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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Aug 02. 2019

1일: 절망의 나락

에어비앤비의 배신 그리고 어렵게 만난 행운

예견된 비극

건물 16층에 다다르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들이 25인치 캐리어를, 나는 커다란 이민가방을 끌며 ‘우리 집’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도쿄 도심 한복판에 있는 비즈니스호텔을 연상시키듯 ㄱ자로 꺾인 긴 복도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현관문들이 흡사 벌집을 연상시켰다. 메신저를 통해 주고받은 대화에서 주인은 집 현관은 열어놓고 열쇠는 테이블 위에 놓아두겠다고 일러주었다. 괜히 두근거리며 (설마 문이 잠겨있는 것은 아니겠지)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더니 스르륵 돌아간다. 만세! 드디어 도착했다.


그레이스 레지던스의 복도


문을 열고 들어선 공간은 일자형으로 주방 겸 작은 거실, 안쪽에 가벽으로 분리된 초소형 침실이 놓인 7~8평 정도의 공간이었다. 보통의 더블베드 객실 면적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짐과 함께 긴장을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돌리던 찰나 실내 환경이 좀 더 분명한 형태로 시야에 들어왔다. 어라, 에어비앤비에서 본 사진과 다르다. 일단 새벽 비행으로 지친 아들에게는 침대에 누워있으라 일러두고 좁은 집구석 구석을 살펴보았다. 안도의 기쁨이 절망과 당혹감으로 바뀌기까지는 단 몇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호스트가 게시해놓은 사진과 설명을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실제로 묵었던 이용객들의 후기를 면밀히 분석하고 비교하여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이었다. 특히 어린 두 아이와 한 달 동안 머물렀던 미국 엄마의 매우 만족스러운 후기가 결정적이었다. 세 달 전에 작성된 그녀의 후기는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 ‘한 달 동안 필요한 모든 것들이 구비된 곳’이라는 매혹적인 문구가 나열되어 있었다.  


사회주의를 찬양하던 빛바랜 프로파간다의 구호처럼 나와 내 아이가 있는 이곳은 사진이나 후기에서 묘사된 문구들과는 영 딴판이었다. 화장실과 거실 바닥에는 누군가의 머리카락이 굴러다녔고, 벽 모퉁이마다 거미줄에 앉아있는 (루이즈 부르주아 Louise Bourgeois 풍의) 가늘고 긴 다리의 거미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으며, 거실과 침실의 러그는 알 수 없는 얼룩과 먼지가 뒤엉켜 있었다. 구석에 놓인 선풍기는 세월의 더께를 더한 유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좁은 싱크대 위의 낡은 집기들에는 먼지 섞인 이물질이 보이고, 그 사이로 개미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소파 위에 놓인 낡은 쿠션 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혹은 곤충)가 기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 나는 무너져 내렸다. 차라리 조지 오웰의 <1984> 에서 묘사한 남루한 거주 공간이 이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무섭기까지 했던) 베란다에 널어놓은 누군가의 낡은 작업복


아이가 없었다면 이렇게나 큰 충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불편한대로 일단 밤을 보내고 다음날 적당한 대책을 찾거나 숙소를 옮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함께 이곳에 있는 이상, 벌어진 모든 것들의 책임은 나에게 있었다. 모두 다 내 잘못이었다. 처음부터 다 잘못된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필리핀 마닐라로 장기 여행을 계획했을 때부터 예견될만한 위험이었고, 나의 오만과 무모함으로 아이를 곤경에 빠지게 했다는 죄책감이 무력한 나를 뒤덮었다. 머릿속은 뒤엉킨 실타래처럼 한동안 그대로 멈춰 있었다. 밝기가 충분하지 않은 조명으로 인해 무채색 빛깔이 지배적인 이곳이 연극무대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위에 홀로 서 있는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자기 연민은 사치였다. 혼란한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머릿속으로 다음에 취할 행동을 그려보았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드리핑(Dripping) 회화처럼 생각이 떠오르다 끊기고, 다른 잡념이 스미고, 머릿속이 조각나 파편처럼 부유했다. 다행히 침대 위 아이는 여행길 내내 입었던 옷차림 그대로 깊게 잠들었다. 일단, 집주인에게 이 상황을 알려야 한다. 새벽 2시, 게다가 호스트는 싱가포르에 거주하고 있다. 에어비앤비 메신저를 이용하여 충격적인 집안 상태를 자세히 전하며 여러 장의 사진을 보냈다. 비교적 긴 글과 사진 전송 말미에는 신속한 환불처리를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요청하며 마무리했다. 너무 불안하다.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다 문제가 생긴 여행자가 정말 많다는 것을 각종 뉴스와 SNS의 게시글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다. 사실 나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에어비앤비를 자주 용해왔는데, 그동안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나에게 할당되었던 행운의 동전을 모두 다 써버린 것인가. 과연 집주인은 순순히 환불을 해줄 것인가. 만약 환불을 받는다고 해도 당장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결국 불안 속에서 잠들지 못하고 그대로 아침을 맞이했다.


