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운동과 뇌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3명 중 한 명은 아침을 습관처럼 굶고 점심때 즈음에서 첫 식사를 한다고 한다. 절대로 먹지 않는 사람의 통계가 이 정도니까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을 꼭 챙겨 먹는 사람의 비율은 그다지 높지는 않은 듯하다. 아침 식사는 보약이라는 말도 있는데 빈속으로 출근을 하거나 학교에 가니 능률이 오를 수가 없다. 그래서 아침에 하는 회의, 특히나 월요일 오전의 회의나 미팅은 평소보다 두 배 이상 힘들다. 오히려 신경만 날카로워져서 잘 되던 일도 그르치기 쉽다. 피로와 짜증 심지어 두통까지 온다.
친한 한의사 친구의 말을 빌자면 아침을 먹어야 비로소 두뇌 활동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서 집중력과 사고력을 뒷받침해준다고 한다. 밤새 영양분을 다 써버린 뇌에 재빨리 포도당을 보충해줘야 비로소 시동이 걸린다는 얘기다. 그리고 영양 보충 외에도 자연스럽게 뭔가를 씹는 저작운동을 하는데 이러한 저작은 단지 음식물을 잘게 부수어서 소화를 돕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 특히 뇌에 영향을 끼친다. 저작운동에 관여하는 여러 가지 근육이 머리뼈 부분에 연관되어 있고, 그러한 근육을 조절하는 뇌의 신경조직이 관여해 있어서 음식물을 씹을 때 머리 전체에 자극이 전달된다. 그래서 저작운동을 할 때 뇌에 공급되는 혈류 량이 증가되어 뇌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 그래서 한의원에 찾아오는 모든 부모들에게 다른 건 다 몰라도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려면 무조건 아침부터 먹이라는 얘기를 빼놓지 않는다고 한다.
뇌가 활성화된다는 얘기는 컨디션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다. 컨디션이 엉망인 상태에서 머리가 팽팽 돌아갈 리가 없다. 두뇌 활동이 왕성해지면 몸 컨디션도 좋아지고 따라서 마인드도 상당히 긍정적인 셋업이 가능하다. 모든 게 선 순환이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렇게 뭔가를 먹으면서 기분이 좋아지면 판단력이 흐려질 때가 있다.
최민석의 소설 ‘능력자’의 주인공 남루한은 이름 그대로 남루한 인생을 살고 있는 3류 소설가이다. 통장의 잔고 3320원이 전 재산인 그는 멋진 소설로 등단하는 것은 꿈에 불과하고 이른바 ‘야설’, 즉 야한 소설을 쓰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소설가 지망생일 뿐이다. 하루하루가 힘겨운 그에게 아버지 남강호가 연락을 한다. 자신의 후배 공평수를 함께 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한다. 복싱 세계 챔피언 출신인 공평수는 우여곡절의 삶을 살다가 매미로부터 초능력을 전수받아서 그 내용을 자서전으로 남기겠다는 정신 나간 계획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름 작가인 복싱 선배 남강호의 아들 남루한을 수소문 끝에 만나게 된다. 남루한이 아무리 남루한 인생을 살고 있는 무명작가이긴 하지만 매미로부터 초능력을 전수받았다는 황당한 인간의 얘기를 쓰는 건 둘째 치더라도, 아예 얘기를 듣는 것도 비웃음을 살 일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하루하루 비루한 인생으로 연명하는 남루한은 그 황당한 매미 얘기를 듣고도, 이미 첫인상부터 어딘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어 하다가 자서전을 쓰게 된다. 너무나 오랜만에 맛본 청주와 광어회의 달콤함 때문에.
“네가 좀 이해해라. 좀 많이 맞아서 그렇다.” 아버지가 말했다.
