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성준 Dec 22. 2017

예술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예술인가


이제 그럼 드디어 예술에 관해 이야기할 시간이 왔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목이 “그림의 눈 철학의 말”인 만큼 예술에 대한 정의는 짚고 넘어가야겠죠.


그게 무엇이든, 학문을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은 먼저 대상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게 도대체 뭔지는 알아야 그것에 대해 공부를 하든 연구를 하든 하겠죠. 그리고 대상에 대해 아는 방법 중 가장 쉽고 정확한 방법은 그것에 대한 정의(definition)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럼 정의를 내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뭘까요? 누군가 “예술은 언제 시작 되었고,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해 놓은 게 있다면, 그걸 그대로 가져다 쓰면 되겠지만, 아쉽게도 말이 언제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예술도 언제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럼 그 다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 단어의 기원을 보는 겁니다. 

예술이란 말도 앞서의 교육이 그런 것처럼, 일본의 번역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술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술”이라는 단어는 원래 있던 단어죠. 학문 용어로서는 무척 드문 일입니다. 다만, 이것을 지금의 “예술”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된 것은 일본이 “art”라는 말을 대입시켜 사용하면서부터 그렇게 되긴 했지만, 어쨌든 원래 있던 단어입니다. 그러니 예술이라는 단어의 기원을 보려면 먼저 藝術을 먼저 이해하고, 그 다음에는 영어를 거쳐 라틴어, 그리스어를 보아야 하죠.


그런데 이런 정의는 언제나 그렇듯이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간단하게만 짚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그다지 쓸모가 없듯이 예술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도 그리 큰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선, 예술(藝術)이라는 한자어에서의 藝는 사대부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여섯 가지 기초 교양, 즉 육예(六藝: 禮-예용, 樂-음악, 射-궁술, 御-기마술, 書-서도, 數-수학)에서의 ‘예’입니다. 예전에는 이 육예를 통해 사람을 평가했을 만큼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원래 이 “藝”에는 무엇을 ‘심는다’는 의미가 있죠. 즉, 사람됨을 평가한다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기초 교양의 씨를 뿌리고 인격의 꽃을 피우는 수단으로 여겼던 것이 바로 이 藝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예(禮)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글자입니다. 또한 목록을 보면 알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과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수학이나 말 타는 기술, 활 쏘는 기술이 특히 그러하죠. 


그리고 術은 道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길이라는 뜻이죠. 이런 道가 들어있는 단어가 많죠? 다도(茶道), 태권도(跆拳道) 같은 단어들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 이때의 道는 바닥에 나있는 길이라기보다는 경로나 방법을 의미합니다. 다도는 차를 따르는 방법이고, 태권도는 주먹을 다루는 방법인 것처럼 말이죠. 무언가를 하는 방법, 즉 비슷한 단어로는 “기술”이 있습니다. 실제로 기술(奇術)의 술과 예술의 술은 똑같습니다. 

이런 ‘예술’이라는 말은 《후한서(後漢書)》 <안제기(安帝紀)>에 ‘백가예술(百家藝術)’이라는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지금의 art로 사용하는 것이죠. 


그럼 이제 art의 어원을 보겠습니다. art는 원래 라틴어 아르스(ars)에서 옵니다. 그리고 ars는 그리스어 테크네(technē)에서 유례한 말이죠. technē라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죠? 네. 맞습니다 우리가 흔히 기술이라고 번역하는 테크닉의 어원입니다. 원래 art라는 말의 기원에는 지금의 예술적, 그러니까 뭔가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그런 느낌의 의미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디에 써먹을 수 있는, 쓸모 있는 기술의 의미가 더 강했죠. 이런 기술로서의 예술이 미적 의미로 한정되어 그야말로 기술과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그렇게 됩니다.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뭐가 중요해?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의외로 재미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예술가라고 부르는 고대인들, 예컨대 고대 그리스의 프락시텔레스나 미론, 리쉬포스,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당시에는 전혀 예술작품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예컨대 중세 고딕의 스테인드글라스나 비잔티움의 모자이크 등도 마찬가지였죠.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이란, 의외로 폭이 좁고 편협한 정의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E. H 카의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이 이 때 만큼은 아이러니하게 아전인수격으로 해석 될 수 있는 요지를 제공하죠. 역사 속의 모든 예술을 현대의 예술로 해석해 버리는 것 말이죠. 그래서 문헌학, 즉 단어에 대한 역사적 고찰 없이는 철학도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 개념의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보아야 그것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죠.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은 이렇게 처음부터 난관에 봉착합니다. 그리고 첫 단추가 잘못 꿰어 졌으니 가면 갈수록 혼란만 가중 되죠. 그래서 미술사가들은 나름대로 해결책을 강구합니다. 


