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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준 Dec 08. 2017

대답하는 학교, 질문하는 예술

1화 

대답하는 학교질문하는 예술


모든 “말”은 언제나 이루지 못할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수 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되뇌어 봐야 그 사랑이 전해질 리 만무한 것처럼, 아무리 갈증을 호소해 봐야 그 목마름이 전달되지 않는 것처럼, 말은 언제나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말”로 의사소통을 하게 된 인간이 필연적으로 가져갈 수밖에 없는 한계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을 아무리 얇게 잘라도 양면이 있는 것처럼, “말”은 동시에 인간만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말”은 우리의 한계를 설정해 버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도 있게 해주었습니다. 한계가 가능 조건이랄까요? 우리는 “말”의 한계 덕분에 예술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로써는 다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전달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바로 그림이나 음악이나 춤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술이라 부르는 것들이죠.

말은 언제나 명백한 한계를 지닙니다. 다만 그로 인해 예술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출처: pixabay.com)

물론 이렇게 말하면 예술이 먼저 나왔느냐, “말”이 먼저 나왔느냐 말이 많아지겠지만, 그건 차츰차츰 천천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리 살짝 스포일러를 해 보자면, 뭐가 먼저 나왔든 그 두 가지는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우리의 삶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죠. 사실 이게 이 글의 전체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술은 “말”이 빗나가는 지점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말”은 예술이 끝나는 지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 이 연재 동안 설명될 예정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그림의 눈, 철학의 말”이죠.   


그러려면 우선 이 글에서는 예술과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둘의 관계는 어떤지부터 얘기해야겠네요. 이것은 꽤 지난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인류가 수만 년을 살아왔더라도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내리지 못하는 것처럼, 수만 년에 걸쳐 예술이 축적되어 왔더라도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숨결처럼, 어떤 정의를 내리더라도 예술은 언제나 그 정의를 배신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런 ‘정의할 수 없음’이야말로 예술의 아주 중요한 특질 인지도 모릅니다. 정형화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그런 성질 말이죠. 예술은 그럴 때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는 법을 말해줄 수 있습니다. 


고정되어있는 예술은, 고정된 삶이 그런 것처럼 애당초 모순이기도 하거니와 바로 그 고정성에 의해 거기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또 궁지로 몰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예술은 나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려버린다면, 감정이 아니라 생각을 표현한 것은? 그리고 내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을 표현한 것은? 등의 반론이 생기게 되고, 그럼 후자에 속한 것들은 “예술은 나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라는 정의에 포함이 되지 않아 더 이상 예술일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후자에 속했지만 충분히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죠. 예컨대 산업 디자인이라든가, 타이포그래피 같은 것들도 그중 하나일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기는 했지만, 이건 어떤 것으로 정의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정의든 결국에는 거기에서 빠져나가는 존재들이 있죠. 이것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말” 역시 너무 다양한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잠시 이것들에 대한 자세한 정의는 접어두고, 우선 예술을 “미술작품”으로, 말을 “철학”으로 대강 정해두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더욱 깊은 의미와 그 효과들은 이 글을 써 나가는 동안 차츰차츰 하나씩 풀어갈 것이고, 그로 인해 결국에는 예술이란 무엇인지, 말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벗어나는 게 목적입니다.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끝나 봐야 알겠죠.  


목적이 달성된다면, 즉 예술이 “예술이란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벗어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이것이 예술이다”라는 방식으로 예술과 예술 아닌 것의 구분 짓기가 사라졌으니, 오히려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이것이 예술이다”는 “이것도 예술이다”가 되게 되는 것이죠. “이것도”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뒤샹의 <샘>처럼 변기가 될 수 있고, 셰자르(César, 1921~1998)의 작품처럼 찌그러진 캔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길 위에 놓인 벽돌 하나, 꽃 한 송이도 모두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요컨대 정의 게임에서 벗어난 예술은 우리의 삶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 글의 목적이 그것입니다. 

예술이 삶이 되고, 철학이 삶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삶이 된 예술과 철학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글의 목적입니다.

 

뒤샹의 <샘>(1917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세자르, <Compression de canettes>, 1988-1990, 출처: www.artsy.net


뭔가 거창하죠? 

하지만 사실 제가 이런 거창한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 아이의 시험지 오답풀이 노트에서였죠.  


갑자기 시험지라니 뭔가 생뚱맞다고 생각하실 분을 위해 간단히 설명을 드리자면, 저는 이렇게 글을 쓰는 것 외에도 아이들에게 철학과 예술을 가르치는 일도 합니다. 원래는 대치동에서 논술 강의로 아이들을 처음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저와 같은 일을 하셨던 분들이 그러하듯 저도 어느 사이엔가 현실과 이상의 어쩔 수 없는 거리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대입”이라는 테스트에 모든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논술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저 또 다른 주입식 교육이었죠. 조금 긴 객관식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괴리감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바꾸거나, 아니면 떠나거나. 둘 중 한 가지죠. 우리나라 대입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졌을 턱이 없는 저는 떠나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 몇몇, 그리고 그 아이들의 부모님 몇 분은 제가 아이들을 계속 봐주기를 원하셨고, 그게 벌써 몇 년이 이어져 10살 남짓했던 아이들이 이제는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아이가 얼마 전 첫 중학교 시험을 보았고, 그 시험지를 가지고 온 것이 바로 그 시험지입니다. 아이는 점수가 그리 좋진 않았는지, 소심한 핑계와 함께 제게 시험지를 내밀었습니다. 도덕 시험이었습니다.