‘어디 아버지 주변에 많이 맞고 지낸 사람이 한두 명이겠는가. 아버지가 때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오기 위해 무수한 전쟁을 치르느라 많이 맞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맞다 보니 익숙해져 맞지 않으면 불안해서 자발적으로 맞았을 수도 있다. 어찌 됐든 간에 나는 그저 안면 몰수하고, 오늘 밤 설사를 할지언정 오랜만에 광어회나 실컷 먹고 집에 갈 작정이었다. 눈 앞에는 벌써 잘게 썰린 하얀 무채와 그 옆에 놓인 촉촉한 상추, 그리고 도톰하게 썰어 놓은 반투명한 광어회가 아른거렸다. 침을 꼴딱 삼키며 메추리 알을 세 개째 까먹고 있으니 종업원이 살아 팔딱거릴 정도로 윤기 반지레한 광어회를 흰 접시에 담아 들고 왔다.’
이미 광어회에 남루한 넋이 반쯤은 나가 있다. 남루 한과 공평수가 처음 만나고 인사를 나눴을 때, 남루한은 공평수의 횡설수설하는 말투에 마음의 문을 닫았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안주를 보는 순간부터 공평수는 안중에도 없다. 그리고 그 광어가 입에 들어가면서 남루한은 맥없이 무너진다..
‘뜨근하고 달콤한 청주가 목을 타고 내려가니, 뭐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바람 탓이기도 했고, 입안에서 녹는 회 탓이기도 했고, 골목의 하늘을 뒤덮고 있는 벚꽃 탓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 모든 게 삼촌이라 불리는 저 정신병자이자 전 세계 챔피언이자 매미 애호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급기 야남 루한은 삼촌이라는 사람과 왜 광어회에 반주를 하는지 까맣게 잊고 만다. 그리고는 오로지 경쟁적으로 광어를 많이 먹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는 순간 돌이키지 못할 실수를 범한다.
“네, 저도 사- 삼촌을 은인으로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광어회 두 점을 젓가락으로 집은 것은, 아까부터 그가 말하는 와중에도 한 젓가락에 광어회를 다섯 점씩 집어 우걱우걱 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잘 됐네, 우리 조카는 내가 진심으로 은인을 만났다는 걸 믿는단 말이지?”라며 그는 촉촉한 눈동자를 하고서는 또 광어회 다섯 점을 한 번에 집었다.
“네…… 네, 네, 그렇지요.”라고 말하자마자, 삼촌이라 불리는 정신병자이자, 전 세계 챔피언이자, 매미 애호가가 건배를 권했고, 나는 그 잔을 받아 쭉 들이켰고, 잔을 내려놓을 즈음에 그가 말했다. 하마터면 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됐다. 그럼 마, 네가 내 자서전 쓰는 거라. 내일부터.”
미국에서 어느 학자가 한 실험인데 실험 참가자에게 땅콩을 먹고 껌을 씹으면서 평론을 읽게 했는데 ‘암 치료법이 발견되려면 수백 년은 걸린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달 여행은 수개월 이내에 실현된다.’는 다소 가능성이 희박한 얘기에 신빙성을 느꼈다고 한다. 반면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평론을 읽는 사람은 그런 평론에 대해 강한 의심을 나타냈다고 한다. 결국 사람이 뭔가를 먹으면서 어떤 메시지를 제시받으면 메시지보다는 음식을 씹으면서 ‘맛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되고, 이것이 쾌락 중추를 자극하면서 사람을 메시지의 진위 여부와는 상관없이 ‘즐거운’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간단히 설득당하거나 속기 쉬운 상태가 될 수 있다. [i]
면접이 나 인터뷰를 할 때, 혹은 어려운 부탁을 할 때에는 상대의 배가 음식으로 차 있을 때 하는 것이 좋다. 아무래도 공복이면 자신도 모르게 신경이 예민해지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대화가 까다로워질 수가 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상대가 무언가를 씹도록 하는 것이다. 일단 입을 움직이면 혀나 목의 감촉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면서 머릿속의 긴장감이나 판단력이 억제되는 효과가 있다. 또 일단 입에 무언가가 들어가면 쾌락 중추가 맹렬히 활동하면서 반론이나 거부감이 떠오르지 않고 ‘그렇겠지. 혹은 그런가 보다.’ 하며 적당히 넘어가기가 쉽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뭐가 됐든 상대가 나에게 무언가 부탁을 할 것이라는 눈치가 보이면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입으로 가져와서는 안된다. 상대에게 설득당하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에 무너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i] 간파하는 힘. 우에키 리에 지음. 홍성민 옮김. 티즈맵. 2013. P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