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생존 구조는 공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공생은 종류가 다른 두 생물이 한 곳에서 서로 해를 주지 않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사는 일을 말한다. 모든 생명체는 협력 파트너이고, 쌍방에 이익을 주는 유기체이며, 더불어 산다. 인체에는 많은 미생물이 존재하는데, 이 미생물이 없으면 우리는 인간답게 살 수 없다. 자연계에서 공생이 없다면, 녹색식물이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인간이든 자연이든 모든 생명은 포괄적인 공생 구조에 의존하고, 다른 생명체와 어울려 산다. 열매를 먹는 동물의 공생은 가장 포괄적인 공생이다.
시각장애인과 지체장애인도 공존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과 목발에 의지하는 지체장애인이 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이 아주 험한 길에 도달했을 때였다. 그때 시각장애인이 지체장애인에게 자기를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하자 지체장애인이 말했다.
“내 다리도 끌고 가기 힘든데, 어떻게 도와줘요?”
한참 후에 지체장애인이 시각장애인에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업고 간다면, 난 당신에게 장애물을 알려줄 수 있어요. 그러면 내 눈이 당신의 눈이 되고, 당신의 발이 내 발이 되는 거요.”
“그것 좋은 생각이오. 가시지요.”
시각장애인은 지체장애인을 등에 업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 험한 길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인간은 자연환경 보전이 공존과 공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자극받아 멸종 위기종들을 보호종으로 지정하여 개체 수를 늘리고, 그들의 서식지를 보호하며,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하여 멸종을 막는 일을 전개하고 있다. 유엔이 멸종 생물 보호에 나선 것은 생물 다양성의 손실이 경제, 사회, 문화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 증가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온실가스의 배출량을 줄이도록 노력하는 것도 인간과 환경의 공존을 위한 길이다.
영화 ‘기생충’은 부잣집을 숙주로 그 집에 온 가족이 파고들어 빨아먹고 사는 가난한 집을 기생충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부자 가족은 악독한 면도 없고 갑질도 하지 않고, 남들이 꾸며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다. 반면에 가난한 가족은 온갖 속임수를 써서 부잣집에 파고들고, 속임수가 성공할 때마다 쾌재를 부른다. 두 가족의 공존이 깨지게 된 것은 공생의 원리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두 가족은 각자의 필요성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할 뿐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했다. 뜯어먹자는 쪽과 부려 먹다가 내보내면 된다는 쪽이 있다. 부잣집 주인은 가난한 가족을 마음 터놓고 지낼 존재로 여기지 않았고, 노는 물이 다른 사람들로 여기며 차별했다. 영화 기생충은 공생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생명의 본질 앞에서 기생과 공생의 구분은 의미를 잃는다. 생명체는 서로에게 기생하며 공생한다. 좁게 보면 기생 같아도 넓게 보면 공생이다. 인간은 기생과 공생의 문제가 아니라 공존의 의미로 산다. 꽃이 향기와 꿀로 벌과 나비를 모여들게 하지만, 때로는 벌과 나비 대신에 원하지 않는 손님도 온다. 그래도 꽃이 아름다운 것은 꿀과 향기를 나누며, 공존의 진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생길은 공생이라는 끝없는 줄 서기다. 우리가 살면서 본의든 타의든 숱한 공생의 줄 서기를 한다. 선택의 대상이 짧은 줄이 되기도 하고 계파나 이념이 되기도 한다. 자신이 선택한 줄이 자기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면 성공이고, 자기의 뜻에 반하면 실패다. 우리 인생길에는 줄을 잘못 서서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사례도 많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줄을 서며 공생으로 이어간다.
소통을 잘하려면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상대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에 따라 삶이 풍요로워질 수도 있고 힘들어질 수도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않고는 살기 힘들고, 자기중심적으로 남을 판단하면,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소통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서로에게 힘을 준다. 닭과 오리의 소통 능력은 누가 더 좋을까 하는 질문에 오리보다 닭이 사람과 소통을 잘한다는 재미있는 대답이 있다. 오리는 알을 낳으면 그냥 방치하고 자리를 뜨는 습성을 갖고 있지만, 닭은 알을 낳으면 반드시 “꼬끼오!”하여 닭이 소통을 더 잘한다고 말한다.
마음이 아플 때면 아무 생각을 하지 말고 꽃가루를 묻히고 날아오르는 벌과 나비를 보며 서로 마음을 속삭여 보라. 당신의 아픈 마음은 벌과 나비의 부지런함에 빠져들 것이다.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날 때면 길섶에 있는 개미집을 만나 보라. 싱그러운 풀 냄새와 개미들의 부지런함과 당신의 아픔을 속삭여 보라. 그것이 소통이다. 값진 음식 앞에서도 불평하는 사람이 있고, 먹다 남은 빵 한 조각에도 감사하는 사람도 있고, 두 다리가 없는 장애우가 자신의 처지에 감사하기도 한다. 사소한 작은 일에도 짜증 내는 사람도 있지만, 큰일을 당하고도 감사하는 사람도 있다. 호흡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잠을 잘 수 있음에 감사하면 행복해진다. 우리는 실체도 없는 허깨비를 놓고 혼자서 고민한다. 모든 일이 누구의 탓도 아닌 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