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갖게 해 준, 보라색 꿈같았던 단편소설 한 편을 이곳에 적는다. 그때에는 단순히 시간에 쫓겨 급히 쓴 과제일 뿐이었는데도, 아낌없이 칭찬해주시는 교수님의 눈빛에 퍽 마음이 저릿했었다.
언젠가 어딘가에는, 누구에게라도 눈에 닿을 수 있는 곳에 싣고 싶었다.
사람이 드문 골목 지하 일 층에 자리한, 'NEW BAR'라는 간판이 붙은 바는 좁고 어두웠다. 붉은 조명으로 꽉 찬 바 안에는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기운마저 감돌고 있었다. 밖에 날씨가 퍽 추워서 그런지 추운 바람이 여기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두꺼운 코트 속으로 썰렁함이 파고들어왔다. 조명만큼이나 붉은 칵테일 한 잔을 눈앞에 두고선, 난 입고 있던 검은색 코트 깃을 꽁꽁 여몄다. 술을 몇 모금 들이켜 봤지만, 입 안에서 감돌기만 할 뿐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온통 검게 차려 입고, 까만색이 아닌 거라고는 눈앞에 놓인 칵테일이 전부인 채로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는 여자를, 주변에서는 이따금씩 흘깃거렸다. 바로 앞에 마주한 바텐더와도 몇 번 눈이 마주쳤으나 그는 내 술잔에 술이 아직도 가득한 것을 보고는 다른 손님 쪽으로 바삐 걸어가기를 몇 번 반복하고 있었다. 난 그렇게 오랜 시간 칵테일 한 잔을 비우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언니의 결혼식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맘에 안 드는 것투성이인 결혼식장에서 빠져나오는 것만이 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그것 외에는 딱히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이유 모를 피곤은 점점 더 내 눈꺼풀을 덮어오고 있었다. 시간은 10시를 막 맞이하기 전이었다.
바에는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붉은 조명으로 채워져있던 바 내부는 이제 사람들의 홍조어린 얼굴들로 빈틈없이 메워져가고 있었다. 내가 한숨을 푹 쉬어도, 아무 흔적 없이 공기 중에 묻혀버릴 정도로 바 안은 사람들의 소리들로 시끌벅적 했다. 남는 자리가 없어 새로 들어온 일행들이 '가자, 가자. 자리 없대.' 라고 속삭이며 되돌아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왠지 혼자 앉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난 애꿎은 술만 한 모금 들이켰다. 술에서 나는 어울리지 않는 단 맛이 혀끝에서 감돌았다.
시끄러운 내 등 뒤 좌석들을 무시한 채, 난 바텐더가 술을 제조하는 쪽으로 몸을 더 기울였다. 물론 그 쪽에 흥미는 없었다. 한참을 부동의 자세로 있다가 내 옆 한 자리 건너의 커플에게도 시선을 던져보았다. 남자는 술에 취한 척 완전히 여자에게 몸을 기울인 채, 손은 어딘가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조소를 던지며 그들을 빤히 응시했다. 두 커플은 내가 쳐다보는 것도 모를 정도로 무언가에 열중해있었다. 그 모습이 우습다고 여겨질 즈음, 갑자기 다가온 그림자가 내 시야를 막아섰다.
“저, 이것 좀 치워주시겠어요?”
고개를 돌리니, 당장이라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넥타이는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채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내 옆자리에 놓인 가방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에 검은 뿔테안경 하나만 눈에 띄는 그는 매우 지쳐 보이는 표정이었다. 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내 핸드백을 조용히 치워주었다. 남은 자리는 내 옆자리 하나가 전부인 듯 했다. 난 치워준 자리 위로 그가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잡는 걸 멍하니 지켜보았다. 괜히 무안했던지 “사람이 많네요.” 라고 툭 내뱉으며 그는 정장 마이를 바로 했다. 왜 넥타이는 그대로 두는지 의문이었다.
