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가장 부러운 사람이 누구야?'라고 묻는다면, 난 단연코 '머리 대자마자 잠드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잠자리가 바뀌든, 그다음 날 몇 시에 일어나야 하든 상관없이 '자야지.'하고 마음먹으면 30분 이내로 잠이 드는 사람들이 늘 부러웠다. 그만큼 나에게 '불면증'은 너무도 익숙하고 케케묵은 버릇 중에 하나였다. 같이 있으면 불편하고 집에 가고 싶은데, 나랑 친하다고 생각해서 계속 옆에 붙어있는 애매한 반 친구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불씨 성을 가진 그 친구는 그 정도를 달리해서 불쑥불쑥 내 삶에 끼어들었다. 특히 내 몸과 마음이 긴장상태일 때, 그 친구는 가장 악마 같은 모습을 한 채로 내 밤을 들쑤시곤 했다. 수능 시험 전날, 취업 면접 전날, 해외여행 전날, 애인에게 이별을 고하기 전날 밤... 실컷 내 귀에 대고 쓸데없는 고민들을 내내 속삭여놓고는, 아침이 되고 나면 유유히 사라져 간다. 그러고 나면 그가 떠난 자리에는 죽고 싶은 피곤함만 덕지덕지 묻어있곤 했다.
나에게는 불면증이 만성질환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잠이 잘 오는 밤이 더 낯설었다. 여행이나 출장 등으로 잠자리가 바뀌는 날이면 못 자는 것이 으레 당연한 것이었고, 잠을 잘 때 귀마개와 애착 쿠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잠에 들지 않고 눈을 감고 누워만 있어도 피로가 풀린다는 한 전문가의 말을 실낱같이 붙들고,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그다음 날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헤아려 보곤 했다. 다음날이면 졸지 않으려고 커피를 아침부터 들이부었고, 그런 날이 많아지고 익숙해지니 이제 밤을 새운 다음날도 쉽게 졸리지 않았다.
그렇게 불면을 이겨내 왔다. 아니, 참았다는 말이 더 적절할 듯하다. 그러던 와중, 최근에 그 친구가 더 포악한 모습을 한채 날뛰기 시작했다. 적어도 중요한 일이나 고민이 있을 때만 찾아오던 친구였는데, 최근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찾아왔다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일주일에 3일을 못 잤다. 하루 못 자면 그다음 날 쓰러져 자고, 또 그다음 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돈은 벌어야 하니 회사는 다녀야 해서 아침 첫 차를 타고 일찍 출근해 회사 휴게실 한 구석에서 새우처럼 선잠을 잤다. 약국에서 파는 수면유도제를 먹어도 듣지 않았다. 그 지경까지 오니 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밤만 되면 한숨과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고, 가장 센 수면제라도 먹고 잠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감정 기복이 심하신 것 같고, 수면 패턴에 문제라기보단 잠들기 전에 생각이 많아서 잠을 못 자는 것 같습니다. 우울한 이유가 있으실까요?"
규모가 작고 편안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정신과 병원, 의사 선생님은 다소 어색하면서도 심드렁한 얼굴로 내 검사지를 들고 찬찬히 읽고 계셨다. 이제는 정말 약이라도 먹고 자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예약하여 찾아온 병원이었다. 앉아만 있는데도 무릎이 덜덜 떨려왔다.
"딱히 없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 부서가 바뀌긴 했는데..."
"언제 바뀌셨는데요?"
"... 2월이요."
"2월인데, 3~4월엔 괜찮다가 최근에 잠이 안 오신다고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갸우뚱, 하는 의사 선생님의 눈빛을 읽었다. 그래, 내가 봐도 그 이유는 좀 아니다. 그럼 나도 좀 알자, 대체 난 왜 잠을 못 자는가?
500개가 넘는 문항에 '예', '아니오'로 체크한 검사지의 결과는, 허무하리만치 단순한 선 그래프로 죽죽 그어져서 나타나 있었다. 무엇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 채로, 난 그 검사지를 내 앞에 펼쳐 보여주는 의사 선생님의 손끝만을 멍하니 쳐다봤다.
"환자분은, 전반적으로 우울함이 자주 보이고,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에요. 그리고 불안감도 심하고요. 아직까지 그 불안의 원인이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래프를 보면 약간 착한 딸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네요."
맞다. 결국 그거였다. 2년 전 우울증에 빠져 허덕일 때 친구의 추천으로 찾아간 상담 선생님도 같은 얘기를 했다. 누구에게나 착한 사람이고 싶고, 숙제를 잘 해와서 칭찬받고 싶어 하는 초등학생 같다고. 그 꼬리표가 아직도 내 등 뒤에 달랑달랑 달려서 지독히도 내 잠을 방해하는 존재로 남아있던 것이었다.
속으로는 욕지거리가 나왔다. 2년 동안 그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노력했고,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도돌이표라는 좌절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이 자리에 또 이렇게 앉아, 약을 먹어야 하는 팔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날카롭게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날 나는 항우울제, 항불안제,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았고, 지금까지 꾸준히 복용해오고 있다. 약 종류와 양을 바꿔가며 나에게 맞는 약을 찾아나가고 있는 중이다. 신기하게도 약을 몇 주 먹고 난 후로는 꽤 꾸준하게 잠을 잘 자고 있다. 비슷한 시간에 잠이 오고,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진다. 양약의 신비함을 몸소 체감하고 있는 중이다.
슬슬 잠이 잘 오니, 그동안 신경 쓰지 못했던 내 글들이 떠올랐다. 종종 핸드폰에 울리는 브런치 알람. '작가님의 글을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하는 브런치 자동 알람이 내 마음 한켠에 돌처럼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오늘이 날이다. 이 돌을 치울 날이다. 컴퓨터를 켜고, 무작정 맨 윗줄에 이렇게 썼다.
'착한 딸 꼬리표 떼기'
마라톤 선수가 마지막 결승선에서 흰 테이프를 끊으며 들어오듯, 어쩌면 이 글들의 마지막에 나도 그 꼬리표를 끊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