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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준 Jan 05. 2018

은유라는 거짓말

구상과 추상

예술은 거짓말을 합니다. 

그런데 예술은 이 거짓말에 하나를 더 보탭니다.


바로 상상이라는 것이죠. 


거짓말은 그 빈 공백으로 사람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재미있게도 거짓말은 거짓말의 바로 그 특성, 즉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음" 때문에 사람을 상상하게, 아니 조금 강조 하자면 상상할 수밖에 없게 만들죠.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말해 버리면 더 이상 그 대상에 대해 생각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완벽하게 설명되어버린 대상에 대해서는 호기심도, 흥미도 생기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거짓말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거짓말만 그런 건 아닙니다. 우리의 “말” 자체가 그러지 '못 한다'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아무튼 거짓말은 대상을 그대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마치 공포 영화 같죠. 공포 영화도 뭔가 있는 듯 없는 듯해야, 진짜인 듯 아닌 듯해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끔찍한 일을 상상하며 더 무서워집니다. 그래야 잠에 들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항상 있어왔던 일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는 거짓말을 통해 상상하게 해 왔습니다. 모든 신화와 전설과 이야기가 신이나 영험한 존재를 애매모호 하게 뭉뚱그려서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더 무서워하고 경외하게 만들었죠. 예컨대 영화배우가 매일 TV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면 신비감이 사라져 영화에 집중하기가 더 어려운 것과도 비슷합니다. 영화배우는 적당히 알려져 있어야, 즉 일정 부분 이상 숨겨져 있어야 관객들이 영화배우를 배역으로 상상하여 치환할 수가 있는 겁니다. 


예술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술은 의도적으로 실제와 빗나감으로써 상상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듭니다. 앞서 말한 공포영화처럼 말이죠. 공포영화가 귀신을 완전히 보여주지 않거나 대놓고 보여줘 버리면 공포를 유발할 수 없듯이 예술 작품이 실제와 완전히 똑같아 버리면, 거기에는 상상력이 발 디딜 장소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저 뛰어난 테크닉에 감탄하는 정도의 반응 밖에 불러일으키지 못하죠. 물론 하이퍼리얼리즘 중 어떤 것들은 바로 그 “너무 닮음”으로 상상력을 촉발 하는 작품도 있습니다. “닮음”을 비틀어 버린 거짓말을 하는 경우죠.


살짝 벌어진 틈새에서 빛이 새어 나오듯, 진짜와 어긋난 그 틈바구니에서 예술은 상상력을 만들어냅니다. 마치 살짝 열린 문틈을 들여다보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것처럼 말이죠. 거의 본능과 같은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을 할 때도 비슷합니다. 

그냥 “눈이 예뻐요”라고 하지 않고, “눈이 호수 같아요”라고 말하는 이유도 이와 같죠.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은유를 사용하는 것이 대상을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은유의 효과는 그와 정 반대입니다. 은유는 전혀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거짓말이죠. 이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어릴 적에 부모님께서 그렇게도 책을 읽으라고 하셨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스토리나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면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되지 굳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사실은 영화를 볼 필요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냥 영화 정보란의 줄거리나 잘 써 놓은 리뷰만 봐도 됩니다. 실제로 요즘에는 그런 방식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많죠. 요즘은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 시청률 보다 오히려 흔히 말하는 짤방(짤림 방지용 자투리 이미지)만으로 보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 그리고 더 나아가 문학이라는 예술 작품을 읽는 이유는 그런 "정보전달"이상의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로 치자면 각 시퀀스를 이루는 카메라워크나 배경음악, 배우들의 표정 등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이죠. 이 ‘무언가’는 카메라워크나 배경음악 등을 그저 기계적으로 더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요소들은 무척 제한적이죠. 그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얽히며 이끌어내는 어떤 플러스적인 요인, 즉 상상력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소설을 읽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은 영화보다도 정보가 더 제한적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글, 더 나아가 언어는 세상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정보 손실이 무척 심하죠. 아주 고전적인 연구이긴 하지만, 알버트 메라비안(Albert Mehrabian)이라는 박사가 연구한 결과에 따르자면 우리의 커뮤니케이션 총량에서 "말"이 전달할 수 있는 정보는 7%라고 합니다. 나머지 93%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즉 제스쳐나 분위기, 상황 등에 의해 전달됩니다. 당연합니다. 


