장에서는 투자 대비 효율이 상당히 좋았던 딸이었다. 국영수 교과 학원이나 과외는 거의 하지 않았다. 인천의 한 평범한 여자 고등학교에서 적정 수준 이상의 내신 등급을 늘 받았기 때문에 부모님들도 별다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셨던 듯하다. 게다가 우리 집 경제사정은 빠듯했다.
체육 전공 아빠와 무용 전공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근골격계 발달이 남달라서 중학교 때는 육상선수로 활동하였다. 지금도 내가 작정하고 내달리면 평균 체력의 남편보다 조금 더 빨리 뛴다. 이런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피아노 학원 원장이 엄마에게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당신 딸이 피아노에 특별한 소질이 있다고! 또래 아이들과 달리 건반을 누르는 기술이 좋다면서... 그러나 난 단지 힘이 (좀 많이) 좋았을 뿐이었다. 이 잘못된 정보로 우리 엄마는 딸을 피아니스트로 키우려는 원대한 꿈이 생기셨고, 없는 살림에도 나는 늘 명문대 출신 선생님의 피아노 개인교습을 받아야 했다. 이후 미술대학 진학 계획을 말씀드릴 때까지 이 일은 지속되었다. 지금은 애석하게도 피아노를 전혀 즐기지 않는다. 피아노 개인교습을 관두면서 내 안의 피아노와 연관된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
농작물을 심을 때 반드시 그 지역의 기후와 토양 상태를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교육에 있어서는 아이의 기질과 관심사가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그리고 우리 엄마)를 포함한 부모들은 자식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내 아이는 (객관적으로 봐도) 귀하고 특별하지 않은가! ㅎㅎㅎ 이러다보니 나와 같은 엄마들은 스스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과거에 내가 되고 싶었던 모습을 지금 내 앞의 아이에게 투사한 뒤, 그 껍데기를 보며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실망하는 일이 잦아지는 것이다.
나와 피아노의 잘못된 만남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이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아 나에게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맞다, 아무리 아닌척해도 나는 성격이 매우 급하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아이는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도 매일매일의 학교생활이 즐겁고 신난다는 아들 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견고한 줄로만 알았던 믿음에 커다란 금이 가고 말았다. 누구도 아닌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균열이었다.
최선의 교육
우리 주변에는 부모 눈높이를 충족할만한 성공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아이들 교육에 극성으로 매달려 온갖 투자를 아끼지 않는 부모가 꽤 있다. 반면 사교육 없이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우다가 고등학교 입학 후에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는 부모도 있다. 특히 자유방임 교육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결과가 부모들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결국 부모는 자기 자신을 책망하게 된다. 자신의 얄팍한 신념을 위해 아이의 성장 기회를 박탈한 것은 아닌가, 과연 내가 자식들을 위해 최선을 다 했는가와 같은 헤어 나오기 어려운 원죄론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대학입시 시스템은 전원 스위치와 구조적으로 똑같다. '인(in)' 아니면 '아웃(out)', 오직 이 두 개의 선택만이 가능하다. 애매한 양발 걸치기는 어느 쪽으로든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in)을 할 자신이 없다. 시간과 노력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경제적 비용을 끝까지 다 감당해낼 자신이 없다. 나 자신의 불안한 노후대책은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공부라는 것이 운동선수와 마찬가지로 아이의 능력이 반드시 뒤따라줘야 하는데 도박하듯이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아웃(out)은 어디 만만한가. 대안학교, 직업학교, 홈스쿨링... 이 모두가 아이의 성격과 개성이 뒷받침해줘야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 아이의 꿈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결코 각색한 것이 아니라 "엄마,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라며 해맑게 말했고, 그때의 나는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그밖에 국제화 시대에 발맞춰 아이들의 폭넓은 경험과 더 나은 선진의 (영어) 교육을 위해 조기 유학을 떠나는 방법을 고민해 볼 수 있다. 이 매력적인 대안을 선택하여 정말로 많은 가족과 아이들이 떠났고 지금도 끊임없이 떠나고 있다.
