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하고 싶은 말 끌어내기 + 힘 실어주기
당신은 인기 프로야구 구단의 투수 코치이다. 우리 팀의 에이스가 경기 초반부터 연속 안타를 하고 만다. 계속되는 위기 상황이다. 만약 당신이라면 투수에게 어떤 조언을 해야 투수가 안정을 찾을 것인가? 실제로 이런 상황을 겪었던 어느 구단 의전 투수 코치의 말을 들어보자.
‘1회 2사 만루 상황이었고2 아웃이기 때문에 이재원만 넘으면 어려운 위기를 실점 없이 끝낼 수 있었다. 1회를 잘 마무리 지으면 다음 이닝도 쉽게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이재원에게 초구에 속구 하나를 가운데로 던지면서 적시타를 허용했다. 그 뒤 나주환까지 연속 적시타를 맞으면서 1이닝에만 4 실점을 하고 말았다.’[i]
이 상황은 모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하는 <손혁의 시행착오> ‘투수코치는 마운드에서 무슨 말을 할까’에서 소개됐던 이야기이다. 선발투수가 초반부터 안타를 맞고, 더구나 속구가 결정적으로 안타가 되면서 속절없이 4점이나 내줬으니 투수코치가 투수에게 당부할 수 있는 얘기는 거의 정해져 있다. 속구가 안타를 맞으니 당연히 변화구로 승부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실제 상황에서 코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난 이재원 타석을 앞두고 마운드에 올라가 현희에게 “초구는 슬라이더로 가자”라고 3번 이상 당부했다. 그리고 포수 (김) 재현이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현희는 초구에 속구를 던져서 안타를 맞고 실점하며 결국 패전투수가 됐다.’
코치 입장에서는 어안이 벙벙할 상황이 됐다. 당연히 경기가 끝나고 투수와 포수에게 “왜 초구에 슬라이더(변화구)를던지지 않았냐?”라고 물었더니 투수는 “마운드 위에서 코치님이 뭐라고 했어요?”라고 반문하고 포수는 “슬라이더(변화구) 사인에 투수가 고개를 흔들어서 바로 (속구로) 바꾸어줬다.”고했다고 한다. 이 일 이후로 그 투수코치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다.‘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투수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 옳다.’ 생각지도 않게 초반에 4 실점이나 한 투수는 지금 경황이 없다. 냉정하게 상황 판단을 할 멘틀이 될 수 없다. 실제로 투수는 코치가 한 말을 기억도 못 하고 있었다. 이럴 때 무조건 코치가 구종을 선택해서 강요하기보다는 투수에게 던지고 싶은 구종을 물어본 뒤 그 공에 대해 서자 신감을 실어주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판단인데 야구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두고두고 염두해야 할 필요가 있다. 흔히들 직장이나 학교에서는 [ii]‘상사나 선배가 개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라.’는 농담 섞인 말을 자주 하거나 듣는다. 하지만 진실은 개떡같이 얘기하면 누구나 개똥같이 알아듣는다. 사람은 듣고 싶은 말만 듣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전에 하고 싶은 말만 본능적으로 떠올린다. 그러니 찰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못 알아들을 확률이 높다. 결국 ‘개떡같이 말해도 제대로 알아들어라’는 장난 삼아서라도 할 필요가 없다. 굳이 상대 귀에 들어가지도 않을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개인적으로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갓 골프 프로 자격증(KPGA)을 획득한 선수들을 모아서 매치플레이를 하는 ‘루키 챔피언십’ 대회 캐스터를 수년간 진행하고 있는데, 몇 해 전 경기 중 고등학교 2학년 학생과 경기 중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도 카메라 앞에서는 제대로 입도 못 뗀다. 더구나 이 친구는 상대 선수에게 큰 스코어 차로 뒤지고 있었고, 이 상태에서 몇 홀만 지나면 첫 경기에서 맥없이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또 안타깝게도 산만한 덩치의 이 선수는 성격이 내성적이다. 담당 피디가 경기 중에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 이런저런 인터뷰를 하려고 했지만 이 친구는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말을 단 한마디도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렇게 저렇게 말해라’식으로 내용을 알려줘도 못했다. 피디는 선수가 말을 못 하니 안절부절못하고, 선수는 선수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는 난감한 상황. 인터뷰를 못하면 방송 분량이 안 나온다. 결국 피디가 나에게 구원 요청을 했다. “아나운서님 김 00 선수가 말을 하나도 못 하여요. 큰일 났어요. 어떻게 좀 해 보세요.”
일단 웃는 낯으로 한마디 했다. “오늘 긴장을 많이 했구나. 뭐 컨디션이 안 좋은 거니?” “아니요.”