생뚱맞게 


"그게 싫다"


라는 텍스트가 떡 하니 있다고 이게 무슨 소리인지 우리가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 외에도 무척 많은 것들이 필요하죠. 이게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일상생활을 하는데 의사소통에 전혀 장애가 없으면서도 글만 쓰면 이상해지는 이유는 나머지 93%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더 최근의 연구에서는 이보다 더 극단적입니다. 뇌과학에 따르자면, 우리 뇌는 초당 약 4테라바이트의 정보를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지만, "말"은 비트 단위의 정보를 전달할 수밖에 없죠. 나머지 정보는 말로 옮기는 순간 모두 사라집니다.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도구가 바로 "말"인 것이죠.  


하지만, 바로 거기에 말의 가능성, 거짓말의 이유, 예술의 창조성이 있습니다.


6화에서 언급했듯이 호모 사피엔스인 우리는 무리를 지어야 이 험난한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도구가 필요했죠. 하지만 언어는 말 그대로 "말"이기 때문에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말"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사용하면 더 정확하게 대상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와 완전히 반대입니다. 말은 디테일할수록 전달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죠. 


예컨대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을 보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시선의 각도는 어떻고, 동공의 크기가 어떠하며 눈썹의 색깔은 어떻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그 눈빛 안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것들을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런 건 해부학이나 관상에서나 쓰일 "말"이지 그보다 더 중요한 우리의 삶에는 그다지 유용한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감정이나 기분 등을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회화의 예를 통해 설명하는 게 더 쉽겠네요. 

바로 구상과 추상의 관계입니다. 


회화에 있어서 구상과 추상의 관계도 "말"의 이런 부분과 비슷한 효과를 이끌어냅니다. 

구분을 하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회화는 크게 구상과 추상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구상具象은 사전적으로 "사물, 특히 예술작품 따위가 직접 경험하거나 지각할 수 있도록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갖춤"이라고 어렵게 쓰이는데, 쉽게 말하자면 갖출 具, 모양 象 이라는 한자 그대로, '모습을 알아 볼 수 있게 제대로 갖춘'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아래의 그림은 완전한 구상미술이죠. 



반면 추상抽象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하는 작용"이라는 사전적 정의가 있습니다. 저는 이 사전적 정의가 무척 잘 되어있다고 봅니다. 다만, "추출"이라는 단어나 "공통된 특성" 등이 의미하는 바를 깊이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죠.

 

어려운 것을 쉽게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예시를 드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던 알타미라 동국 벽화를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익숙한 게 쉬우니까요.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소는 누가 보아도 잘 그렸다고 여길 만큼 디테일하고 실제 소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림을 조금이라도 그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뿔과 다리의 필력에 감탄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피카소는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보곤, 인류가 2만년 동안 조금도 발전하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하였죠. 무척 '사실과 닮게'(물론 이때의 '사실과 닮게'는 연재를 하는 과정에서 계속 변할 예정입니다) 그려진 작품, 즉 구상입니다.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이렇게 특정한 소를 소답게 그리면 됐었습니다. 뿔이 달리고, 털 색깔은 누렇고, 크기는 얼마만 하고, 어쩌고 저쩌고 등등등... 디테일하게 그리면 되었죠. 하지만 이제 곧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게 됩니다.


생활 반경이 넓어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구석기인들의 생활이 동굴을 위주로 수 킬로미터 반경이면 충분 했다면, 농업혁명을 통해 집단이 불어난 신석기 시대의 인류는 그보다 더 넓은 지역이 필요하게 됩니다. 지역이 넓어지면 생물의 종류도 다양해지겠죠. 당연히 소도 다양해집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전에는 소를 그냥 있는 그대로 뿔을 그리고 갈색으로만 표현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죠. 암소도 있을 테고, 송아지도 있을 테고, 누렁소가 아니라 얼룩소나 젖소(는 계량된 품종이라 당시에는 없었겠지만) 비슷한 것도 있었을 겁니다. 이제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설명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신석기 사람들은 이 모든 다양함을 표현하고 전달할 무언가가 필요했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들을 전부 통틀어 "무엇"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공통점""뽑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추상의 사전적 의미인 "여러 가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하는 작용"의 "공통된 특성"과 "추출"이 이것이죠. 


