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23 Avril 2015
사크레쾨르 대성당(Basilique du Sacré-Cœur)에 도착했다. 이미 여행 책자에서 나온 동선을 벗어나 걸은 지 오래, 그래서 정면인 아닌 옆모습의 대성당을 먼저 마주하게 되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정면을 보려고 다가가는데, 사람들이 테르트르 광장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많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봤더니, 막쉐(Marché)가 들어서 있는 모양이었다. 꼬릿한 냄새가 나서 보니 저긴 치즈 가게, 달달한 냄새가 나서 보니 저긴 과일 가게, 고소한 냄새가 나서 보니 저긴 빵 가게. 커피도, 술도 팔고 간단히 먹을 것도 파는 가게들이 사크레쾨르 대성당 옆에서 작은 천막을 쳐 놓고 사람들을 불러 세우고 있었다. 나도 무언가 하나 사 먹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르 뿔보에서 배를 가득 채우고 난 뒤였으므로 구경만 했다.
무언가를 믿는 마음이 모여있는 장소들은 그게 어떤 곳이든 비슷한 분위기를 품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을 따라 들어간 사크레쾨르 대성당 안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낮에 들어갔던 성당처럼 고요하고 경건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성당을 구경했고, 나오기 전에는 잠시 멈춰 서서 작은 기도를 하기도 했다. 낮에 한 기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왠지 이곳에서도 기도를 해야 할 것 같았고 또 하고 싶었다. 나는 나에게 주는 1년의 유예 시간을 다른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잘 보내고 싶었다.
성당을 나오니 파리 시내가 한눈에 모두 들어오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내가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낼, 나의 파리. 나는 어쩌면 이때 비로소 파리에서 살아갈 나를 실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몇 번 봤다고 조금 익숙해진 에펠탑 때문이었는지, 성당에서 올린 기도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꿈 같은 기분과 들뜬 여행자의 모습에서 벗어나 비로소 ‘내가 살아갈 곳’이라고 어렴풋이나마 인지했던 것 같다.
이 순간, 이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해 파리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4월이라 아직 바람이 쌀쌀했지만, 햇빛이 강렬해 생각보다 꽤 더웠던 날, 나는 이렇게까지 그곳을 좋아하게 될 줄 모르고, 그리워하게 될 줄 모르고, 그때의 나를 그곳에 한 장 남겨두었다.
오래 걸었는지, 다리가 아파져 왔다. 나는 몽마르트 언덕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겨우내 춥고 우울해서 그런지 파리에 봄이 오면, 그리고 조금이라도 날씨가 따뜻해지면, 사람들은 모두 밖에 나가 잔디밭에도 벤치에도 계단에도 그냥 땅바닥에도 제멋대로 앉아 일광욕을 즐긴다. 이날은 정말 바야흐로 봄이었다. 몽마르트 언덕에는 나처럼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과 일광욕을 즐기러 나온 파리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도 그들 사이로 가 앉으려는데, 나이 드신 두 분이 서로를 꼭 붙들고 언덕을 내려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찌나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서로를 꼭 붙들고 계시던지. 당신들도 참 봄이겠다 싶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혼자인 사람보단 누군가와 함께인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외로워졌는지도 모르겠다. 다음번엔 누군가와 꼭 같이 오고 싶다고, 그런 마음을 먹었더랬다. 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나의 긴 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을 때. 혼자여도 충분히 좋다는 걸 그땐 모르고.
아직 여행 책자에 나온 곳을 반도 보지 못했는데, 어느새 몽마르트 언덕 밑까지 내려와 버린 나는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언덕을 올랐다. 에비앙조차 특별하게 느껴지던 때, 몽마르트다운 카페 라 메종 로즈 (La Maison Rose)도 지나고, 몽마르트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그래서 작지만 소중한 파리 유일의 포도밭도 지나고, 에디트 삐아프(Edith Piaf)가 노래를 불렀던 오 라팽 아질(Au Lapin Agille)도 지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랭루즈를 보러 가는 길. 영화 <아멜리에>에서 봤던 카페 레 되 물랭(Café des 2 Mouinst)을 발견했다. 원래는 그냥 사진만 한 장 찍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카페에 들어가고 말았다.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주고, 나는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을 시켰다. 카페에서는 영화 <아멜리에>의 분위기가 물씬 났다. 십 년전 쯤 봤던 영화라 내용은 가물가물했지만, 영화 속에서 아멜리에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리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몽마르트가 얼마나 멋진 곳이었는지는 기억난다. 그런 분위기를 잊지 않고 있는 카페에서 라이브 음악을 들으며, 생맥주를 마시는 일은 완벽하게 시작한 하루의 완벽한 끝이었다.
단 한 가지, 아쉬웠던 건 물랭루즈(Moulin Rouge). 생각보다 작은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주변 건물들과 바로 앞에 있던 도로,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 물랭루즈 안은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지만, 몽마르트에서 유명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가보고 싶었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온종일 걸어 다니며 몽마르트를 구경하고. 그러다 몽마르트에 계속 반하고. 그래서 물랭루즈가 몽마르트와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다 해도 별 상관없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