그도 온통 검은 정장이었다. 엉망인 넥타이만 아니라면 영화에 나오는 첩보요원같이 보이는 각이 잡힌 정장이었다. 우리 둘 다 남들이 보기에는 똑같이 우스운 꼬락서니라는 걸 아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텐더 뒤쪽으로 은은하게 보이는 창유리에 나와 내 옆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둘 다 새까만 것이 꼭 검은 매미 두 마리가 앉아있는 것 같았다. 그 남자도 그것을 느꼈는지, 곁눈질로 나를 계속 흘긋거렸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의 시선에 계속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그런 시선을 무시한 채, 난 애써 담담한 척 화장을 고치려 작은 손거울을 꺼내들었다. 풉- 하는 그의 작은 웃음소리가 날아들었다. 난 거울을 든 상태로 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내 시선과 마주치자 모른 척 메뉴판을 급히 뒤적거렸지만,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에 웃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검은 매미 두 마리. 평생 칵테일 바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을 것 같은 그는 메뉴판을 앞에 두고 눈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기만 했다. 그의 얼굴이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저런 표정으로 언니의 결혼식 한 귀퉁이에서 찌그러져 있던 걸 봤던 것도 같다. 난 그의 메뉴판을 넘겨다보았다.
“이게 맛있어요.”
옆에서 날아온 내 목소리에 그는 흠칫 놀라며 감사합니다, 라고 짧게 입을 열었다. 그 후 그가 바텐더에게 조심스럽게 주문한 건 나와 같은 붉은 칵테일이었다.
“그 쪽도 결혼식 다녀오시나 봐요. 아니면 상갓집인가.”
눈을 들어 온통 검은 그의 정장을 위 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약간의 조소가 섞여있는 내 물음에 그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뭐, 저한테는 결혼식이나 상갓집이나 거기서 거기죠.”
재밌는 말이었다. 어쩐지 결혼식장에서 본 그가 바로 이 사람인 것 같다는 확신이 들고 있었다.
"결혼은 죽음이란 말씀이신가요? “
“그런가요, 그럼 전 한 번 죽었다 살았겠군요.”
그 말을 삼 초 만에 이해하고 난 소리 내어 웃었다. ‘재밌는 분이네요.’ 란 나의 칭찬을 들은 그도 엷게 웃었다. 결혼이 죽음이라... 그렇다면 내 언니는 오늘 죽었다. 그건 현수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불쑥 앞에 나타난 바텐더가 그의 앞으로 나와 똑같은 칵테일을 툭- 하고 내려놓았다. 내 것보다 좀 더 붉게 보이기도 했다. 한 모금을 입에 조심스럽게 댄 후, 마신지 티도 안 나게 살짝 입을 적신 그가 내 쪽을 다시 쳐다보았다.
“맛있네요, 추천해주신 거.”
“다행이에요.”
“근데, 왜 혼자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주변에서 날 흘긋거리던 사람들과 바텐더가 잠시나마 궁금해 했을 질문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난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쩌면 오늘 있었던 기이한 일을 털어놓기 딱 좋은 타이밍, 딱 좋은 상대를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난 비어있는 내 칵테일 잔을 옆으로 치우고, 그의 칵테일을 한 모금 뺐어마셨다. 그의 얼굴에 놀라운 기색이 스쳤다. 날 취한 여자쯤으로 보는 표정이 드러났다.
“주인공은 못돼서요.”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 있는 나를 수수께끼를 푸는 아이처럼 보고 있는 그가 우스웠다. 그러나 그는 나의 말에 대해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는 듯, 픽 웃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가 내 말에 집중을 안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왠지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답답함에 켁 죽어버릴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언니의 결혼식이 있었어요.”
그리고 난, 그 결혼식에서 당신을 봤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당신을 언니의 결혼식에서 봤기 때문에 말을 건 것도, 또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누군가에게든 나에게 있었던 이 놀라운 일을 말해버리고 싶었다. 그에게서 ‘안 궁금한데요?’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읽혔다. 난 잠시 숨을 고르고, 바텐더에게 슬쩍 칵테일 한 잔을 더 주문했다.