이 과정이 바로 추상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거기에 부를 이름을 부여해야하겠죠? 처음에는 아마 말로 했을 겁니다. 그게 어떤 말인지는 저도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소"나 뭐 그 비슷한 어떤 단어였겠죠. 이젠 그것을 표기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구석기 시대라면 하나하나 디테일을 살린 그림이 되었겠지만, 이제 갈색이 아닌 소도 있습니다.

 

그럼 먼저 "색"이 빠지겠죠? 그런데 황소처럼 큰 소도 있었겠지만 작은 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럼 또 "크기"가 달라집니다. 크기가 꼭 진짜 소 크기와 비슷한 크기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죠. 아마 종례에는 휴대하기 편하게 작아지게 되었을 겁니다. 아래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처럼 말이죠. 



이렇게 하나하나 디테일이 생략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주 단순한 형태로, 즉 추상화된 형태로 표현되게 되죠. 바로 아래의 그림처럼 말입니다.



이런 변화의 과정은 뭘 의미하는 걸까요?

네. 바로 문자의 탄생입니다.


초기의 문자란, 이렇게 고도로 추상화된 그림이었습니다. 이제 알타미라 동굴벽화에 그려진 소 그림에서 "소"라는 문자로 바뀌면 세상의 모든 소가 여기에 포함이 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을 논리학에서는 개념의 내포니 외연이니 하지만, 예술에서는 쉽게 구상과 추상의 관계로 보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고정관념이 조금 바뀌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구상적인 그림을 "잘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해 왔고, 추상은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그림, "지금 나랑 장난하냔"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기꾼 같은 그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추상은 그저 현대미술의 자본논리에 따라 돈놀이 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죠. 마치 앞서 바넷 뉴먼의 그림을 보고 우리가 떠올렸던 생각처럼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방금 위에서 본 문자의 발전 과정을 보면, 오히려 추상적인 그림이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실제로 추상미술은 고도의 사유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다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테크닉적인 그림이 아닐 뿐이죠. 이건 차후에 더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요약하자면, 오히려 추상이 구상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눈빛을 설명하기 위해 시선의 각도가 어떻고, 동공의 크기가 어떻고, 눈썹의 색깔이 어떻고, 블라블라 하는 건 구상적인 표현입니다. 그런 것들을 자세히 묘사하면 묘사할수록 오히려 그 눈빛이 간직한 '무언가'를 놓치게 되죠. 그럼 그 눈빛을 더 강렬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려면, 그의 마음을 최대한 많이 전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추상적 표현이 한 방법입니다. "말"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게 도대체 뭐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건 이미 여러분도 무척 자주 사용하고 있죠. 

바로 은유입니다.           


언어에 있어 추상은 바로 은유, 즉 거짓말이죠. 

 

언어에 있어 추상은 바로 은유(隱喩, metaphor, 본 연재에서는 비유, 직유, 의인 등을 모두 포함)입니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논리학에서의 ‘추상’은 은유가 아니라 일반화, 보편화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지난주 연재에서 설명했던 추상의 개념이 논리학적으로는 더 적절하죠.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논리나 학문이 아니라 예술입니다. 그러니 철학적, 논리학적 개념 정의에서 잠시 벗어나 설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은유는 거짓말입니다.

 

사실을 그대로 말하지 않죠. 예를 들어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은유는 완전한 거짓말입니다. 내 마음(마음이라는 것도 은유지만)은 마음이지 호수가 아니죠. 그냥 호수처럼 넓다거나 고요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 수단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라는 것도 마찬가지죠.

눈은 눈입니다. 


마음도 아니고 창도 아닌데 눈을 마음이니 창이니 말하는 게 거짓말이지 달리 어떤 게 거짓말이겠습니까? 은유는 완전한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언제나 은유를 사용합니다. 

매일 같이 거짓말을 하는 셈이죠. 


도대체 왜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은유-거짓말'을 사용할까요? 

단순합니다. 

그게 아니면 도저히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질로만 이루어진 세계에 살며 그것에 대해서만 말해도 된다면 은유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물만으로, 즉 스마트폰, 컵, 연필, 볼펜, 시계 따위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렇지 못하죠.


