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28 Avril 2015
파리에서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한 날. 어쩌면 이날 내게 온 작은 행복이 앞으로 파리에서 행복한 날들을 보내게 될 거라고 알려주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함께 점심을 먹고 그녀는 쇼핑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쇼핑에는 별 흥미가 없어 그녀와는 오후에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그동안 무얼 할까 튈르리 정원에 있는 녹색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그러다가 옆 건물에 걸려 있는, ‘파리 장식미술관(Musée des Arts Décoratifs)’이라고 쓰여 있는 현수막을 보게 됐다. 그 현수막을 보기 전까지 나는 루브르 박물관과 오랑주리 미술관만 튈르리 정원 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파리 장식미술관도 튈르리 정원 안에 포함된 미술관 중 하나였다. 마침 뮤지엄패스를 갖고 있어 따로 미술관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됐던 나는 약속 시간까지 파리 장식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바로 근처에 있는 루브르나 오랑주리에 비해 유명하지 않은 미술관이라 그런지 건물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튈르리 정원 쪽에서 건물로 들어간 나는 반대편에 있던 매표소를 미처 보지 못하고 바로 전시장 입구로 가 뮤지엄패스를 입구에 서 있던 직원에게 들이밀었다. 그랬더니 입구에 있던 프랑스 아저씨가 이 티켓으로는 입장 할 수 없단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아저씨가 반복해서 얘기해주는 걸 천천히 들어보니 매표소에서 뮤지엄패스를 보여주고 전시 티켓을 따로 받아야 한다는 소리인 것 같았다. 나는 매표소로 가 뮤지엄패스를 보여주고 전시 관람 티켓을 받아 다시 그 아저씨에게로 가 티켓을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아저씨는 이 티켓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며 나를 막아섰다. 아저씨 말대로 뮤지엄패스를 매표소에 보여주고 전시 관람 티켓으로 바꿨는데, 뭐가 문제길래 전시를 보러 들어갈 수 없는지 알 수 없는 나는 당황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아저씨는 화내지 않고 몇 번이나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 때까지 쉽고 친절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셨다. 아저씨 말은 뮤지엄패스로 볼 수 있는 전시는 일반 상설 전시이고, 지금 이쪽에서 하는 전시는 특별 전시라 이 전시를 보려면 따로 티켓을 사야 한다는 소리였다. 반대쪽 입구로 입장하면 일반 상설 전시장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특별 전시장 입구에서 그냥 무턱대고 가 티켓을 들이밀고 있던 거였다. 그런데 나는 티켓을 가지고 있는데 왜 들어가지 못하는지,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너무 당황해 있었기 때문에 그 말들을 그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전시를 보면서 조금 정신을 차린 후, 아저씨의 말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고 모르는 단어를 검색해보고 난 후에야 아저씨의 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때에는 전시장 입구에서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당황해하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아저씨가
“오늘 너에게 특별한 선물을 줄게.”
라며 특별 전시장으로 들어가게 해주었다. 아저씨가 프랑스어를 잘 모르는(심지어 영어도 잘하지 못하는) 동양 여자애에게 선심을 베푼 것이다. 아저씨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긴 했지만, 그때에는 아저씨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해서, 그 인사가 아저씨의 마음에 비해 너무 부족한 것 같아, 더 고맙다고 말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고마운 마음과 함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다.
아저씨가 보여준 전시는 피에로 포르나세티(Piero Fornasetti)의 <La Folie Pratique>.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피에로 포르나세티는 화가이자 건축가, 미술가, 장식 미술가로 늘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작품을 선보여 왔는데, 전시는 그의 잘 알려지지 않는 초기작부터 가구, 장식 예술품 등 그의 대표작까지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단순히 그릇이나 컵 등으로 사용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작품이자 생활용품들 중에서도 사람의 얼굴 모양이나 신체를 재미있게 표현한 장식 예술품들이 색다르고 재미있게 다가왔다. 또 전시장 한 쪽에서는 피에로 포르나세티의 다양한 작품이 콜라주 형식으로 등장하는 영상이 상영 중이었는데, 영상이 너무 독특해 전시 중 가장 흥미롭고 인상 깊었다.
특별전 이후에 본 일반 전시에서는 과거 프랑스의 가구 예술이나 내가 좋아하는 그릇 장식에 대해 알 수 있어서 재밌었다. 숙제가 있는지 나처럼 혼자 미술관을 방문해 한 손엔 노트와 또 다른 손엔 카메라를 들고 있는 유럽 남자가 있었는데, 일반 전시관엔 통로와 통로를 연결하는 문이 많아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문을 열어주고 잡아주고 했던 게 기억난다. 아마도 나는 박물관에서의 <비포 선라이즈> 같은 로맨스를 상상하고 기대해서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전시의 규모가 커서 천천히 제대로 보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는데, 나는 오후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있던 터라 충분히 여유롭게 볼 수 있어 좋았다.
만약 내가 다른 입구로 들어가려고 했었다면 나에게 특별전을 볼 수 있는 행운이 없지 않았을까. 단순히 유료 전시를 무료로 봐서 행운인 게 아니라, 프랑스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당황해하고 있는 한국인 여자애에게 작은 친절을 베푼 프랑스 아저씨를 만난 게 정말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날 그 아저씨는 작은 선물을 하나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아주 큰 추억을 선물 받았다. 지금은 아저씨의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고, 또 아저씨가 이 글을 읽게 되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그래도 아저씨에게 이렇게라도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꼭 전하고 싶다. Merci! Merci Beauco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