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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석현 Jun 19. 2017

나 이런 사람이야~ 존재감 갈망의 시대

존재감에 목마른 사람들

사설] 법질서 선진국에 비해 멀다는 황 대행, 누구에게 할 소린가.  중에서. 경향신문 2017.1.11

물가가 천정부지로 뛰고 청년 실업률이 사상 최고 수준을 보이고 있지만 유일호 경제 부총리는 지난주 기획재정부 업무보고에서 “유통구조 개선, 공공요금 관리 등을 통해 서민 물가를 안정시키고, 일자리 중심 국정운영으로 역대 최고 수준 고용률을 자랑했다.”라고 박근혜 정부 지난 4년을 평가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그 난리를 친 이준식 사회부총리는 “지난 4년간 강도 높은 교육 개혁을 추진해 왔으며 교실 수업에서부터 우리 사회 전반에 이르기까지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라고 했다. 이창재 법무부 장관 직무대행은 4년간의 업적으로 통합진보당 해산과 마을 변호사 등 황 대행이 법무부 장관 시절 추진한 정책을 나열했다. [

사람마다 각자의 정치적 입장이 다를 수 있지만, 글을 읽으면서 뭔가 좀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차라리 지난 4년의 과오를 담담하게 인정하고 난 다음에 긍정적인 면을 부각했다면 오히려 객관적이고 발전적인 평가였다는 사설이 나왔을 텐데 사설의 중간만 공개했지만 어떤 식으로 마무리가 됐을지는 아주 쉽게 상상이 간다.  사실 아무리 훌륭한 정책을 펴온 국가 정부라 할 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100% 만족하는 정책이 될 수가 없다. 당연히 어떤 평가든 긍정과 부정이 섞여 있어야 합리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가 모여있는 집단에서 내놓은 평가치 고는 너무나 억지스럽지 않은가? 달콤한 라면을 먹은 것 같은 거부감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왜 이렇게 경쟁적으로 자화자찬에만 몰두해야 했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2016년 가을부터 대한민국에 어떤 일들이 밝혀졌는지 여기서 말하고 싶지 않지만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만한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자화자찬을 늘어놓는다는 발상 자체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관련 부처 간의 알 수 없는 경쟁심리가 냉정한 판단을 흐리게 한 것이 아닐까였다. 현정권 4년간의 공과를 평가하긴 해야겠는데 타 부처의 평가도 신경이 쓰인다. 다른 부처가 잘한 것 일색이면 상대적으로 우리 부처가 뒤쳐질 것 같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국민들의 부정적인 시선이 두드러질 것 같다. 그래서 일단 다른 부처보다는 뒤지지 않겠다는, 그리고 다른 부처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 ‘우리도 할 만큼 했다.’는 걸 과시하려는 심리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닐까?                               

‘어쩌다 한국인’에서 허태균은 ‘한국사람들은 유달리 ‘무시당하는 느낌’에 예민하다.’고 밝힌다.

‘상대방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상대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환경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느냐와 같은 공식적인 역할 관계보다,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의 존재감 이인정 받아야 하며, 그 존재감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내가 누군지 알아?’를 외치게 된다. 당연히 이런 외침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신감이 없거나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은 사람들에게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이 글을 읽고 보니 각 정부 부처의 평가가 왜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간다. 허태균은 이어서 ‘한국의 많은 기성세대들의 존재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자식, 누구의 상사, 누구의 친구, 누구의 부하 등과 같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이런 관계적 존재감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 상황은 너무나도 불안하고 동시에 좌절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결국 사설로만 봤을 때 각 정부 부처는 공정하고 냉정한 발전적인 반성보다는 타 부처에 뒤지기

싫은 나머지 스스로의 존재감에만 너무 몰입한 것이 아닐 까란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일단 자

신이 속한 내 집단에 애정을 더 갖는 것이 아니라, 내 집단이 다른 집단에 비해서 더 우월해야

한다는 심리가 우선이고, 개인적으로도 나 스스로 만족하는 발전보다는 타인보다 더 우월해야 한

다는 생각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역시 정치적인 견해나 판단에 따라서 나의 생각이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존재감’, 과 ‘무시’에 얼마나 예민한 지는 우리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가슴으로 느끼고 있

다.