애당초 삶이라는 말 자체가 비물질적인 것입니다. 사물들을 모아 놓는다고 삶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삶에는 사물 플러스알파가 있습니다. 모든 사물들을 더한 것에서 어떤 잉여가 더 생기고 나서야 삶이 되는 것이죠. 이 잉여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뭔가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이 플러스알파를 표현하기 위해 “사물을 표현하는 말”과는 “다른 말”을 만들어냈죠. 바로 감정, 느낌, 기분, 사랑, 도덕, 윤리, 진리, 법칙 등등 말이죠. 이것은 사물 외의 단어이며, 우리 삶에는 이런 것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전자보다, 즉 사물보다 사물이 아닌 것들이 더 중요합니다. 스마트폰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말이죠. 아.. 있나요? 요즘은 가끔 사랑보다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간혹 보이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중요한 것들은 사물을 표현하는 말로는 잘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의 크기를 말하기 위해 스마트폰 액정 소자 수를 말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이 두 가지는 엄연히 다른 영역입니다.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한다 해도 무리입니다. 사물적 설명이 디테일해질수록 감정이라든가 느낌, 혹은 분위기는 오히려 더 옅어지게 마련이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좋답시고 "나는 너를 749.72kg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모태솔로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입니다.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을 찾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인간은 이 부분, 즉 사물 외적인 것, 플러스알파적인 것, 어떤 잉여를 표현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 자체가 거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이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그 결과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은유라는 거짓말입니다.


은유는 그 부정확함으로써 정확한(이라고 여겨지는) "말"이 말하지 못하는 부분을 말해줍니다. 바로 부정확함이 만들어내는 효과, 바로 "상상" 때문이죠.


우리는 거짓말을 통해 상상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 말을 그럴싸하게 만듭니다. 앞서의 예처럼 749.72kg만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으니 대신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거죠. 뭔가 뭉뚱그리고 애매모호하게 표현하여 마치 그런 것처럼, 사실은 안 그런데, 혹은 자신조차도 그런지 안 그런지 모르는데 그런 것처럼 말을 꾸며냅니다.


그럴싸하게 말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럴싸하다는 말은 바꿔 말하자면, 사실은 "그렇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그럴싸하다=그렇지는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지 않다”가 아니라 “그렇지는 않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그것으로 끝입니다. 아니다. 외에 다른 의미가 없죠. 이 말은 사고를 거기까지만 끌고 갑니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다”라는 말은 풀어 말해보자면 “그렇지는 않은데 다른 뭔가는 있다”라는 의미죠. 예를 들어 "거울이 아니다"라는 말은 그저 거울임을 부정하는 말일뿐 다른 어떤 의미도 숨어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울은 아니다"라는 말은 '그럼 뭐지?'라는 궁금증, 즉 상상을 촉발하게 되죠. 다른 선택지를 열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다른 뭔가는 있다”라는 게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였으면 그냥 거기서 종료! 이야기의 끝! Good Bye! 가 되겠지만, 다른 뭔가가 있으니까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이고, 기대는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상상하고 오해하는 단계가 오는 것이죠.


예컨대 남자가 “널 보니 라플라스 변환된 미분방정식을 본 것처럼 두근거려”라고 은유를 통해 말을 하니, 여자는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얘가 나를 지금 소풍날 김밥을 본 내 마음처럼 사랑하는구나’라고 오해해버리는 것입니다. 


A(마음)를 B(라플라스 변환된 미분방정식)라고 그럴싸하게 말을 하니, 재미있게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B를 C(소풍날 김밥)라고 생각해 버리는 겁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겁니다. 

남자는 자신도 자신의 A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그것을 정확히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뭉뚱그려 "미분방정식"이라고 그럴싸하게(?) 은유하였고, 여자는 또 그것을 "소풍날 김밥"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애당초 거짓말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빗나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니 거의 모든 경우 빗나가죠. 그래서 "속았다", "변했다"라며 상처 입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그건 각자의 사랑이 달랐었거나 혹은 애당초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더 정확히는 ‘그때 당신이 상상했던 사랑’은 아니었죠. 

그래서 자크 라캉이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말합니다. 


“사랑은 나에게 없는 것을 주는 것”

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우리 마음대로 상상하여 저 사람은 이럴 것이다, 혹은 저럴 것이다, 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곤 자신이 상상한 모습과 사랑에 빠지죠. 하지만 내 상상은 실제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가상이며, 그러므로 그에게는 원래 없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라캉은 “사랑은 나에게 없는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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