“그리고 제 전 남자친구의 결혼식도 있었죠.”
재밌지 않아요? 라고 물으며 난 소리 내어 웃었다. 어떠한 웃음기도 없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그 웃음소리에 그는 나를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기만 했다. 난 그 시선을 무시하면서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
***
언니의 결혼식장에 온통 검은색으로 날 치장하면서 이렇게 소심하게 불만을 토로하는 내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난 그런 결혼식에 가기 싫다고 엄마에게 누누이 얘기했지만, 언니의 결혼식을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난 내 가족의 일에 대해서는 어찌 할 힘이 없었다. 물론 가족을 소중하게 생각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지만.
'언니가 왜 싫어요? ‘라는 그의 말에 난 그에게 형제가 있냐고 되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난, 형제가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얼버무렸다. 실은, 형제가 있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기는 하다. 언니는 말도 안 되는 결혼식을 했다. 평생 철이 들지 못하고 나와 우리 가족을 괴롭히듯 사고만 치던 언니는 결국 마지막까지 사고를 치고, 재혼인데다 아이까지 딸린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 무지막지만 결혼식이 바로 오늘이었다. 난 이런 얘기를 속으로 삼켜내었다.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숨을 뱉어낼 때마다 답답한 탄식이 쏟아졌다. 전 언니가 싫어요- 취기가 함께 쏟아져왔다. 나도 언니처럼 인생을 막 살 수 있었다면, 이라고 내뱉으며 난 뒷말을 흐렸다. 그래, 그러면 적어도 지금 같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처럼 묘한 비참함을 느끼며 술이나 입 안에 털어놓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수는, 언니의 결혼식장 바로 아래층에서 결혼식을 했다. 오늘이 현수의 결혼식임은 내 친구 미혜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난 언니의 결혼식장에서 ‘김현수’라는 이름을 발견한 순간 그게 현수라는 걸 직감했다. 어설프게도 그 직감은 적중했고, 난 구 년 동안 한 몸처럼 지냈던 그를 지나치기 힘들었다.
“전 남자친구 결혼식에는 왜 간 겁니까? 아마 내 전 부인이 결혼을 한다면 전 절대 가지 않을 겁니다.”
여자들은 다 그렇게 헤어진 전남친에게 미련이 있냐는 듯,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매가 어쩐지 단호해보였다. 난 반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글쎄요. 미련일까요.”
난 미련, 이라는 단어를 곱씹어보며 칵테일을 쭉 들이켰다. 금세 칵테일의 빈 바닥이 드러났다. 쏟아지는 취기를 느끼며, 난 잔을 내려놓은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계속 술을 들이키더니 약간 풀린 눈으로 앞을 응시했다. 술에 취한 사람이 늘 그렇듯, 술에 깨려는 듯 그는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계속 흔들었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 되었다.
“아이가 있더라구요.”
긴 침묵을 깬 내 말을 그는 듣지 못한 건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취했는지 아닌지 점점 힘이 없어지는 그의 얼굴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말간 얼굴로 나를 억지로 쳐다봐주며 입을 열었다.
“누구 아이요?”
현수의 결혼식장에 들어섰을 때, 후회라거나 자책 따위의 그런 여러 가지 감정이 버무려진 채로 뻘쭘하게 서있던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현수였다. 현수는 멋쩍게 웃으며 어떻게 왔냐고 물었고, 난 굳이 위층에서 언니의 결혼식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일 년 만에 만나는 현수는 많이 늙었고, 소년 같은 눈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런 옛 생각에 취해있거나, 대체 무슨 말을 꺼내줘야 할지 애태울 새도 없이 어떤 꼬맹이 하나가 현수의 품으로 날아든 것이다.
“현수의 와이프와 전 남편 사이 아이요.”
