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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준 Jan 12. 2018

질문하는 거짓말, 현대 예술

빗나가는 예술


은유가 그러한 것처럼, 예술이라는 거짓말도 "새로움"을 만듭니다.

하지만 시각 예술인 회화나 조각 등의 미술은 언어 예술인 은유와는 조금 다릅니다.

은유는 추상화되긴 했지만 아직도 언어는 언어입니다.

그리고 언어란, 아쉽게도 사피엔스의 원죄와 같은 것이죠. 언어로 인해 사피엔스가 사피엔스가 될 수 있었지만, 대신 언어로 인해 많은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언어는 수많은 문명(文明이라는 말의 文도 “글월 문”이죠)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빼앗아가기도 했습니다.


 

<The Procession of the Trojan Horse in Troy>, 도메니코 티에폴로, 1773


그래서 라캉은 언어를 트로이의 목마에 비유하죠. 선물처럼 다가왔지만, 거기에는 무시무시한 함정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게 된 이후로, 우리는 언어 외에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언어라는 게 무척 유용한 도구이다 보니 이것에 너무 의존하게 된 것이죠. 마치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하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예를 들어 “빨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빨강을 생각하기란 어렵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 문장들도 마찬가지이죠. “‘빨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빨강을 생각하기란 어렵습니다.”라는 것부터 이미 빨강을 “빨강”이라고 설명하고 있죠.


뭔가 무한히 반복되는 모순 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빨강도 다 같은 빨강이 아니죠. 빨갛다, 붉다, 뻘겋다, 벌겋다, 새빨갛다 등등은 모두 느낌이 다릅니다. 수많은 빨강이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수많은 단어가 있죠. 하지만 우리말이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실제의 다양함은 도무지 잡아낼 수가 없습니다.


아래의 두 빨간 하이힐은 전혀 다른 색인데 이 둘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지시하는 이름이 불가능한 것처럼, 우리의 말은 그 흔한 색깔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언어의 한계죠.

아무리 추상화 되고 온갖 곳에 은유를 갖다 대더라도 불가능한 어떤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처럼 물 위에 뜬 달을 길어 올리려는 시도와 같습니다. 아무리 물에 손을 담그고 길어 올려 보려 노력한들, 달이 손 안에 머물 턱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 한들 오늘 점심에 먹은 샌드위치 맛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고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말을 좀 더 잘 쓰기 위해 앞서의 연재에서 설명했던 은유를 사용했습니다. 설명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으니 그 외의 부분은 알아서 상상하라는 식인 것이죠. 물론, 알아서 상상하라는 게 네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은유도 적당한 은유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듯이 커뮤니케이션이 되려면 상상도 일정한 방향이나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해를 하더라도 허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오해하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런 애매모호함을 극도로 싫어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영미 분석철학자들이죠. 분석철학이란, 말 그대로 뭔가를 세밀하게 분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게 철학이니 아무래도 말을 면밀히 분석하겠죠. 이렇게 말을 분석하여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당연히 말을 제대로 쓰자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사람이 특히 그러한데 이 사람은 세상을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해 두고 말할 수 없는 것, 예컨대 앞서의 마음이니 사랑이니 뭐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어차피 제대로 말할 수도 없으니 그냥 닥치고 있자! 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니 당연히 은유를 싫어하겠죠. 그저 오류와 오해만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과는 다르지만, 시각 예술가 중에서도 은유와 다른 방식으로, 즉 전혀 은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철학에서는 이런 걸 현현顯現이라고 어렵게 말하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표현하는 예술가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라는 사람이 있죠.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제대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겁니다.

아무튼 은유는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많은 새로움을 만들어 줄 수 있어서 인류 역사를 통틀어 항상 사용되어 왔습니다. 먼 옛날 신화에서부터 종교, 문학, 예술에서 모두 애용 되었죠.


프랭크 스텔라와 그의 셰이프드 캔버스 방식의 작품


성서원론주의자가 아니고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숨겨진 의미를 찾는 사람들도 성경의 이야기가 은유로 쓰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은유야말로 수많은 의미를 함축 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한계(빗나감)로 그 한계(사실 그대로를 표현하지 못함)를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명백한 한계를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죠. 물에 비친 달을 도무지 길어올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에게는 어떤 선택이 남아있을까요?


간단합니다.