최선의 교육적 선택을 위해 해외로 떠나는 부모들
2019년도 1학기를 마무리하는 6월 즈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온몸에 스몄다. 뼈를 깎는 진지한 숙고 없이 교육적 이상을 방패 삼아 그 뒤에 숨어 모든 고민과 선택을 끊임없이 미뤄왔던 터였기에, 대책 없는 낙관주의가 훗날 얼마나 큰 폭탄이 되어 돌아올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여기에는 3년 전 아이 둘을 데리고 캐나다 온타리오주 런던으로 조기유학을 떠난 큰 시누의 방학맞이 귀국도 한몫을 했다. 모든 게 막연하기만 했다. 내가 마흔을 넘긴 이후 더 이상 나이 세는 것을 멈춘 것처럼, 아직 내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 갓 유치원을 졸업한 어린아이 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여름방학을 지나 가을학기가 오면 이 아이는 초등학교 고학년, 4학년에 진학하게 된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라니! 이 아이는 아직 자신이 뭐가 되고 싶은지, 무엇을 잘하는지 알지 못하고 그저 평범한 사람이 되기를 막연하게 꿈꾸는 "보통의" 아이란 말이다!
걷잡을 수 없이 조급증이 일었다. 이렇게 늘 하던 대로 관성에 젖어 1년이 지나면 이 아이는 대책 없이 초등 고학년이 된다. 다시 3년은 눈 깜빡할새 지날 것이고, 아무런 대책 없이 중학교에 진학하여 본격적인 입시 준비를 시작하는 친구들 틈에서 그저 조용히 지내다가 그렇게 고등학생이 될 것이다. 그 뒤에 벌어질 일은 글로 적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을 일이다. 거대한 방을 가득 채운 도미노의 행렬이 굉음을 내며 빠르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타타타 타탁... 그러면 한국의 숨 막히는 입시제도에서 벗어나 조기 유학을 떠나볼까. 뉴질랜드, 호주, 미국, 캐나다 등 매력적인 교육시스템을 지닌 나라가 모두 고려대상이 된다. 나 같은 경우는 이미 성공적으로 캐나다에 정착한 큰 시누와 조카 둘이 있으므로, 캐나다부터 알아보기 시작했다.
조기 유학으로 인기가 매우 높은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토론토(Toronto)
버려진 부품들
이런 극적인 심리적 변화 밑에는 내 직업 상황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예술학 전공인 나는 미술대학에서 미술이론 강의를 12년째 해오고 있다. 올해부터 새롭게 시행된 강사법은 원래 대학의 비전임 교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어디 세상이 그렇게 순진하던가. 모든 대학은 강사법의 테두리 안에서 가장 영악한 방법을 동원하여 인원을 감축하고, 임금을 깎고, 기존의 혜택을 모두 없애버렸다. 그래서 '강의교수'라는 직함으로 4대 보험과 퇴직금을 보장받았던 소박한 연봉의 계약직 자리가 올해로 없어졌다. 강의교수는 학과에서 지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연구실적과 업무계획서 등을 기반으로 총장이 직접 심사 후에 채용한 자리였다. 아무튼 상황은 변했고, 그 일방적 해고 사실을 한 통의 짧고 건조한 메일로 통보받았다. 메일을 읽는 순간 무력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가 누군가에 의해 구겨져 바닥에 내던져진 느낌이 그러할까.
교육의 가치와 현실에 대한 답 없는 고민들
타의에 의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더 이상 학교에 미련을 둘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참에 아이를 데리고 캐나다로 떠나볼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바로 캐나다 조기유학 관련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6월 학기말 성적 입력을 끝내자마자 거의 일주일 동안 오로지 캐나다 유학 관련 정보를 모으는데 몰두했다.
