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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석현 Jun 29. 2017

거슬리는 말 받아치기

무의미한 말에 상처받는 사람들

‘나이를 먹는 게 이런 거구나’를아주 절실하게 느낄 때가 있다. 잘 만 보이던 서류나 책의 글자가 흐릿해져서 점점 멀리 놓고 봐야 할 때이다. 누구에게 말도 못 하겠고 혼자서 ‘내가 이렇게 늙었구나.’ 생각하게 되면 온갖 시름이 다 생긴다. 같은 몸을 45년 이상 쓰다 보면 여기저기서 고장이 나는 것은 당연할 텐데 생각은 늘 청춘이니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성격이 소심해지고 의욕도 사라지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강력하게 고개를 드는 욕망이 있으니 그게 바로 ‘인정 욕구’이다.  아직도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듣고 싶고, 청년 못지않은 체력을 과시하고 싶고, 또 여전히 능력 있는 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은 욕구이다. 하지만 현실은 내 욕망과는 반대로 간다. 그래서 더더욱 주위 사람들의 무심한 한마디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거기에 격하게 반응을 하다 보 면주 변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점점 그 사람을 피하기만 한다. 그러면서 외톨이가 되고, 이런 변화를 참기 힘든 사람은 여기저기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나, 아니면 지나치게 간섭을 하거나, 심지어 ‘나 어릴 때는 말이야~’까지 버릇처럼 한다. 본인 얘기만 나오면 점점 말이 많아지는 증상. 그렇다면 결과는? 뻔하다. 어디를 가나 ‘꼰대’ 소리를 듣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봐야 하는데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보니 언제나 반대로만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주변 사람들의 무심한 한 마디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는 하지만, 원래 예민한 성격인 사람들 도주 변에 차고 넘친다. 쇼 호스트와 아나운서를 직업으로 하다 보니 동료 중에 여성들이 상당히 많다. 이들과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을 조심하라.’이다. 아무것도 아닌 호의에 반색을 하며 좋아하기는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에 싸늘하게 변하기도 한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 게 아니라 말 한마디에 빚이 사채 이자보다도 더 많이 늘어나는 상황이 된다. 

 아무튼 살다 보면 주변의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쓰리게 박힐 때가 많다. 

“사귀는 사람하고는 언제 결혼해?”

“취직은 했니?”

“너 언제까지 솔로 할래? 소개팅은 하니?”

“애는 공부 잘하니? 몇 등 해?”

 이런 유의 말을 듣게 되면 그 말을 한 사람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가 보기 싫다고 단칼에 관계를 끊을 수도 없다. 언젠가 그 사람에게 생각지도 않을 상처를 받을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그렇다고 정색을 하고 “나에게 그런 말 하지 마!”라고 말하기도 그렇다. 

언젠가 사무실에서 방송을 앞두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집중을 했는지 아니면 만족할만한 검색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지 상당히 오랜 시간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나 보다. 그때 옆을 지나치던 동료 쇼 호스트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 그 친구의 한마디. “형 술 먹었어? 눈이 왜 그렇게 빨개?”

순간 나도 모르게 당황했다. 물론 대답은 ‘아니.’라고 짧게 대답했지만 그 이후 내 머릿속은 점점 이상한 쪽으로 발전하고 또 증폭되어 갔다. 

‘저 인간이 사무실에서 사람들도 많은데 나를 망신 주려고 저러나? 술을 먹었나니?’

‘내가 맨날 술만 먹는 인간으로 밖에 안 보이나?’

‘내가 언제고 저 자식 버릇을 고쳐놔야지 정말. 항상 지만 우선이고 주위 사람들은 다 지 아래로 본단 말이야.’

 한없이 유치하지만 그때는 나름 정말 심각했었다. 그리고 그 이후 한동안은 그 동료를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정색을 하고 바라보았을 것이다. 

 결국이 모든 것은 나의 허망한 ‘관심받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김두식의 ‘욕망해도 괜찮아.’를 통해서 깨닫게 됐다. 

 ‘아무 도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이상하게도 제 마음에 깊은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너무 민감할 필요가 없다는 진리를 만난 거죠.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차가운 진실입니다. 그걸 알면 세상이 스산하게 느껴지죠. 그런데 그 진실이 주는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으니까요.’

 사무실에서 나와 마주친 동료는 그저 나와 의미 있는 대화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눈이 마주치지 않았으면 아무 말도 안 하고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고, 그 상황에서는 아무 말이라도 해야 말없이 지나치는 것보다는 덜 어색하다. 그래서 눈이 충혈됐길래 ‘술 먹었어?’라고 편하게 얘기한 것뿐이었다. 물론 ‘어? 눈이 충혈됐네? 무슨 일 있어?’라고 물어봤다면 좋았을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나의 성격이 예민한 것도 아니고, 신중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언제나 스마트하고 남다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허망한 욕구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기 이전에 우선 본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우선이다. 나의 마음이 편안해야 무슨 말을 해도 자연스럽게 나오고 어떤 말이든 독창적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 주세요.’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것도 유치하고 부질없는 짓이다. 왜?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 대해서 그다지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모두들 본인만 생각하고 본인 위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한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다. 세상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데 그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래도 나는 주변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거슬린다고 그래서 그들에게 한마디라도 펀치를 먹이고 싶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럴 때는 역으로 같은 질문을 하면 상대는 머쓱하게 된다. 만약“술 먹었어?”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넌 술 먹었어?” 같은 내용으로 질문을 하라. 당연히 “난 안 먹었는데.”라고할 것이다. 그때 “나도 안 먹었어.”라고 하면 끝이다. 

“사귀는 사람하고는 언제 결혼해?”vs. “삼촌은 숙모랑 몇 년 사귀었어요?”

“취직은 했니?”  vs.  “언제 취직하셨죠?”

“너 언제까지 솔로 할래? 소개팅 은하니?”  vs. “소개팅 몇 번하셨는데요?”

“애는 공부 잘하니? 몇 등 해?”  vs. “너희 애는 몇 등 하는데?”

 이렇게 대응하게 되면 곧 상대는 나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의 입장에서는 통쾌하고 시원한 한방이 되겠지만 그 이후의 대화와 두 사람의 관계가 어색하게 된다. 나의 한마디에 오히려 상대가 깊은 내상을 받을 수도 있다. 별 것 아닌 대화를 별스런 대화로 만들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답이 중요하지 않은 질문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책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제시하고 있다. ‘결국 시간 때우기 용 질문들입니다. 무의미한 질문인만큼 그저 최대한 무의미하게 답하면 그만입니다. 어차피 상대방이 나의 답변을 기억하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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