“잘 안 되는 샷은 없었고?”, “네……”. “특별히 아쉽거나 기억나는 홀은 있었어?” “없어요.” 여전히 단답형이다. 그래서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다운된 이 친구의 멘틀부터 살리는 방법을 썼다.
“너 너희 반에서 수학 잘 해?” “아니요. 못해요.”
“그럼 영어는 잘 해?” “아니요.”
“그럼 골프는 너희 반에서 너 몇 등 해?” “(씩 웃으면서) 제가 제일 잘해요.”
“너 전교에서도 네가 골프 1등 아니야?” “네 맞아요.”
“그래~ 지금 너는 네가 학교에서 제일 잘하는 골프 얘기하는 거야. 수학이나 영어 얘기할 때 우물쭈물하는 건 이해되지만 네가 제일 잘 하는 거 물어보는 건데 최소한 너네 학교 학생들 중에서는 골프 얘기를 제일 잘해야지. 안 그래?” “아…… 그러네요.”
그제야 이 친구가 표정이 밝아지면서 말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고 인터뷰도 방송 분량이 넘칠 정도로 아주 수월하게 잘 마칠 수 있었다. 결국 이 선수는 아쉽게도 예선 탈락을 하고 말았는데 정작 놀란 건 담당 PD였다.
“아니 나랑 인터뷰할 때는 단 한마디도 말을 못 하더니 어떻게 된 거예요?”
“응…… 영업 비밀이야.” 골프라는 운동은 특히나 멘틀 스포츠라서 기분에 따라 경기력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인터뷰도 마찬가지. 선수의 좋은 샷을 기억해 뒀다가 그 상황을 위주로 대화를 이끌어 가면 선수는 신이 나서 이야기한다. 앞서 투수 코치의 깨달음처럼 상대가 하고 싶은 얘기를 이끌어 내면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이 잘 하거나 잘 하고 있는 것은 늘 자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결국 야구나 골프나 어디서나 상대가 하고 싶은 말을 끌어내고 거기에 힘을 실어주거나 맞장구를 쳐 주면 상대는 나에게 고마워한다. 그리고 멋지고 능력 있는 선배, 상사, 동료로 인정해 준다.
이 홍의 소설 ‘걸프렌즈’에서 주인공 한 송이는 직장 동료 유진호 대리와 소위 밀당을 하는 관계다. 소설에선 그와 사귀기 시작한 결정적인 첫 만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말해봐요. 뭐 먹고 싶은 거 있는지…… 어서 먹으러 가요.”
“………. 추어탕. 어때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추어탕?” 그가 반문하는 것을 보니 적잖이 놀란 눈치다. 첫 데이트에 추어탕이라니. 놀란만 하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간 말이거늘. 사실 지금은 푸석푸석한 고기나 피자 따위가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네. 이렇게 목이 칼칼한. 감기 기운이 있을 땐 추어탕이 제격이거든요.”
“나 추어탕 진짜 좋아하는데!”그가 반색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고, 제일 자주 먹는 음식이에요. 우리 한 그릇 때리러 가죠!”
그는 길을 가다가 몹시 반가운 동창이라도 만난 것처럼 말한다. 그 말은 내게도 ‘말뚝 박기’하던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을 자아내게 한다. 교복 치마 아래로 체육복을 껴 입고 ‘말뚝 박기’를 함께했던 친구처럼 그가 허물없이 느껴진다…… 추어탕 한 그릇 이전 혀 다른 성격의 남자와 여자를 친밀감 속으로 쑥 밀어 넣는다. 그래, 어쩌면 추어탕은 친밀감의 알리바이다.
둘이 사귀게 된 건 ‘추어탕’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유진호의 대화기술이다. 몰론 남성의 호감이 깔린 상태의 대화이긴 하지만 호감만 있다고 다 저런 방식. 즉 ‘상대가 하고 싶은 말 끌어내기 + 힘 실어주기’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아닌 듯하다. 특히나 사람은 성공한 경험이 많을수록, 알고 있는 지식이 많을수록, 나이가 상대보다 많을수록 자신의 생각을 거스르기는 어려워진다. 그러면서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 돼!”는 참 쉽게,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하지만, 이런 대화는 언젠가는 외면이라는 참사를 부른다. 그런데도 “이럴 때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라고 하거나 “네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해 봐. 나는 무조건 찬성이다.”라고 하기는 참 어렵다. ‘개떡같이 말해도 누구나 찰떡같이 알아듣겠지.’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본인의 얘기만을 늘어놓으려 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i] <손혁의 시행착오> 코치는 마운드에서 무슨 말을 할까? 손혁. 각색 고유라. 네이버 스포츠. 2016.12.30
[ii] [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 [출처: 중앙일보] 2017.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