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의 순간>을 읽고
나는 제너럴리스트다. 하나에 푹 빠져서 끝까지 파고드는 집요한 성격은 못 된다. 대신 알고 싶은 분야가 많다. 그래서 직업으로 프로덕트 매니저를 고른 게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PM에게 요구하는 분야가 워낙 많다는 것이다. 개발 잘알, 디자인 잘알, 고객 잘알, 데이터 잘알, 시장 잘알, 운영 잘알, 리더십 잘알.. 뭐든 잘알이 되어야 한다. 아직 2년 차인 나는 조그만 성공 경험을 하면서 도전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가진 작은 시간들로 뽀개야 할 게 산적했다는 사실이 조금 서럽다. (사실 일주일 뒤면 3년 차가 된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 나는 아직 어리고 싶다)
일상이나 취미의 분야에서도 잘알이 되고 싶다. 커피 잘알, 맛집 잘알, 운동 잘알, 책 잘알, 영화 잘알, 글쓰기 잘알.. 아무도 나에게 요구하지는 않지만, 잘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문제다. 올해엔 글쓰기 잘알이 되려고 뉴스레터를 시작했는데, 어째 1호보다 11호의 글빨이 떨어지는 것 같다. 커피 잘알이 되고 싶어서 커핑 클래스를 듣고 싶은데, 매주 시간을 쏟을 수 있을지 고민 중이다.
그러다 오늘은 <데뷔의 순간>이라는 책을 읽었다. 17명의 영화감독이 영화를 견습하던 때부터 입봉 하던 순간까지에 대해 수다 떨듯이 쓴 글이다. 읽다가 변영주 감독의 한 단락에서 싸다구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목표한 것을 얻기 위해 버려야 할 욕망이 있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지? 왜 계속 갖고 있으려고 하지? 그러면서 왜 목표를 이루기 힘들다며 좌절하고 서러워하는 걸까. 어떤 결심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내 경우에는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욕망해서는 안 될 것에 대해 미련을 갖지 말자는 거였다. 그래서 정말 힘들지 않았다. 그런 20년의 시간을 거쳐 그래도 이제는 최소한 가난하지는 않다. 레고도 사고 아이패드도 살 정도는 되니까.(웃음)"
오해하지 말자. 그는 '최고의'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욕망을 버린 것이 아니다. 그냥 영화를 '하겠다'라고 결심한 순간에 버린 것이다. 우와! 이건 찐어른이다. 그에 비해 나는 버려야 할 욕망이 뭔지 아직 구분하지 못한다. (잠? 워라밸? 취미? 건강?) 뭘 버려야 할지도 모르고, 안다고 해도 버릴 자신도 없다. 나는 인생의 제너럴리스트가 되는 게 꿈이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나도 깨달아 버렸다. 그의 말이 현실이라는 것을.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잘하는 프로덕트 매니저'라고 소개할 때, 그 말 앞에는 보통 하나, 많아도 두 개의 명사가 붙는다. 그러니까 제너럴리스트일 수밖에 없는 PM도 결국 더 특별하게 잘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특별한 영역을 가지려면 마치 스페셜리스트가 되려는 사람처럼 몰입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짧은 인생을 돌이켜 보면 내가 특정 분야에서 실력이 부쩍 성장한 것은 다 그런 경험을 거쳐서였다.
그래서 오늘의 교훈은? 요즘 나는 많은 것에 있어 잘알이 되고 싶어 시간을 잘게 쪼개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속도가 더디다. 그러면 또 속이 타고, 이 글의 맨 처음부터 고민을 다시 시작한다. 그러니까 잘알이 되고 싶은 모든 영역에서 딱 3개만 골라보자. 그다음에 내 시간을 그곳에 분배해보자. 지금은 평지를, 때로는 분지를 향해 내려가고 있어도 언젠가 퀀텀 점프할 계단을 만나게 될지도.
p.s. 원래 이 매거진은 경영이나 테크로 분류되는 책을 읽고 공부하려고 만든 건데, 이번엔 좀 다르게 써졌다. 두서없지만 오랜만에 지식을 쌓으려고 쓴 글이 아니라 편하다. 그래도 너무 속 얘기라 부끄러우니까 클릭률이 떨어질 새벽에 게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