그 아이는 하얀 얼굴을 한 채 자신의 새 아빠에게로 뛰어들어 안겼다. 그러더니 경계어린 눈빛으로 낯선 여자를 빤히 지켜보았다. 토끼 인형을 쥐고 있는 작은 손이 불안해 보일 정도로 꼼지락거렸다. 난 아이의 손을 살짝 잡고, 안녕- 하고 인사해주었다. 아이는 끝까지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는 잠시 내가 한 말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듯했다. 그는 술을 쭉 마시더니 새로운 칵테일을 추천해달라며 메뉴판을 나에게 내밀었다. 이왕이면 도수 높은 걸로. 난 도수 높은 건 잘 모른다며 바텐더에게 그 임무를 넘겼다. 바텐더는 괜찮으시겠냐며 거듭 그에게 되물었고, 그는 풀린 눈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텐더에게 주문을 넣은 그가 다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왜 그런 여자랑 결혼을 하나 싶었던 겁니까?”
글쎄, 그는 여자들이 흔히 생각하는 ‘나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깝다.’ 의 감정 따위를 떠올리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분명 그런 건 아니었다. 난 ‘그런 여자’에게 묘한 질투심을 느낀 것도 같다.
“글쎄요. 현수도 잘난 건 하나 없어요. 직업도 제대로 없고.”
현수의 유독 까맣던 눈동자가 선명하게 그려졌다가 곧 사라졌다.
“결혼 약속을 깬 건 오히려 나였죠.”
엄마는 언니를 포기한 대신, 나에게 매달렸다. 현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건 당연했다. 나만은, 나만은 잘난 놈 만나 호강하며 살길 바랐던 엄마는 현수와 내가 사귄다는 걸 알고 나서 나에게 큰 실망을 했다며 거듭 말했다. 난 그런 엄마를 배신할 수 없었다. 난 엄마의 관심과 사랑이 늘 고팠다. 엄마가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엄마가 언니와 나를 같은 존재로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난 현수를 버릴 수 있었다. 난 그렇게 독한 사람이었다.
“그럼, 뭐가 문제에요?”
당신 표정, 지금 되게 뭐 씹은 표정이야. 라고 말하며 그가 웃었다. 그는 도수 높은 칵테일을 받아 마시며 나에게 한 모금 권했다. 난 그걸 받아 마시는 대신 똑같은 걸 두 잔 더 시켰다.
“어이없지 않아요? 행복한 척을 하더라구요. 역겨웠어요. 사랑 뭣 운운하는 게. 애 딸린 사람이랑 결혼하는 게, 뭐 그리 행복하다고 난리들인지.”
언니가 싫었고, 언니가 역겨웠다. 가족들에게는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입혀놓고 내가 보기엔 보잘 것 없는 사람과 진짜 사랑을 한다며 아무렇지 않게 결혼을 하는 게 꼴 보기 싫었다. 그런데, 내가 구 년간 사랑해왔던 남자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난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싫었다.
그는 내 말을 듣곤 표정을 있는 힘껏 찡그렸다. 도수가 높은 술 때문인지 내 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 후 연거푸 계속 술을 들이켰다. 내 앞에도 도수 높은 술이 놓아지고, 바텐더가 정말 센 것이니 조심하라며 나에게 눈을 두 번 찡긋거렸다. 나도 술을 들이켰다.
“주인공이 돼본 적 있으세요?”
내 물음에 그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동지네요-라고 말하며 난 술 한 잔을 다 비우고 그 다음 잔에 손을 댔다.
“다들 열렬한 사랑이 주제인 드라마의 주인공인 척 하잖아요. 모든 역경을 이기고 진정한 사랑을 찾는 척.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우리는 엑스트라에요. 우리 인생에서,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 우리 이름은 없다고요. 내 인생에서 주인공은, 우리 엄마, 언니, 그리고 현수 또 그의 딸아이려나요.”