그 중 한 미술사학자는 “예술은 없고, 예술가만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죠.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몇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시각이 유명론(nominalism, 唯名論)적 관점입니다. 유명론이란, 쉽게 말해 예술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것저것에 공통적으로 붙여진 이름(nomina 라틴어)에 불과하다는 이론입니다. 예컨대 “인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문성준”, “김연아”, “플라톤”을 공통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만든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죠. 진짜로 있는 것은 각각의, 우리 눈앞에 있는 개별적 사람(문성준, 김연아, 플라톤)뿐이라는 말입니다. 


예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이라는 무언가는 실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고흐의 작품에, 렘브란트의 작품에, 피카소의 작품에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술가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개별자(고흐, 렘브란트, 피카소)는 있지만, 예술이라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술은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릴 수가 없게 되는 거죠. 당연합니다. 있지도 않은 걸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가 있겠어요. 


여기에는 꽤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예술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여 그것을 정의 내려 버리게 된다면, 즉 “예술이란 무엇이다”라는 말에 정답을 내려 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예술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는 역설이죠. 


뭔가 좀 어려워진 것 같지만 이 역설은 새롭게 변한 예술을, 그리고 새롭게 변할 예술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됩니다.

 

뉴욕현대미술관 <라우센버그 특별전>에서 작품을 보고 "말"을 나누는 관람객들 


왜냐하면 예술은 “말”이 아니기 때문이죠. 

“예술은 ‘말’이 아니다” 사실 이 말도 어쩌면 예술을 정의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긍정을 통한 정의가 아니라 부정을 통한, 즉 “무엇이 아니다”라는 식의 정의라는 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것도 정의를 내리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합니다. 

한계를 정해야 하는 거죠. 

“예술은 말은 아니다”라는 방식입니다. 

예술은 “말”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말‘만’은 아닌 것이죠. 

뭔가 복잡한 말장난 같으니 조금 더 자세히 풀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즉 발음하는 언어나 글자로 하는 예술도 있고, 예술은 , 즉 테마, 주제가 있기도 하지만, 예술이 꼭 언어나 글자로만 해야 하거나,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테마내용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식의 말장난이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이런 말장난이 우리를 예술에 조금 더 가깝게 가게 해 줍니다. 


예술은 말을 하긴 하지만, “이 아닙니다.

참, 이걸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이게 말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말(언어)”은 무척 명료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말(언어)"도 있고, 그래서 서로가 오해 속에 살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말(언어)”은 대상을 무 자르 듯 딱딱 잘라서 설명하죠. “스마트폰”이라는 말은 어쨌든 명확하게 스마트폰을 말해줍니다. 여기에 뭔가 더 많은 의미가 포함 될 수는 있겠지만, 그건 특수한 경우죠. 웬만해서는 정답을 딱 말해주는 것이 “말(언어)”입니다. 반면 그와는 다르게 애매모호한 "말(언어)"도 있는데, 이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하는 “말(언어)”은 예술이 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는 시가 그렇고 소설이 그렇죠. 


반면, 예술은 (주제테마내용)을 하긴 하지만, “말(언어)”이 말하는 방법과는 조금 다릅니다. “말”의 말이 이성에 설명하고, 논리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예술의 말은 감각에 안착합니다. 예술은 감각을 자극하고, 감각을 극대화 하고, 간혹은 감각을 박살내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주제테마내용)을 전달하죠.


감각적으로 말하는데 감각을 박살낸다니, 뭔가 모순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점이 현대미술에 있어서는 무척 중요한 부분이며, 우리가 새롭게 세상을 보는데도 무척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감각을 박살내서 어떤 낯섦을 느끼게 만들고, 거기에서 사유가 시작 되게 하는 것이 현대미술의 목적 중 하나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는 감각이라는 것이 무척 애매모호 하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누구나 커피를 마실 수 있지만, 그 커피 맛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꽃향기를 맡고 이게 장미향인지 프리지아향인지 구별할 수는 있지만, 프리지아향이 어떤 향인지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저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에게 다른 비슷한 향기를 맡게 해주는 방법뿐이죠. 


예술도 비슷합니다. 예술까지 갈 것도 없죠. 누군가에게 빨간색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색을 보여주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비슷한 색을 가진 것의 예를 들며 설명하는 게 바로 그런 것이죠. 어떤 색을 설명하려면 비슷한 색을 가진 무언가를 보여주거나 혹은 사례를 들어 그 사람이 예전에 보았던 색 중 어떤 것을 상기하게 만드는 과정이죠. 


