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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준 Dec 15. 2017

현대 속 근대교육

교육은 교정이 아니다

1) 현대 속 근대교육


본격적으로 예술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길어질 것 같으니 우선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고 가겠습니다. 지난주에 이야기했던 교육에 대해서 말이죠. 물론 이 연재가 교육 개론서는 아니므로, 교육에 관해서는 이번화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교육 시스템이 바로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교정이 아니다.”


이 말을 가장 처음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유명한 사람은 미셸 푸코(Paul Michel Foucault, 1926~1984)라는 사람입니다. 프랑스 현대 철학자인 그는 우리가 사회에 의해 어떻게 교정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권력 구도가 어떻게 작용했고, 어떤 방식으로 더 교묘히 변화되어 가는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교육은 교정이 아니다”라는 푸코의 말을 면밀하게 잘 들여다보게 되면, 우리를 ‘지금의 우리’처럼 만든 근대 교육의 모습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먼저 그림을 하나 보겠습니다. 


 

<L'othopédie>, Nicolas Andry, (1741), 출처: www.hagstromerlibrary.ki.se


위의 그림은 지금으로부터 250년도 더 전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교육을 무척 잘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받아왔던 교육이란, 그리고 우리가 지금 행하고 있는 교육이란 바로 이런 것이죠. 나무처럼 자연스럽게 커가는 아이들을 틀에 맞추기 위해 계속 교정하는 것 말입니다. 그리곤 잘 교정된 아이들을 보고 보통 철이 들었다고 말하거나 우수한 아이라고 칭찬하죠. 


물론 그것도 나름대로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교정이 잘 된 아이는 예측 가능한 행동을 하고, 그러니 다루기 편한 아이가 되거든요. 그리고 다루기 편한 아이들은 선생님이나 사회의 입장에서는 무척 효율적인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효율성이 우리 교육의 목표였고, 우리는 그런 교육 방식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원래! 당연히! 

교육이라는 게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이런 교정으로써의 교육은 생각보다 역사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르네상스 이후, 더 정확히는 근대 이후에 들어서야 체계가 잡히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니 당연히!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근대교육이 이런 양식으로 발전한 까닭은 명확한 목적에 기반했기 때문입니다. 근대화라고 일컬어지는 산업화, 대량생산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필요한 인재들이란, 독특하고 창의적인 인재가 아니라 ‘균일한’ 인재였습니다. 근대 사회,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생산수단인 기계는 똑같이 돌아가야 하는데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생산성이 제대로 나오지 않겠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일을 할 수 있게 다듬어야 했습니다. 규격화시킨 거죠. 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근대의 학교입니다.


<모던 타임스>, 출처: www.letterboxd.com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는 그런 근대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사람들이 대량 생산 체계인 기계에서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비판한 영화죠.


이런 “모던 타임스”, 즉 근대라는 시간 속에서 사람은 효율적이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리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기계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처럼,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로 인풋과 아웃풋이 일정해야 했습니다. 공정(process)이라는 것이 그렇죠. 똑같고, 일률적이고, 일괄적이지 않는다면 공정이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근대의 교육은 산업의 역군을 만들어 내기 위해 사람을 똑같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공장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똑같음, 일괄적, 일률적, 규격화, 체계화 등등 다 같은 말입니다. 


그때의 공장이 지금은 뭘까요? 

네. 기업입니다.


“요즘 같은 때에 취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취업이라도 잘 해야지”라는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취업이라도 잘 해야죠. 하지만, 그 “취업이라도”라는 말이 만들어내는 공포심, “헬조선”, “청년실업률” 등등의 개념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하면, 계속 같은 행위를 반복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이제 근대 교육의 유통기한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현대가 오기 때문이죠.  


2) education


당연한 소리지만, 그리고 그 당연함 때문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분들이 많이 있으시겠지만, 교육이라는 말은 번역어입니다. 원래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공부(工夫)’가 더 맞죠. 사실 이것도 우리식이라기보다는 중국식이지만요. 


敎育은 일본이 메이지 시대에 education이라는 영어를 한자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육에 관해 알기 위해서는 education, 즉 이 영어 단어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단어의 뜻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단어의 유례를 확인해 보는 것이죠. 영어는 원래 라틴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영어는 한글, 라틴어는 한자 정도 되겠네요. 그러니까 라틴어를 조사해보면 그 단어가 갖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education이라는 단어는 원래 ‘끌어내다’, ‘빼내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ēdúco(=ēx+dúco)’에서 온 것입니다.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죠. 쉽게 말해 교육 대상자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재능을 끄집어내서 키워주는 것이야 말로 education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아이들에게 무슨 대단한 지식이 있거나 엄청난 천재성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런 천재성을 소유한 아이들은 무척 소수이고, 그런 아이조차도 지식을 수용해 가면서 발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이들도 세상을 보고 느끼고 만질 줄 안다는 것이죠. 아이들도 세상을 감각할 줄 압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러한 감각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기반으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성장해 가죠. 세상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뜨거운 것이고, 저것은 차가운 것이고, 그러므로 이것은 만지면 안 되는 것이고, 저것은 괜찮고, 맛있고, 편하고, 즐거운 것이다.라는 방식으로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언어를 배우고, 자연스럽게 언어적 체계, 즉 논리를 습득합니다. 크고 작음, 멀고 가까움, 옳고 그름 등 세상의 관계를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것은 큰 것이고 저것은 작은 것인데, 큰 것은 작은 것 안에 들어갈 수 없고, 작은 것은 큰 것 안에 들어갈 수 있다"세상의 이치를 배우는 것이죠. 그리고 관계를 습득하며 논리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바로 이 세상의 이치를 말로 설명한 것이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논리만으로도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확장할 수 있는 역량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죠.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1786, 뉴욕메트로폴리탄미술관


플라톤의 대화편 중에 <메논(Μένων)>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소크라테스가 노예 소년과의 대화 과정 속에서 노예 소년 스스로가 기하학적 법칙을 알아내게끔 하는 장면이죠. 아무것도 모르는 노예 소년이 소크라테스의 안내를 받아, 스스로 기하학 법칙을 도출해 내는 것입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교육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장면이죠. 