교육의 자본주의화
광범위한 정보가 모아졌고, 그 안에서 추릴 것과 버릴 것을 구별하여 다시 숙고하기를 몇 차례. 큰 시누가 살고 있는 온타리오주 런던과 동부 해안가에 자리 잡은 노바스코샤주의 주도 핼리팩스(Halifax)로 후보지역이 좁혀졌다. 두 곳 모두 아이의 교육을 위한 곳으로 손색이 없었다. 남편이 퇴근한 뒤 둘이 마주 앉아 이 문제를 두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무엇을 위해 갈 것인가와 같은 가치적 측면보다도, 학비 생활비 거주비 교통비 의료보험비와 같은 실질적이고도 명확한 숫자 문제가 더욱더 절실한 문제였다. 남편과 나는 계산기를 두드리듯 우리 가정의 현재 재무 상태가 앞으로 최소 2년 최대 5년간의 캐나다 유학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지 차근차근 짚어보았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의 주도 핼리팩스(Halifax)
결론은 불가능.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돈을 이리저리 넣고 빼보아도 아이의 캐나다 조기유학을 위한 자금 마련은 어려웠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이미 많은 대출을 끼고 있는 상태인 데다가, 양가 부모님에게 들어가는 용돈과 비용이 무시 못할 수준이었다. 남편은 큰 아들이고, 그 역할을 대한민국의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해내고 있다. 소위 말하는 자수성가형 효자다. (...아들아, 부디 아빠처럼만 커다오!...)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영어) 교육을 위한 해외 조기 유학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주어진 여건 안에서 가능한 대안을 다시 찾아봐야 한다. 또한 살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던 나의 수입이 형편없이 낮아지는 것도 정해진 사실이었기에, 앞으로 더욱 현명하게 지출 계획을 세워야 할 터였다. 아이의 교육에 있어서도 집중과 선택이 필요하였으므로 일단 우선순위를 세워야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영어는 더 늦기 전에 제대로 노출시켜야 한다. 게다가 이미 너무 늦은 감이 있다. 내가 바라는 영어교육의 방향은 대학입시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시험용 영어가 아니라, 온라인 상의 수많은 고급 정보와 강연 그리고 아름다운 문학을 원서로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영어가 필요하다. 더 이상 지식은 한 곳에 폐쇄적으로 모이고 집적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분산될 것이다. 이제 진정한 능력은 파편적으로 흩어진 가치 있는 정보와 지식을 모을 줄 알고, 그것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조화시켜 이해하고 습득하는 데 있다. 소위 SKY를 비롯한 명문대들은 더 이상 지금과 같은 독점적 가치와 위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국내외 대학에서 학생으로 그리고 또 교수로 인생의 전부를 살아온 내가 현장에서 보고 느낀 점이 있기에 곧 대학에서 벌어질 변화를 감히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리핀
당장 보름만 지나면 아이의 여름방학이 시작된다. 원래 계획은 강화도에 있는 외할머니댁에서 여름방학을 신나게 보내고 올 생각이었다. 강화도 친정집에 가면 아이를 끔찍하게 사랑하시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그리고 올해로 아흔여섯이 되신 외증조할머니가 계신다. 여기서 내가 고정적으로 맡은 역할은 구박덩어리다. 늘 아이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어설픈 엄마, 그리고 그것을 훈계하시는 어른 세 분이 강화도에 계신다. 아이는 무엇이든지 자기가 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원더랜드에서 한 달 동안 머물다가 개학날 맞춰 집으로 돌아올 것이었다. 요술램프의 지니가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있는 강화도는 내 아들에게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물론 하루의 일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놀고 싶을 때 놀며 자고 싶을 때 자는 게 방학 일과라면 일과겠다.
강화도에서 여름방학 내내 신나게 놀다 오는 것도 좋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어떻게 사람이 단 며칠 사이로 심리가 180도로 확 달라질 수 있을까. 역시 난 정상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나는 일단 마음을 먹었으면 어떻게든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는 (여름에 태어난) 불같은 여자이다 보니 폭주하듯 여러 가지 가능성을 빠르게 체크해 나갔다. 한국형 프랜차이즈 대형 영어학원은 일단 고려대상에서 제외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시험대비용 영어가 아니기 때문에 주변의 1대 1 수업이 가능한 학원을 알아봤다. 강사진 대부분이 해외 유학 경험이 긴 한국 선생님들인 데다가 비용이 시간당 5~7만 원 선으로 예상보다 많이 비쌌다. 역시 아이들의 교육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이다. 그래서 여러 인터넷 카페에 가입하여 우리 동네에서 활동하는 원어민 영어 과외교사들을 찾아봤는데, 대개가 아주 오래 전의 게시글이었고 현실적으로 찾기가 어려웠다.