잭슨 폴록의 그림 앞에 선 사람들


이렇게 한 가지 색을 전달하는데도 힘든데, 이 수많은 색깔과 형태의 집합인 예술을 말로 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시작부터 실패가 예견되어 있는 것이죠. 어떤 사람도 예술 작품을 보고 받은 자신의 감동을 타인에게 100%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 감동은 단어와 단어 사이로 빠져나가버리죠.    

하지만 이게 예술의 한계이자 가능성입니다.


예술은 그 불명료함 때문에 잘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미술 비평가들은 가능한 한 “말”을 다듬고 다듬어 그 예술을 설명하려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비평은 예술보다 한 발 늦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현대미술을 보는 많은 사람들은 반대의 입장이죠.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 작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꿈보다 해몽이랄까요. 저도 도슨트나 비평을 통해 작품을 설명하다 보면, “작품보다 설명이 더 좋아요”라는 소리를 간혹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웬만한 비평은 예술의 풍부함을 다 담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그런데 바로 여기에 예술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말로 다 하지 못하는 풍부함그리고 말의 무능력


이것이 예술의 가능성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선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는 과정을 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알아 가는데 있어 가장 장해물이 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생각입니다. 우리는 이미 아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유하고 고민해보려고 하지 않죠. 이미 정답이 주어지고, 그 정답을 통해 알게 된 것을 굳이 또 머리 싸매며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그것을 외우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알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모르는 것이죠. 

역설입니다. 

알기 위해서는 몰라야 한다는 것. 


비슷한 말이 있죠? 소크라테스가 했다고 잘못 알려진 그 유명한 말, “너 자신을 알라”도 이와 같습니다. 네가 모른다는 것을 모르니까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것을 알게 될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모르게 될지, 그 결과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알려고 시도라도 하려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입니다.


예술이 바로 이 모르는 것입니다. 예술은 “말”처럼 대상을 명확하게 뚝 떨어트려 놓고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각에 바로 직접 다가오죠. 그 때문에 우리는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됩니다. 뭔가 있긴 있는데,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거죠. 마치 어떤 냄새를 맡았는데, ‘어? 이게 뭐지? 뭔가 익숙한 냄새인데? 이게 무슨 냄새지? 알 듯 말 듯한데, 도저히 무슨 냄새인지 떠오르지가 않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르는 것을 그대로 놔두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알아보려고 노력하죠. 이 냄새가 도대체 무슨 냄새인지, 언제 맡았던 건지, 고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모든 상황에 대해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모르는 것을 무시하고 가버릴 수도 있죠.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선생이고, 선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시하지 않고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만드는 사람들이죠.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지면을 활용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그 알 수 없는 모호한 대상은 우리에게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어떤 예술 작품은 우리의 감각에 더할 수 없이 강렬한 흔적을 만들어 놓기도 하죠. 이게 꼭 위대한 대가의 작품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쓰인 시가 그런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고흐의 작품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작품의 가격이나 작가의 명성 따위는 무의미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에게 그런 낯선 강렬함으로 다가 왔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죠. 이것에 관해서도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가서 더 자세히 이야기 해보도록 하죠.  


그렇게 낯선 존재를 마주한 우리는 그 작품을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마치 입 안에 걸린 가시처럼, 그 불편함을 어떻게든 해소해야 합니다. 해석하고 알아 봐야 하는 것이죠.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거든요. 평온하고 순탄했던 우리의 사고가, 고요한 우리의 일상이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할 때는 우리 내면에 상처를 내는 경우도 있죠. 특히 현대 예술에 그런 것이 많습니다. 애브젝트 예술(Abject Art, 혐오미술) 같은 것이 그렇죠.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생각할 수밖에, 고민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죠. 


상해 WEST BUND ART & DESIGN fair에 전시된 데미안 허스트의 <night falls fast> 검은 융단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수만 마리의 파리와 구더기의 시체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예술은 그 고민에 정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정답을 말해 버리면 그것은 끝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정답이 있는 문제는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거든요. 더구나 그 질문에는 정답도 없습니다. 


카뮈가 소설가는 정답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예술은 그저 보여줍니다. 예술은 예술가가 본 세상을 물감으로, 소리로, 언어로 보여줍니다. 감각에 들이밀고 스미고, 상처를 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생각,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세상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질문을 이끌어 내는 것이죠.

이건 도대체 뭐지?”

라는 질문을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예술이 우리와 어긋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해 왔던, 혹은 너무 당연해서 정상이라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던 일상과 딱 맞아 들어가지 않고 빗나갑니다. 흐트러진 퍼즐을 그대로 보기 힘든 것처럼, 그렇게 빗나간 예술은 우리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줍니다.


예술이 만들어낸 균열로 인해 세상이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죠. 


(계속)

이전 02화 현대 속 근대교육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