난 손가락까지 펴 접어가며 그에게 설명했다. 그가 내 상황을 이해하거나, 내 감정에 공감해줄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난 주정하듯이 털어놓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너무나 답답했다. 대사 한마디 없는 엑스트라처럼 정말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 아이도 아닌 걸, 그렇게 아끼던 건 가식이 아닐까요. 정말 부인을 사랑했나 봐요. 뭐 그러니까 결혼했겠죠? 솔직히 가식은 내가 떨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요. 왜 난 현수와 헤어졌을까요? 난 아직도 현수를 사랑해요. 이것도 가식인가요. 내가 헤어지자고 해놓고 이러는 걸 보면 현수가 비웃겠죠. 지금 자기 딸아이를 안고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거예요 현수는.”
딸아이를 품에 안은 채 웃고 있는 현수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참을 주절주절거리다 고개를 드니, 그는 이젠 아예 잠들어있었다. 난 잠든 사람에 귀에 대고 앞 뒤 정리도 안 된 말들을 쏟아놓았다. 답답함은 쉬이 가시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바텐더는 날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난 술을 좀 더 시켰다.
***
술이란 녀석은 늘 주관적이다. 내가 술에 취한 것 같다고 느끼면 취한 게 된다. 난 언제든, 술에 거나하게 취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지 조금 취하고 싶은 날이면, 얼마를 마셨든 얼마정도로 취했다고 생각하면 그 정도로 취했다. 난 오늘은 머리끝까지 취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취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난 취했다. 적어도 내 옆에 처음 만나는 낯선 남자가 날 보기에는 그랬을 것이다.
온 몸에 힘이 빠졌다. 잠에 든 것은 아니었다. 내 정신은 야속하리만큼 멀쩡했지만 난 왠지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탁 위에 엎어져 있기를 한참, 순간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 게 느껴졌다. 어렴풋이 눈을 뜨니 방금 전만 해도 내 옆에서 잠들어있던 그였다. 그는 언제 깼는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뜨자 그는 나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바텐더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난 힘없이 일어나 그에게 기댔다. 일부러 체중을 그에게 다 실어주지는 않았다. 그는 나가기 전에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술 냄새가 훅 풍겨왔다.
“나갑시다. 정신 차려요.”
그는 내 등 뒤로 자신의 팔을 감싸고 나와 함께 힘겹게 발을 옮겼다. 그와 함께 발을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머리 속에서는 복잡한 생각들이 쏟아질듯 뒤얽혔다. 큰 실타래들이 자기네들끼리 한데 뭉치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내 머릿속에서 진동이 울릴 때마다 내 핸드백 속에서도 진동이 울린 것처럼 느껴졌지만, 난 그걸 무시했다. 내 핸드백은 주인을 떠난 채 그의 어깨 위에 무기력하게 걸쳐져 있었다.
아이가 없어졌다.
현수는 아이를 잃어버렸다. 언니의 결혼식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멍한 얼굴로 현수의 결혼식이 진행될 3층 화장실에서 화장이나 고치고 나오던 내 눈 앞에 보인 것은 정신없게 뛰어다니는 땀범벅이 된 현수의 얼굴이었다. 방금만 해도 있던 아이가 없어졌다고 울듯이 내게 하소연하는 현수의 얼굴은 금세 망가져 있었다.
현수는 아이를 사랑했다. 자기 자식도 아닌 아이를 그렇게나 많이 사랑했다. 난 알 수 없는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울고 있는 현수에게, 아이를 곧 찾을 거라며 위로해주면서도 난 현수의 눈물과는 다른 의미의 눈물이 차오르는 걸 꾹꾹 눌러 참아야했다. 아이가 어디 갔는지는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나는 내 앞에 있는 현수가 눈물겨웠고, 이 상황이 지나치리만큼 잔인하다고 느꼈다. 물론 현수가 아닌 나에게 있어서.
그 때를 생각하니 속에서 욕지기가 났다. 땀범벅인 현수의 얼굴과, 그 옆에서 눈물을 닦는 현수의 와이프, 그 앞에서 무기력하게 아이를 찾을 거라며 위로하는 내 얼굴을 차례대로 떠올릴 때마다 난 욕지기가 나서 걷기조차 힘들었다. 그런 나의 낌새를 눈치 챘는지 옆에서 부축하던 그가 멈춰 섰다. “토할 거 같아요?” 라는 그의 말이 내 귀를 날아들었다. 난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내 옆에서 화다닥 떨어졌다.