하루는 동생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다가 이 얘기가 우연히 나왔다. 얘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동생은 바로 필리핀 마닐라를 추천해줬다. PADI 다이빙 강사이면서 지금은 사립대학 대학교수로 있는 남동생은 필리핀을 너무나 좋아한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와 아름다운 바다, 그리고 한국과는 다르게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그런 남동생의 취향을 잘 알기 때문에 그냥 무시하고 흘려버리려 했다. "나는 휴양지로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아이의 영어교육 때문에 고민하는 중이라고!" 갑자기 남동생은 얼마 전까지도 마닐라와 세부에서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교육사업을 했던 지인과 통화를 한 뒤,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아, 귀가 얇아 슬픈 짐승이여! 그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필리핀 마닐라가 이번 여름방학의 목적지가 되고 말았다.
이번 마닐라행은 미리 계획되었던 일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준비된 예산이 전무한 상태였다. 항공권과 에어비앤비는 일단 신용카드로 지불하여 가뿐하게 다음 달로 미뤘고, 30일간의 아이 영어 수업료와 식비 및 제반 비용만 준비해 가면 될 듯했다. 그렇게 한다면 큰 무리 없이 아이에게 인생 처음으로 영어 교육을 받게 할 수 있다. 한 번도 영어학원을 다녀보지 못한 아들에게 이번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지 좋은 자극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여름방학 30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무엇이라도, 단 하나라도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런 믿음으로 마닐라 자급형 영어 단기연수 프로그램을 (북 치고 장구 치는 마음으로) 오롯이 혼자서 알아보고 계획해나갔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 마닐라(Manila)
현지 한인업체를 이용할 것인가, 마닐라 어학원에 등록할 것인가, 과외수업을 알아볼 것인가, 몇 가지 선택지 중에서 고민했다. 그간 몇 차례의 초등학교 부모 참관수업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아이가 생각보다 조심스럽고 소극적이라는 사실이었다. 특히 영어 방과 후 수업에서 자발적으로 발표하거나 큰 소리로 대답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영어학원을 다닌 경험이 전혀 없는 데다가, 아무리 소그룹 학원 수업이라고 해도 4~10명 정도의 그룹 안에서 말 한마디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 뻔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성향과 짧은 준비 시간을 고려하여 과외교사를 알아보기로 했다.
마닐라에 도움을 청할 한만 지인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필리핀 거주 한인을 위한 온라인 카페 몇 군데에 가입하였다. 그 외에 영어 과외교사를 중계해주는 몇몇 필리핀 웹사이트를 찾아 등록된 교사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온전히 며칠의 시간을 투자하여 과외선생님 관련 정보를 모으고, 그중 신뢰할 만한 느낌이 들거나 관심이 가는 과외선생님에게는 적극적으로 연락해 보았다. 여기서는 오랜 시간 축적된 나의 배낭여행 정보 수집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게시글의 문장 그 자체보다도 행간 속에 미묘하게 깔려있는 분위기가 더욱 결정적이기 때문에 내 나름의 주의가 필요했다. 또한 한국인 학생과 수업 경험이 있는 대부분의 필리핀 영어 선생님들은 카카오톡을 사용했기에 한국에서 미리 연락을 해보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대여섯 명 정도의 필리핀 영어 선생님들과 연락을 해본 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이었던 선생님과 일정을 조율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이 선생님의 편의를 위해 그녀가 살고 있는 동네에 숙소를 잡기로 했다. 그래서 여기 그레이스 레지던스로 오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여행은 (문학적이게도) 내 아이의 영어 과외선생님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기도 했다.
우리 아들의 영어 과외 선생님 진키(Jinky)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 진학을 위한 등록금을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 영어 과외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일을 열심히 해내고 있는 1999년생 필리피노 여성이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백인 새아빠 밑에게 자랐다고 한다. 독립적인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그만 진키가 좋아지고 말았다. 꼭 진키에게 아이를 맡기고 싶었다. 물론 노련한 교수법으로 수업을 진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아이를 대하는 진심 어린 태도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순탄치 않았던 마닐라 도착 직후 만난 진키는 그저 그 존재만으로도 감사했다. 아이도 반짝이는 초콜릿 빛 피부에 커다란 눈이 아름다운 진키를 만나자마자 바로 좋아하게 되었다. 세 시간의 첫 수업을 무사히 마치고 난 뒤 아이는 생각보다 영어가 재미있다며 까불거렸다. 모든 수고와 걱정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