그냥 보여줘 버리는 것이죠.


말로 설명이 안 되니 그냥 냅다 보여줘 버리는 것입니다. 제 예를 들어 보자면, 저는 여기저기서 강의를 많이 합니다. 감사하게도 강의를 따로 홍보하거나 뭐 그러지 않아도 들으셨던 분들 덕분에 꾸역꾸역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강의를 들으셨던 분들이 소문을 내 주셨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수강하신 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셔서, 혹은 친구를 만나서 아무리 강의가 이렇다 저렇다 설명을 해도, 그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당연하겠죠. 그랬으면 굳이 제 강의를 들으러 오실 필요 없이 그 분께서 대신 설명을 해 주면 됩니다. 그런데도 강의를 같이 들으러 오시는 이유는, 그 분께서 아무리 강의가 이렇다 저렇다 설명을 해도 아마 그게 잘 전달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그냥 지인들을 모시고 것이죠.

그냥 그것 자체, 즉 강의를 보여주면 되니까요.


시각 예술의 가장 중요한 효과와 역할 중 하나가 이런 것이죠.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그 고통, 슬픔, 절망, 절규, 환희, 사랑, 열광 등을 그저 보여주는 것입니다. 별다른 설명 없이 예술은 그저 “보라”고 합니다. 그게 가장 빠르니까요.


여기서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분명, 처음 제 강의를 들으셨던 분(A라고 하겠습니다)은 어쨌든 강의로 인해 인사이트가 있었기 때문에 친구에게 추천하고, 심지어 그것으로도 모자라 강의장까지 꾸역꾸역 데리고 왔는데, 막상 친구의 반응이 시원찮은 겁니다. 강의를 들은 A는 막 감동합니다. 강의가 진행되는 시간 동안 격렬하게 반응하고, 감동하고, 충격을 받겠죠. 그러니까 자녀, 남편, 친구 등등 많이들 모시고 온 것이겠고요.


하지만 막상 그 감동을 공유하려는 대상이 시큰둥한 겁니다. 그러자 A는 쉬는 시간마다 재차 물어보죠. “왜 그래? 재미있지 않아? 충격적이지 않아?”라고요. 그럼 손님은 마지못해 대답합니다.

“어, 그래. 재미있네.”

그리곤 그걸로 끝입니다.

그러면 A는 실망합니다.

“왜 이러지?”라고요.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애당초 A에게 좋다고 친구에게도 무조건 좋을 수는 없는 겁니다. 보통은 자신의 심미안을 확신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것이 당연히 좋을 거라고 여겨지지만, 그건 희망사항일 뿐이죠. 관심의 영역이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가 더 중요한데, 전달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말이 그런 것처럼, 강의에서 제가 아무리 이러니 저러니 떠들어도 그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전달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 강의의 주제나 강사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수용자의 입장이나 태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생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A는 자발적으로 왔지만, 손님은 끌려오다시피 한 것일 수도 있죠. 그러니 애당초 출발점이 다른 것입니다.   


이유야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전달이 100%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빗나가는 것이죠.


알기 쉽게 제 경험을 예로 들었지만, 이것은 시각예술 전반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각 예술 역시 커뮤니케이션의 한 과정이기 때문에 그 전달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술 작품을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받아들이게 되죠.


고흐의 그림을 보고 누군가는 감동을 받을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보통,


“이 무식한 놈”


이라고 치부해버리기 쉽지만, 이건 그야말로 월권이자 폭력이죠.


어쩌면 그저 시각이, 감상이, 감정이, 상황이 다른 것일 뿐입니다.

서있는 곳이 다르면 풍경도 달라지는 법이죠.


더구나 이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와 친구, 즉 관람객과 관람객 사이의 커뮤니케이션만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전에 나와 작가와의 커뮤니케이션도 사실은 전혀 제대로 통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떤 그림을 보곤 감탄하고 감동하기도 하지만, 의외로 그건 작가가 의도한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죠.


그러니까, 마치 바로 지난 주 연재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우리 마음대로 상상하여 저 사람은 이럴 것이다, 혹은 저럴 것이다, 라고 판단해버린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상상은 실제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처럼, 작가가 이야기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작가와 관람자와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다른 관람자가 모두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바로 이 지점, 모든 사람이 다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이 지점이 예술의 가장 중요한 효과 중 하나입니다.


예술은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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