난 옆에 벽을 붙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검은 머리칼에 휩싸인 얼굴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결혼식장에 들어서던 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하얀 드레스와 해맑게 웃던 미소. 난 그 결혼식장에서도 똑같은 역겨움을 느꼈다. 그러나 난 그 역겨움을 토해낼 수 없었다. 난 억지로 웃어주며 언니에게 축하를 건네줘야 했다.
“토해요, 그러면 훨씬 시원할 거예요. 내가 망봐줄게요.”
“토하는 게 무서워요.”
정말이었다. 난 언니가 역겨웠다. 그 결혼식장이 역겨웠고, 아이를 찾지 못해 무릎을 꿇으며 바닥을 치고 우는 현수가 역겨웠다. 그리고 그런 걸 역겹다고 생각하는 내 자신이 역겨웠다. 진정한 사랑은 개소리라며, 도도한 척 발악하는 내 자신이 역겨웠고, 이렇게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취한 척 진상을 부리는 것도 역겨웠다. 그러나 난 쉽사리 그런 것들을 토해내지 못했다.
그는 내가 자신을 신경 쓴다고 여겼다. 등을 두드려 주는 대신, 내 어깨를 조용히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신경 쓰지 마요. 엑스트라는 다른 엑스트라를 기억하지 못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난 무언가를 게워내려 애썼다. 배 속에서 나오는 건 없었다. 계속 침만 올라와 하염없이 뱉어내야 했다. 그래도 무언가를 게워내고 싶었다. 깨끗하게 흘려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십 여 분이 걸렸다.
내가 그렇게 게워내는 동안 내 옆에 있던 그는 슬금슬금 뒤로 도망쳐갔다. 어쩌면, 나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지 않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는 원래부터 내 옆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흔적도 없이 조용히 사라져 있었다. 그가 사라진 것에 대해 어느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었고, 또 어느 한 편으로는 묘하게 서러웠다.
끝까지 아무 것도 게워내지 못한 채 고개를 들자, 주변은 유난히도 회색이었다. 운 게 아닌 데도 눈가가 충혈된 듯 아파왔다. 좌절과 절망이 날아들었다기보다는 여전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난 비틀거리며 아무도 없는 골목을 두리번거렸다. 술기운은 말끔하게 날아가 있었다. 내가 주차해놨던 차 쪽으로 걸어가면서 내 어깨에 아무렇게나 걸쳐져있는 백 속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열자마자 미혜의 문자 메시지가 화면에 크게 띄워졌다.
“현수 결혼식 왔었어? 현수가 리원이 찾아준 거 고맙다구 전해달라는데.”
그리고 엄마 전화가 열 세통. 언니 전화가 한 통. 난 배터리를 분리해 폰을 차 안쪽으로 던져 넣었다. 운전석에 앉기 전에 대리를 불러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정신은 멀쩡했지만 운전을 할 상태도 못되었다. 대리를 부를까 싶어 다시 핸드폰을 주우러 몸을 숙이다가 포기하고 운전석에 올라타 자리를 잡았다.
옆 조수석에는 인형 하나가 멍하니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때가 끼어 꼬질꼬질한 인형은 주인에게 버려진 모양새로 오도카니 앉아있기만 했다. 꼭 날 쳐다보던 아이의 표정처럼 불안한 얼굴로 내 쪽을 쳐다보는 게 난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그 인형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창 바깥으로 던져버릴까 하다 그만두었다. 그 귀여운 토끼인형은 배터리가 분리된 핸드폰이 있는 쪽으로 제 자리를 찾았다.
내가 아이를 결혼식장 밖에서 찾아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현수의 그런 모습이 싫다며 발악해도 난 현수의 행복에서 걸림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난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못된 사람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난 운전석을 최대한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긴 하루가 끝났다는 안도감에서인지,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 때문인지 차디찬 차 안에서도 잠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