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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석현 Jun 26. 2017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확증편향

생각하기 싫어 서둘러 결정하는 뇌의 오류.

영화 ‘타짜’에서 악덕 사채업자이자 노름꾼으로 나오는 곽철용(김응수)이 고니(조승우)에게 하는 대사 중 이런 말이 있다. “내가 달건이(건달) 생활을 열일곱에 시작했다. 그 나이 때 달건이 시작한 놈들이 100명이다 치면은, 지금 나만큼 사는 놈은 나 혼자 뿐이야......!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잘난 놈 제치고, 못난 놈 보내고...... 안경 재비같이 배신하는 새끼들...... 다 죽였다!” 

지금은 안경 쓴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이제는 없어진 말이지만 예전에는 택시 기사들이 첫 손님으로 안경 쓴 사람은 절대로 안 태운다는 얘기가 있었다. 안경 쓴 사람을 태우면 그 날 하루 종일 재수가 없다나 뭐라나…… 안경 쓴 사람들이 무슨 죄라고…… 눈이 나빠 거추장스럽게 얼굴에 걸친 안경도 불편한데 억울한 오해까지 받아야 했다. 비겁하거나 비열한 사람들 모두가 안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아는데도 왜 이런 말이 생기게 될까? 더구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그리고 정확하게 검증되지 않은 편견과 아집들은 생각보다도 더 많이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과 생각과 일치하거나 비슷한 의견에는 적극적으로 수용, 동조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의 믿음과 배치되는 것들이 있으면 냉정하게 배척하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신념은 성공을 많이 거둔 사람일수록, 알고 있는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 증세가 더 심하다. 이런 심리 상태를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하는데, 잠깐 언급한 대로 자신의 신념과 일치해서 확신할 수 있는 증거는 수용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반증하거나 부정하는 증거에 대해서는 배척하고 무시하는 경향이다. [i]한 번 확증편향에 빠지기 시작하면 그 수렁에서 벗어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왜냐하면 새로운 정보가 자기 논리와 선입관에 맞지 않는다면 그 정보는 틀린 정보로 자동으로 인식하고 본인 신념에 맞는 정보만을 계속해서 선택하면서 그 신념은 점점 더 굳어진다. 또 자기 합리화를 통해서 모든 정보를 본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을 하고 결국 편견을 강화하게 된다. 아주 쉬운 예로 ‘첫인상’에도 확증편향이 그대로 나타난다. 누구나 그렇듯이 첫인상으로 후한 점수를 받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처음엔 호감도가 낮은 첫인상이다 할지라도 이후에 노력을 통해서 호감도를 점점 높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인간에게는 이론적으로 만가 능한 얘기일 뿐이다. 일단 첫 대면에서 무언가 부정적인 정보로 인해서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그이 후가 더더욱 힘들고 고되다. 만약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 때문에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후에 아무리 옷을 단정하고 깨끗하게 입어도 ‘단정하지 못하다’는수렁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몸 전체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그 사람의 단점만을 찾으려고 자동적으로 뇌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 도마찬 가지이다. 한 번 첫인상으로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좀처럼 그 점수가 떨어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예쁜 사람은 그다음부터는 뭘 해도 예쁘게 보인다. 그래서‘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처럼 잔인한 말도 없고, 그냥 막연하게 ‘느낌이 안 좋다.’는말도 아주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 무시무시한 말이다. 그 좋지 않은 느낌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확증 편향의 늪에 빠지기 때문이다. 

문유석의 소설 ‘미스함부라비’에서도 ‘확증편향’이 사람을 얼마나 위험하게 만드는지 잘 묘사돼 있다. 현직 판사인 문유석은 재판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소설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전관예우’에 대한사람들의 철석같은 믿음, 다시 말해 ‘전관예우 확증편향’도 빠지지 않는다. 다음은 법원 구내식당에서 판사인 임바른과 정보왕이 나누는 대화다. 

“그나저나, 밖에서는 왜 아직도 전관 효험이 있다고 확신하는 걸까요? 큰돈을 써가며.”

