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26 Avril 2015
파리에 도착하고 나서 처음으로 비가 온 날이었다. 파리 사람들은 비가 와도 정말 우산을 쓰지 않을까. 궁금해 나온 거리에서 누군가는 우산을 썼고, 또 누군가는 쓰지 않았다.
집 계약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혼자 마레에 갔다. 마레를 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고파 간판에 marcovaldo 라고 적힌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에 들어가니, 다들 둘둘 인데 나만 혼자인 것 같아 조금 뻘쭘해졌다. 그래도 용기 내 잠봉(햄)과 모짜렐라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 그리고 카푸치노 한 잔을 주문하고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카푸치노와 설탕이 먼저 나오고, 잠시 후 샌드위치가 나왔다. 그리고 나는 이내 후회했다. 에펠탑 앞에서 바게트 샌드위치의 딱딱함을 느껴 놓고, 나는 왜 또 바게트 샌드위치를 시켰을까. 같이 나온 나이프로 빵을 잘라 보았지만, 잘 잘리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먹으라는 건지…. 혼자인 것도 뻘쭘한데, 빵까지 내 맘대로 되지 않다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짜증도 나는 이 상황이 웃기고 슬펐다. 혼자 바게트와 씨름을 하고 있는데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카톡이 왔다.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나는 이 딱딱하고 먹기 힘든 샌드위치의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친구들은 맛있어 보이는 샌드위치의 비주얼에 감탄했다.
‘그래, 예쁘긴 하지. 하지만 너무 딱딱해. 먹긴 너무 힘들어.’
바게트는 오래된 것일수록 딱딱하게 굳는다고 한다. 그래서 갓 구운 빵은 빵칼로도 잘 잘리고 속도 매우 부드럽다. 아마 내가 이날 먹었던 바게트 샌드위치의 바게트는 아주 오래된 것이었으리라. 멋진 파리지앵이 많이 있던 카페였지만, 맛은 멋지지 않았던 카페 marcovaldo. 마레라고 다 멋지고 좋은 건 아니다.
집 계약은 프랑스에서 오래 산 아는 언니가 같이 가서 해주기로 했다. 나는 마레에서 벗어나 약속 장소인 바스티로 향했다. 메트로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니 빗줄기가 오전보다 세져 있었다. 나는 빗속을 뛰어 언니가 있는 카페로 갔다. 언니는 일 때문에 학교 친구와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언니의 학교 동기는 일본인이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프랑스어보다 일본어를 더 잘할 수 있어서 언니 친구와 대화할 수 있었다. 프랑스어를 아주 잘하는 두 분 앞이라 매우 쑥스러웠지만, 유쾌한 카페 직원에게 카페 크렘을 한 잔 주문하고 언니들 옆에 앉아 빗소리를 반주 삼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일본어와 프랑스어, 한국어가 커피잔 사이를 오가는 사이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언니와 나는 집을 계약하러 가기 위에 언니 친구와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왔다. 언니도 나도 우산이 없어서 우린 할 수 없이 메트로 역까지 뛰었다. 파리 사람들도 이렇게 많이 오는 비를 그냥 맞고 다니지는 않는지 우리처럼 미처 우산을 준비 못 한 것 같은 사람들 빼고는 모두 우산을 쓰고 있었다.
내가 살 동네에 도착했는데도 비는 멈출 기세가 없었다. 우산을 사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일요일이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근무환경이 잘 조성되어 있는 프랑스의 마트는 대부분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다. 연다고 해도 오전에 잠깐 열고 금방 닫기 때문에 주말 식량은 미리 준비해두거나 재래시장에 가거나 아니면 관광지 특구에 있는 마트에 가야 한다. 그것도 안 되면 한인마트, 중국인마트가 있는 곳까지 찾아가야 한다. 다행히 내가 살 집까지 가는 길에 중국인 마트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5유로씩을 주고 검정색 우산을 각각 샀다. 그래도 1년 쓸 우산이라는 생각에 좀 더 예쁜 우산을 사고 싶었는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평범한 검은색 우산이었지만, 파리에 있는 1년 동안 나의 우산은 나를 비바람으로부터 잘 지켜주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다. 파리에서 살 집을 구한다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는데, 운 좋게도 좋은 집을 얻을 수 있었다. 영어나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하는 나는 한인 사이트에서 집을 구했는데, 집의 위치나 조건이 꽤 좋아 나 말고도 경쟁자가 몇몇 더 있었다. 프랑스에 가기 전이라 서로 얼굴도 모르고, 그야말로 신뢰가 중요한 상황에 나는 나와 집주인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역할을 한 이전 세입자에게 정말 정성스레 메일을 보내며 절대로 집 계약을 취소하지 않겠다는 믿음을 줬고, 정말 운이 좋게도 내가 선택되었다.
집은 화장실이 밖에 있다는 것 말고는 혼자 살기 너무 좋은 곳이었다. 사진으로만 봤던 창밖 풍경은 정말 내가 가장 그리워할 파리의 풍경이 될 만큼 너무 좋았고, 집도 깨끗했으며, 무엇보다 집주인이 너무 친절했다. 나는 메시지로만 주고 받다가 처음 만나는 집주인과 이전 세입자에게 앙젤리나에서 사 온 과자 상자 하나를 선물로 건넸는데, 그들이 별것 아닌 이 작은 선물을 너무 좋아해 주어서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집 계약은 내가 살 건물과 같은 건물에 사는 집주인의 집에 가서 했다. 집주인 내외분은 우리에게 마실 것과 프랑스에서 유명하다는 과자를 내어 주셨다. 나는 언니의 통역에 의존해야 했지만, 만나기 전에 서로 어떤 사람인지 몰라 걱정했던 것과 달리 내가 집주인이 마음에 든 것처럼 집주인도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파리에 ‘우리집’이 생겼다.
집 계약을 하고 나와 언니와 나는 노트르담 대성당( cathédrale Notre Dame de Paris)에 갔다. 빗줄기는 다행히 약해져 있었다. 언니는 유학 시절 관광 가이드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나에게 노트르담이 왜 망가졌었고, 어떻게 복원되었는지, 그리고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 등 <노트르담 드 파리>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건물 어디에 새겨져 있는지 노트르담에 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시간이 늦어 노르트담 대성당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하고, 건물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우리는 바로 근처에 있는 셰익스피어앤컴퍼니(Shakespeare & Company) 서점에 갔다. 좋아하는 영화 <비포 선셋>에 나오는 곳이었다. 기대를 품고 들어간 서점에서는 비가 와서 그런지 책 냄새가 물씬 났다. 좁은 통로 사이로 책 구경을 하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한쪽 구석에선 누군가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다른 한쪽 구석에선 작은 토론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장면에 소리에 습기를 머금어 축축하고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가 더해져 묘한 분위기가 되었다. 마치 영화에서 본 것처럼, 아니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이.
한참을 그렇게 영화 속에 있다 나왔다. 서점 문을 열고 나오니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언니와 나는 배가 고파 언니가 가이드 시절 종종 갔다는 카페에 가 저녁을 먹기로 했다. 언니는 오믈렛을, 나는 구운 연어를 시켰다. 구워진 연어는 생각보다 맛있었고, 같이 나온 파스타는 정말 별로였다. 그렇게 바빴던 하루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