 이재찬의 소설 ‘펀치’에서도 타인의 ‘무시’가 무서워서 본인의 ‘존재감’을 지나치게 부각하려는 군상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베드로 목장을 이끄는 손 집사 할아버지는 머리가 무척 크다. 방 변호사의 두꺼운 허리둘레 속에 기름기가 가득한 것처럼 손 집사의 큰 머리 둘레 속엔 자부심이 가득 차 있다. 6.25 전쟁 때 남으로 내려와서 거지 생활을 하다 자수성가했고 그 결과로 ‘빌딩’을 하나 가지게 됐다는 거지 같은 무용담으로 꽉 차 있다. 베드로 목장에 모인 사람들은 텅 빈 홀 중앙에 모여 앉아서 신앙고백을 하고 함께 기도를 드린다. 고백이라 하면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잘못이어야 할 텐데 사람들은 남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자기 자랑을 한다. 자랑할 차례를 기다리기 위해 듣고 싶지 않은 남의 자랑을 의무적으로 듣는다.’

 이 모임 역시 본래 갖고 있는 목적보다는 경제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그들의 결속력을 확인하고 다시 그 안에서 모임의 다른 멤버에게 뒤지지 않고 살겠다는, 그래서 언제나 나의 존재감을 강하게 부각하려는 욕망만 보일 뿐이다. 지난 한 주간 나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그 어려움을 신앙의 힘으로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한 담담한 성찰보다는 ‘나 이런 사람이야.’‘나 이런 사람이니 무시하지 마.’란 메시지 만이 결론으로 맴돌 뿐이다.

베드로 성당의 모습과 앞서 언급한 사설에서의 상황과 아주 흡사하다고 말한다면 나만의 억측일까?

 방송을 할 때도 이렇게 사람들이 예민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역 이용하면 의외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아예 처음부터 대 놓고 무시하는 투의 코멘트를 하면 오히려 주목도가 높아진다.

“태항산은 우리나라의 웬만한 산들을 타봤다는 분들의 필수 코스입니다. ‘나는 자연은 별로야. 나는 도시를 관광하는 게 훨씬 좋아.’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채널을 돌려주세요.”(여행)

“최근 5년 새 어제 그제가 최악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독한 공기를 우리가 계속 마시고 있습니다. 열 일 제쳐두고 이 독한 거 정화부터 해야죠. 시켜야죠. 응 일단 얼마나 독한지 마셔나 보자. 하시겠어요?”(공기 정화기)

“차는 장식품도 아니고 더구나 소유물도 아닙니다.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없어요. 천년만년 끼고 살면 나만 손해입니다. 어차피 버릴 거 알뜰하게 돈 안 들이고 타는 거하고 거하게 목돈 쓰고 거하게 세금까지 내는 것하고 누가 합리적일까요? 그래도 나는 돈 더 들여서 차를 사겠다 하시면 TV를 꺼버리세요.”(렌터카)

그러고 보니 ‘나 이런 사람이야~ 알아서 기어’라는 노래 가사도 있다. 무엇이 됐든 ‘당신은 지금 엄청나게 우매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를 돌려서 언급해주면 좋다. 대 놓고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돌려 말해도 ‘당신은 참으로 한심합니다.’라는 뉘앙스를 바로 알아듣는다. 우리 모두는 ‘무시’에 예민하고 ‘존재감 부각’에 항상 목마르기 때문이다. 좀 더 깊숙하게 생각하면 우리가 SNS에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도‘무시’, 와 ‘존재감’에 지나치게 예민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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