“녹용이나 해구신은 현대 의학으로 효험이 입증돼서 비싼 거겠어? 어차피 재판 결론에 무엇이 영향을 미쳤는지는 데이터로 검증이 되는 게 아니잖아. 자기가 질 만해서 졌다고 납득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다른 이유가 작용했다고 믿는 것이 훨씬 받아들이기 쉽겠지. 학원이 좋아서 명문대에 가는 건지 원래 갈 만한 얘들이라서 가는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밑져야 본전이니 비싸도 유명학원에 가려는 심리 같은 거 아닐까? 게다가 사건이 몰리는 전관 변호사는 승소 가능성이 높은 될 만한 사건을 골라서 맡을 수 있으니 성공률이 높은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사건이 또 몰리는 나름의 선 순환이 생기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마지막 문장이 가장 합리적이지 싶다. 법원에서 높은 직책을 맡았던 전관 변호사가 질만한 소송을 맡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다음은 거액을 쓰고도 소송 에진 사람과 소송 중개인과의 대화이다. 

<서초동 대지 다방>

“큰소리치더니 결국 졌잖아! 당신들 모두 사기로 고발할 거야!”

“사장님, 이거 놓고 이성적으로 좀 얘기합시다.”

“뭐야 인마!”

“막말하지 마세요! 자자. 좀 차분히 앉아서 얘기를 들어봐요. 우리는 최선을 다했지만, 상대방은 대기업 아닙니까. 우리나라 5대 로펌을 썼잖아요. 그로 펌에는 바로 여기 법원장 출신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친분 있는 변호사 라인으로 밀었는데, 그쪽은 위 라인으로 조진 거지. 사장님이 돈만 더 썼으면 우리도 법원장 출신을 추가 선임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안 하셨잖아요. 이건 정정당당한 싸움에서 무기 부족으로 진 거라고요.”

“………”

“이 판 사판인데 달러 빚을 내서라도 항소심에서는 더 높은 고위직 출신으로 선임하시죠. 법조계 인맥은 다 내 손바닥 안에 있다니까.” 

 중개인의 말 중에 ‘정정당당한 싸움에서 무기 부족으로 진 거다.’는말이 재미있다. 법원에서 정정당당한 싸움은 법리를 따져서 잘잘못을 가리는 게 재판에서의 정정당당한 싸움 아닌가? 그런데 중개인에게 정정당당한 싸움은 ‘보다 높은 직책의 전관 변호사’라는 무기 준비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그 말에 노발대발하던 사람은 금세 아무 말 못 하고 풀이 죽고 만다. ‘전관예우’라는 중개인의 확증편향에 무릎을 꿇은 셈이다. 제삼자 입장에서 본다면야 말도 안 되는 실없는 얘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정작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면 꼼짝없이 확증 편향의 포로가 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앞서 임바른 판사의 말처럼 정확한 데이터가 없이 애매모호하고 복잡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확증편향은 더 위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껏 믿고 있던 어떤 신념에 흠이 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또 반대의 정보나 신념에 관심을 갖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피곤한 뇌는 바로바로 자동적으로 답이 나오는 것만 선호한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수십 년 동안 벌어지고 있는 해묵은 이념 갈등 또한 확증편향의 증거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무엇을 하든 상대방은 ‘수구 보수’의 작태이고, 또한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이쪽에 대해 무엇이든 ‘빨갱이’로 치부해버린다.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무조건 나는 옳고 너는 잘못됐다.’는 철저한 신념이 빚어낸 비극이 아닐까. 이렇게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독하게자리잡을 수 있는 확증편향을 단시간에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그저 ‘틀리다’가 아닌 ‘다르다’를 늘 염두해야 한다. 그리고 머리는 좀 피곤하겠지만 항상 ‘다양성’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을 지녀야만 편견과 아집을 멀리할 수 있고 결국에는 충실하고 원활한 소통에도 결정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여러 세계를 만날 수 있고, 또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소설 읽기가 원활한 소통력을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i] 확증적 편향(confirmation bias) <시사 상식사전. 박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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