집 안 가득 쌓여있던 솜털 같은 먼지들


오전 8시가 막 지난 시간, 불행 중 다행이다. 집주인은 흔쾌히 전액 환불을 수락하였다. 오히려 내가 보내준 사진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곧바로 청소관리인을 해고하였고, 낡은 러그와 주방 집기들을 모두 새것으로 교체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에게 거듭 사과하며 용서를 구했다.


제2막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어디로 가야 하나. 애증의 에어비앤비에 로그인하여 주변부터 탐색하기 시작했다. 마침 7, 8월의 마닐라는 우기로 비수기에 속한다. 지금 내가 있는 그레이스 레지던스에 아직 투숙이 가능한 곳이 몇 군데 검색되었다. 마침 잠에서 깬 아이는 초췌한 모습으로 배가 고프다고 한다. 그래, 아이를 굶길 수는 없다. 일단 단지 안 쇼핑몰로 향했다. 아이에게 나의 불안과 피로를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으니,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무엇을 먹고 싶은지 서너 군데의 식당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이는 그중 붉은색 글씨가 돋보이는 간판의 식당을 선택했다. 그렇다, 이 아이는 빨간색을 좋아한다.


“Classic SAVORY(香草)” 퓨전 중식 식당이었다. 아이는 칠리 탕수 새우(sweet and sour shrimp)를 선택하였고, 거기에 내 마음대로 중식 채소볶음을 더했다. 새우가 입맛에 맞았는지 그래도 밥을 반이나 비웠다. 나는 아이가 남긴 음식을 대충 입에 욱여넣고 본격적으로 숙소를 찾기 위해 근처 스타벅스로 자리를 옮겼다. 아이는 스타벅스 무료 와이파이에 접속하여 원하던 게임과 유튜브를 즐기며 자기만의 시간을 만끽하였다. 그 옆에서 나는 초초한 마음을 누르며 모든 신경을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 속으로 쏟아부었다.

 

나와 달리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천진난만한 아이


마침 같은 건물 15층(문제의 숙소 바로 아래층)에 괜찮아 보이는 숙소가 눈에 띄었다.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될 일. 집주인에게 메시지를 보내 예약하기 전에 직접 숙소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지 물었다. 집주인의 응답은 매우 빨랐다. 그로부터 1시간 뒤 15층의 새로운 숙소를 직접 살펴볼 수 있었다. 간이 콩알만 해진 나는 그냥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 일단 머리카락도 벌레도 얼룩도 먼지뭉치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 두 눈은 집을 구석구석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나를 덮친 이 어마어마한 검은 기운이 또다시 내 뒤통수를 노릴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을 본 집주인 부부는 바로 옆 또 다른 숙소를 보겠냐며 나를 이끌었다. 복도 가장 끝에 위치한 두 번째 숙소는 10~11평 정도로 더 넓었고 거실에 (작은) 창문도 2개나 있었다. 오, 감사합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미화 780달러의 비용을 결제하고 16층에 있던 짐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가져왔다.


15층 복도 끝에 위치하여 채광과 전망이 좋은 '우리 집'


마침내 새로운 보금자리가 생겼다. 시계는 오후 4시를 지나고 있었다. 마닐라 도착 16시간 만에 가까스로 짐을 풀고, 가져온 식료품들을 냉장고에 넣고, 그토록 바라던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더할 나위가 없었다. 아이는 새로운 ‘우리 집’이 너무 맘에 든다며 여기저기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완벽한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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