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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Aug 02. 2019

30일 여행의 시작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에서 숙소까지

얼떨결에 도착

2019년 7월 24일 늦은 저녁에 출발한 필리핀항공 비행기는 마닐라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 제2터미널에 자정이 조금 지나 착륙했다. 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와 단 둘이 하는 여행길이라 아이를 위해서라도 낮에 도착하는 편이 나았겠지만, 스카이 스캐너에서 최저요금으로 검색하여 찾은 이 항공편이 나에게는 최선이었다. 기내식 포함에 20kg 무료 수하물까지 제공해주는 항공권이 18만 원대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마닐라행 결정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나마도 떠나기 2~3주일 전에 급하게 알아본 상황이었기에 원하는 일정에 맞춰 나타난 놀라운 가격의 항공권은 무언의 계시와도 같았다.


사실 필리핀은 비교적 익숙한 나라이다. 마닐라와 세부, 보라카이 등지를 방문한 횟수를 모두 더하면 열 번은 넘고도 남을 것이다. 우리 가족(나, 남편, 남동생, 올케)은 모두 PADI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필리핀의 바다에서 다이빙을 즐기기 위해 휴가 철마다 이곳을 찾았다. 그 당시 수화물에는 마스크, 핀, BC 부력조절기, 호흡기, 슈트 등이 실려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현지에서 맛볼 수 있는 탐스럽고 향기로운 과일과 모험심을 자극하는 로컬 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맛에 여행을 다니는 것 아닌가!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있는 나


한때는 부부 다이버


그러나 아이가 생기고 난 후에는 다이빙 여행을 점차 줄이다가 더 이상 다니지 않게 되었다. 아이가 생긴 뒤 일어난 수많은 변화들 중의 하나였다. (그 외에도 작년에 찾아온 돌발성 난청 및 이석증과 같은 귀 문제로 스킨스쿠버는 어느새 나와 더 멀어져 버렸다. 얄궂게도 노화의 시계는 절대로 늦거나 멈추는 법이 없다.)


이번에 찾은 마닐라는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여행의 목적과 마음가짐이 달랐다. 우선 수화물의 내용부터 판이하게 달랐다. 각종 상비약, 김밥 재료, 유부초밥, 고추장을 포함한 조미료와 식재료, 아이가 좋아하는 과자와 간식들, 보드라운 아기 물티슈와 모기약 등... 보통의 나였다면 절대로 들고 올 일이 없는 물건들로 가득 채운 이민가방을 비행기에 싣고 말았다.


또래에 비해 많이 마르고 작은 내 아이는 그 엄마와 달리 새로운 음식에 대한 모험심이 제로에 가깝다. 아이를 굶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억척스럽게 담고 또 담아갈 수밖에 없었다.


긴박한 탈출

긴 줄의 행렬 속에서 가까스로 마친 입국심사 후에 수화물을 찾아 서둘러 공항 밖으로 나섰다. 누군가가 나와 내 아이에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방어적인 자세로 혼잡한 새벽의 공항을 벗어날 궁리만 했다. 그럴 필요까지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리 되었다. 30일간 사용 가능한 17GB 데이터를 제공하는 글로브(Globe) 통신사의 유심을 1000페소에 장착하고, 환율 조건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최적의 동선을 위해 공항의 사설 환전소에서 미화 1500달러 전부를 환전했다. 그렇다, 숙소는 미리 에어비앤비에서 결제를 마친 후였으므로 30일간의 식비와 영어교육비로 준비해온 것이 1500달러였다.


이 돈을 잃어버리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니 자연스레 모든 신경은 돈이 담긴 크로스백으로 향했다. 아, 안 된다! 이 컴컴하고 정신없는 공항에서 잠시라도 아이에게서 눈을 떼면 큰일이 날지도 모를 일이다. 이봐, 정신 차려! 동시에 신속하게 그랩(Grab) 어플에 접속해서 안전하게 숙소까지 이동할 차를 예약해야 한다. 이미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는 시점이라 어렵지 않게 차를 예약할 수 있었다. 카멜레온처럼 부산하게 움직이는 내 두 눈은 배정된 차의 차량번호를 계속 되뇌며 놓칠 것만 같은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배정된 차가 나타났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도요타 스포츠형의 그랩 카(Grab Car)는 선팅까지 해서 온통 새카맸다. 평소 여행길이었다면 전혀 문제 되지 않을 것들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 자신이 불편했다. 그냥 자유여행자로서의 나와 아이의 보호자로서 나 사이에 발견되는 차이가 예상보다 훨씬 컸다. 이민가방과 25인치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는 것을 돕기 위해 차에서 내린 운전사는 앳된 얼굴을 한 순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휴, 마음이 한결 놓였다. 에어비앤비(Airbnb)를 통해 신중하게 고르고 또 고른 숙소는 공항에서 10여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타구익 시티(Taguig City)에 위치한 그레이스 레지던스(Grace Residences), 앞으로 한 달간 마닐라의 보금자리가 되어줄 곳이다.


쾌적하고 깔끔한 로비


24시간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건물의 출입문


그레이스 레지던스는 쇼핑몰과 수영장 2개가 딸린 총 3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신축 단지이다. 단지 입구에는 가드가 24시간 차량 출입을 일일이 확인하였고, 각 건물 1층 로비에는 2명의 경비원이 24시간 근무를 서고 있어서 안전한 거주 환경으로는 손색이 없었다. 잊을만하면 뉴스에 등장하는 필리핀 여행객 살해 사건... 안전,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새벽 2시가 다되어 도착한 밝고 쾌적한 로비에는 2명의 경비원이 깔끔한 유니폼을 입고 우리를 맞이하였다. 집주인이 미리 우리 명단을 등록해준 관계로 여권 확인과 단기 거주 등록을 위한 사진 촬영을 간단히 한 후에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 집’으로 향했다.


곧 이 지난한 여정이 일단락될 것이다. 이민 가방을 끌며 잠시 후 안락한 보금자리에  짐을 풀 생각만 해도 기뻤다.


촘촘한 벌집처럼 보이는 그레이스 레지던스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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