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답을 알고 있어도 또 묻는 것을 좋아한다
TV홈쇼핑에서 새로운 상품을 론칭하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상품의 장점을 열거한 다음에 그 장점들 중에서 어떤 포인트가 시청자에게 잘 전달될지 쇼호스트, PD, MD가 모여서 콘셉트 회의를 한다. 그리고 콘셉트가 정해지면 또 그것을 잘 표현하기 위한 화면 연출, 구성, 코멘트 등을 기획한다. 물론 조금이라도 과장되거나 애초 기획과 다른 쪽으로 오해를 살 만한 사실을 막기 위한 사전 심의도 꼼꼼하게 체크한다. 이런 과정 등을 모두 확인하고 공유하려면 많은 품이 든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신규 방송을 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만나서 회의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TV홈쇼핑 상품이란 것이 모두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고, 거의 대부분 주변에서 익히 봐왔던 것들이기 때문에 밤을 새워 가면서 몇 박 며칠을 모여서 회의를 할 만한 상품도 거의 없다. TV홈쇼핑에서 우주선이나 비행기, 유전 같은 것을 소개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사람에 따라서, 성별에 따라서 회의하는 스타일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일단 꼼꼼하고,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가는 신중한 타입의 동료들은 같은 주제를 갖고 몇 번씩 회의를 한다. 십 수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감히 말하자면 특히 여성 동료들이 자주 만나거나 회의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가령, 여성 PD나 MD와 같이 신상품을 론칭한다고 하면, 일단 마음의 준비를 하고 회의에 임하는 편이다. 열심히 상품 관련 미팅을 하고 나서도 “이번에는 여기까지 했으니까 다음에 한 번 더 만나서 미팅을 하시죠.”라는 말이 어렵지 않게 들린다. 이때 “지금까지 얘기 많이 했으니까 해서 바로 방송으로 들어가죠. 했던 얘기 또 할 필요는 없잖아요.”라고 하면 큰 낭패를 본다. 이런 식의 말은 여성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같은 내용이라 할 지라도 확인하고 다시 확인하고, 또 공유하는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은 여성만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니까 여성이 다시 한번 더 만나서 여러 가지를 확인하고 공유하자는 말을 했을 때 거부를 하거나 그런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은 ‘나는 당신과 더 일하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릴 적, 잘난 맛에 멋모르고 까불던 시절에는 한 번 더 미팅하자는 말이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대놓고 미팅을 또 못하겠다는 말은 못 하여도 속으로는 ‘이 사람이 나를 못 믿나?’, ‘내 능력을 의심하는 걸까?’, ‘전에 했던 얘기를 또 하면서 뭐하자고 만나자고 했지?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나는 내 식대로 준비하고 처리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렇게 해 와도 별문제 없이 잘 해왔는데, 자꾸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확인하는 건 나에 대한 의심이나 도전으로 여겨질 때가 많았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존 그레이는 ‘함께 일해요’<화성 남자 금성 여자의 직장생활>이라는 책에서 재미있는,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통계를 소개했다.
회의시간이나 업무 등을 처리할 때 남녀는 같이 직장 생활을 하는 상대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남성의 72%는 여자들이 너무 많은 것을 물어본다,’
‘여성의 80%는 답을 알고 있더라도 다시 질문하는 것을 선호한다.’
내가 겪었고, 또 내가 힘들어했던 고민들을 전 세계 거의 모든 남녀가 같이 겪고 있구나 생각하니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쪽은 자꾸 반복해서 확인하고 싶어 하고, 다른 한쪽은 한 번 정해지면 그걸로 끝이라니 이건 거의 강아지하고 고양이하고 대화하는 것하고 다를 바 없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여성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무조건 ‘공감’이 키워드가 돼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분석했을 때, 여성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주 포인트는 ‘결과’보다는 ‘과정’이 주이어야 한다. 물론 남성에게는 반대로 적용된다.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주인공이 한국에서 마이너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거부하고, 가족과 남자 친구도 뒤로 한 채 호주로 이민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인데, 그 과정에서 나오는 에피소드도 재미있지만, 그 속에 여성에게 남성이 어떤 존재이어야 한다는 주옥같은 내용이 많이 나온다. 우여곡절 끝에 호주로 취업 이민을 간 나(키에나)는 ‘댄’이라는 코카 시 언 남자 친구를 사귄다.
‘왜, 서양 애들 특유의 과장법. 그런데 좀 그 칭찬이 핀트가 안 맞아.
“키에나, 넌 참 아름다워, 정말 매력적인 ‘골드 스킨’을 갖고 있어. 어느 날엔 그렇게 말하더라. 내가 걔보다 피부가 더 흰데. 백인 중에도 나처럼 피부가 흰 애는 거의 없다고. 내가 발을 꼬고 앉아 있을 땐 이렇게 말했어.
“넌 다리가 짧아서 귀여워.”
니미 썅, 그게 칭찬이냐?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너무 그런 말을 자주 하니까 나도 슬슬 이건 아니다 싶었지, 그날 하루 내가 겪을 일을 어렵게 영작해서 이야기해 주잖아? 그래도 “아, 너는 오늘 이런 기분을 느꼈겠구나.”라고 받아주는 경우가 없어. 대신 내 머리칼을 만지면서 어쩌면 머리가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는지 궁금해하고, 피부가 어쩌면 이렇게 윤이 나느나며 칭찬을 하는 거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여성에게는 100% 적용되는 건 아니다. 대신 100% 적용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공감’과 ‘과정’이다. 특히 과정을 함께 공유하고 점검하는 건 여성에게 상당히 민감한 문제다.
묻고 또 묻고, 다시 확인하는 여성의 대화 방식은 우선 모두가 합의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일차의 의미가 있고, 그리고 두 번째는 관심의 표현이다. 묻고, 또 확인하는 것 모두 관심이라는 의미다. ‘내가 이 일에 이만큼 관심이 많다.’ 혹은 ‘내가 당신이 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도와주고 싶다.’ 이런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같은 내용인데도 “어떨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라는 말을 거듭 듣는다면, 이런 말은 사실 여자 입장에서는 ‘나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나를 도와줘.’라는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남자의 대응은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그리고 세심하게 일하는 여성의 모습을 언급하면 된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니까. 그래서 ‘역시 일하는 스타일이 정말 세심하시군요.’, ‘여기까지 재차 확인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진지하게 무엇이든 임하시네요.’, ‘와 일 할 때 모습이 정말 정열적이에요. 이렇게까지 차근차근 다시 짚는 모습이 참 좋아 보이네요.’ 라고 표현한다면 여성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진짜 나의 모습을 알아보는구나.’라고 뿌듯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위소설에서 과장법이 심한 서양 남자 댄이 ‘나’의 고민에 대해서 다른 식으로 과장을 했다면 주인공 ‘나’는 정말 행복하게 호주 이민 생활을 누리지 않았을까? 나의 참모습을 알아봐 주는 남자가 곁에 있으니 말이다.
“너는 정말 세심하고 여린 성격이구나. 내가 미처 몰랐네. 그래서 너는 정말 아름다워.”
“너처럼 섬세한 여성이 나는 참 좋아. 물론 기분은 언짢았겠지만. 그래도 이런 일도 묵묵히 견디는 네가 참 예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