<메논>에서 소크라테스는 노예 소년에게 기하학적 수식이나 법칙을 전혀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냥 단순히 묻고 답하는 대화를 통해 노예 소년이 정확한 정답을 도출해 내게 만들었죠. 무언가를 주입하는 게 아니라 ēdúco라는 단어의 의미 그대로 노예 소년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을 끄집어냈을 뿐이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교육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각자가 원래 지니고 있던 '생각하는 힘'으로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죠. 너무 흔한 비유지만, 물고기를 주는 게 아니라 낚시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게 그들의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산업 사회가 되면서 교육이 보편화되었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획일화된 주입식 교육밖에 못하게 되었고, 그것이 그대로 유지된 것이 지금의 교육입니다.  

물론 이런 방식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였기에 가능한 방법이었고, 그 시대, 즉 고대 그리스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만큼은 아니겠지만,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질문”이라는 유용한 도구가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질문이라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태 대답하는 법만 배워왔던 우리는 질문을 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학교에서도 질문이 허용되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죠. 더 큰 문제는 질문 역시 ‘맞는 질문’이어야 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맞는 질문’이란 보통 교과서에 있는 질문이거나 수업에, 즉 시험에 나올만한 질문을 말합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질문도 가려가며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생뚱맞고 어쩌면 어리석어 보이는 질문은 애초에 차단되었고, 그러니 질문의 다양성이 있을 리 없고, 그러므로 당연히 질문의 수준이 높아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질문은 정말 중요합니다. 

다만, 정답이 미리 정해져 있는, 이제까지의 질문이 아닌 새로움을 여는, 새로운 질문이 필요하죠. 질문을 바꾸어야 합니다. 영화 <올드 보이>를 보면 이런 것을 잘 표현한 장면이 나옵니다. 오대수(최민식)가 자신을 가둔 사람을 추적해 가지만 하는 일마다 허탕일 때 이우진(유지태)이 등장해서 말하죠. 


<올드보이>, 2003년, 출처: 네이버 영화


"틀린 질문만 하니까 맞는 대답이 나오지 않잖아요 오대수 씨."

라고 말입니다. 


제가 수업 때 자주 하는 질문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착하게 태어나는 걸까요? 아니면 나쁘게 태어나는 걸까요?"

 

쉽게 말해 보자면 성선설을 믿느냐, 성악설을 믿느냐는 질문이죠. 저는 철학뿐만 아니라 예술에 관한 수업을 할 때도 항상 이 질문을 합니다. 수강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고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죠. 일반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대한민국 성인의 반응은 몇 가지로 추려집니다. “뭔 소리야?” 혹은 “착하다”, “나쁘다”, “둘 다 아니다”라는 식의 대답이죠. 어떤 식으로든 대답합니다. 우린 그렇게 트레이닝되었으니까요. 사실 이 이외에 다른 대답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수업 시간이라면, 질문을 하는 쪽이나 대답을 하는 쪽이나 다들 뿌듯해할 수도 있습니다. 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토론 비슷한 걸 하긴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질문은 아주 평범한 질의응답입니다. 이런 것으로는 새로운 생각을 끄집어내 주기가 어렵죠. 단편적인 지식 습득에만 그칠 뿐입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착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합의를 해보지도 않았고,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착하다느니 악하다느니 대답을 하죠. 제가 생각하는 착함과, 이 글을 읽는 독자분이 생각하는 착함에는 아주 먼 거리가 있지만,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질문과 대화로는 서로가 다른 ‘착함’을 가지고, 전부 다른 ‘나쁨’을 가지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저 어른이 아이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욱여넣어 아이들의 생각하는 것을 고치는 교육이 될 뿐입니다. 앞서 말했던 ‘교정’이 되는 것이죠.


하지만 education이란, 스스로가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건드려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아이가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알껍질을 조금씩 두드려 주는 것이죠. 


이런 방식의 교육은 사실 아주 오랜 옛날, 그러니까 앞서 언급했던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해 왔던 방식입니다. 흔히 질문을 하고 답하는 문답법, 혹은 변증법(, διαλεκτική, Dialektik)을 통해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산파술(産婆術, maieutike)이죠. 무척 유용한 방법이고, 생각의 힘을 기르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방법이지만, 우리나라 교육 여건 속에서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어 실제로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던 방식입니다.

 

예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소크라테스 대신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 주는 존재입니다. 

낯섦 그 자체로, 그 존재 자체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이미지의 반역>, 르네 마그리트, 1928, 출처: 위키피디아

“네가 보고 있는 게 맞아?” 

“네가 생각하는 게 진짜야?”

“그게 정상일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게 정상이야?”

“정상이라는 게, 상식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해?”


라고 말이죠. 

그리고 예술이 던진 질문은 우리가 이제껏 쌓아왔던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견고하게 두르고 있던 근대라는 성이 드디어 박살 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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