시험 문제와 그 답을 보고 제 생각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보자면, 우리네 교육에 있어서 시험이란, 끔찍이도 쓸모없는 것을, 택도 없이 잔인한 방식으로, 얼마나 잔혹하게 아이들이 주입받았는가를 평가하는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더 정확히는, 순응하고 복종하는 것을 누가누가 잘하나 경쟁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이후로 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물론, 그전부터 그에 관련된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치동에서 견디지 못하고 나온 것이기도 하죠. 하지만, 여태까지는 이것을 정리해 글로 남겨 보겠다는 생각을 하진 못했습니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연재는 그동안 쌓였던 이런 혼란스러움을 차곡차곡 정리하여 내 보이는 첫 장입니다. 

 


대답하는 아이들 


학교에서, 그리고 학원에서, 아이들은 정답을 찾는 법을 배웁니다. 누가 더 정답을 잘 찾는지가 모든 평가의 기준이 됩니다. 사실 이런 모습이 지금의 아이들에게만 있는 모습은 아닙니다. 저희도, 그리고 저보다도 더 먼저 학교에 다녔던 분들도 전부 그런 교육을 받았습니다. 정답에 맞는 대답을 많이 하면 할수록 우등생, 모범생이 되었죠. 다른 나라에서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예외 없이 이런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출처: pixabay.com)

정답이 필요했던 세계, 그리고 정답이 존재했던 세계에서는 무척 유용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교육 방식은, 그리고 그렇게 정답을 맞히는 삶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굳건하게 자리 잡아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탄탄한 기반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죠.


사실 이것들을 “문제”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독단적인 이름 짓기입니다. 그저 이제까지 정답의 위치에 있었던 입장에서 보기에는 자신들과 다르기 때문에 “문제”라고 부르긴 하지만, 다만 그들과 다른 입장일 뿐인 ‘무엇’이죠. 일단 편의상 여기에서도 문제라고 해두도록 하겠지만, 이게 결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문제는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들은 이제까지는 드러나지 않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거나 무시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회가 변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도 이제 말을 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 문제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 최근에 가장 많이 부각이 되고 있는 동성애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동성애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 것인가가 우리 사회의 주요한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동성애나 동성애자를 무시해 버릴 수도 있었고, 격리해버릴 수도 있었지만(실제로 그렇게 했던 시대가 있었고, 여전히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성애 역시 “우리”라고 가정되는 집단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현상이고, 그 문제와 관련된 사람들 역시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이죠. 


(출처: pixabay.com)


마찬가지로 여성인권에 관한 문제, 동물권에 관한 문제, 그리고 이민자에 관한 문제 등 수많은 새로운 문제들이 우리 앞에 당면했습니다. 예전처럼 단일민족의 가부장적 시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게 되었죠. 새롭게 마주해야 할 타자가 다가온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니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이제까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타자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AI(Artificial Intelligence)에 관한 문제나 유전자 공학으로 탄생하게 될 새로운 생명체, 혹은 장기 이식 등과 정체성에 관한 문제 등 몇 년 전이라면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들이 새롭게 마주해야 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새로움에는 주어진 정답이 없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대답이 주어졌다면, 이미 그들은 타자가 아니었겠죠.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을, 새로운 세상을, 그리고 새로워질 세상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새롭게 등장할 타자와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 많은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해 고민해야 할 순간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데리다라는 현대 철학자는 그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윤리가 시작된다고요.


그전까지는 윤리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매너와 에티켓의 영역이었죠.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미 매뉴얼화되어있었습니다. 여기에 고민은 필요 없었죠. 그저 매뉴얼에 나온 대로 행동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세상에서는 그게 그리 간단치만은 않습니다. 이제까지의 방법으로 그들을 대했다가는 단박에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죠. 이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윤리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생존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생존은 언제나 공존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정답을 찾는 방법만 배웠습니다. 이것은 사실, 문제 해결이라기보다 누가 더 매뉴얼에 충실하였는가에 관한 테스트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근대의 교육 기관이나 기업 등에서는 항상 매뉴얼을 강조합니다. 물론, 이런 방식은 무척 유용합니다. 매뉴얼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죠. 다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학교에서 말하는 그 정답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해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제가 아이들의 시험지를 보고 가장 놀랐던 부분은 그 무의미함은 둘째 치고, 문제의 정당성 자체가 결여된 것들이 많았다는 점이죠. 그래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과 그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지만, 선생님 스스로도 확신이 없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로 가르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오직 시험지 안에서만 정답인, 그런 어설프고 빈약한 것들이었죠. 그리고 아이들은 여전히 그 빈약함을 더 빈약하게 습득하고 있습니다. 그저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그 시험지 안의 정답을 답안지에 기입하는가를 배우고 있는 것이죠.


우리 교육이라는 건 오직 그것뿐이었고, 그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교육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는 시대에 당면하게 되었죠. 


그런데 예술은 그런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봅니다. 

질문이라는 방식으로 말이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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