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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준 Jan 26. 2018

창조의 창조: 뒤샹의 샘

새로움이 새로워지는 방식

창조의 창조: 뒤샹의 샘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전도서 1:9~10 





자기를 개발하여 자기를 계발하라는 자기계발서를 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부분이 바로 “주도적으로 살아라”라는 말입니다. 웬만한 자기계발서에는 거의 진리처럼 등장하죠. 그런데 그런 대목을 보며 엄청난 고민에 쌓였던 적이 있습니다. 


과연 주도적으로 살라는 말을 듣고 주도적으로 사는 것은 주도적인 것일까아니면 주도적이지 않은 것일까?”

라는 고민이었죠.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 결론은 주도적이지 않다 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더 이상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술에 있어서도 비슷한 고민이 있습니다.

바로 "창의력"에 관한 고민이죠.


예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걸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무엇보다 "새로움", 혹은 "창의력"일 것입니다. 예술이라면, 무언가 새롭고 격정적이고 창조적일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죠.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창의력은 예술뿐만 아니라 교육이나 회사업무 등 일상적인 삶에서도 필요한 질문이죠. 그러다 보니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저에게도 간혹 창의력 강의를 요청하시는 교육 관계자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고민은 한결 같습니다. 


“과연 창의력 수업을 통해 배운 방법대로 생각한다는 것은, 창의적인 것일까? 창의적이지 않은 것일까?

하는 고민이죠.   


꽤 긴 시간동안 고민 했던 것 같습니다. 창의력이란 게 도대체 뭔지, 그 알 수 없는 실체를 가진, 그래서 항상 교육 담당자와 업무 담당자, 학교 선생님, 학원 강사, 학생, 회사원 등등 그 숱한 사람을 괴롭히는 그 빌어먹을 놈의 창의력이라는 게 뭔지, 꽤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창의력에 관한 논문도 많이 읽어 보았고, 책도 보았고, 강의도 들었고, 교수님들께 여쭤보기도 했고, 아무튼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해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곤 결론을 내렸죠. 

역시 모르겠다. 

라고 말이죠. 


그래서 타협하기로 했습니다. 난 창의적인 인간은 아니로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 대학교의 학생 한 명이 인터뷰를 요청해 왔죠. 과목명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무슨 창의력 관련 수업이었던 것 같은데, 창의적인 인물을 조사하여 인터뷰를 하는 게 과제였었나 봅니다. 그래서 우연찮게 제 블로그나 기사, 책 등의 정보를 통해 접했다가 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인터뷰하기에 가장 만만하지 않았었나 싶지만, 어쨌든 뭔가 있어 보이고 잘나 보이는 것을 좋아했던 저로서는 당연히 인터뷰를 하자고 했고. 그게 어쩌다 보니 이렇게 쓰이네요. 그때 제가 답했던 대목을 잠시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Q: 문성준 님은 본인이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창의적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제가 창의적인 사람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창의’라는 것에 대한 개념부터 명확히 하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창의, 혹은 창의적인 것을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드는 것’이나 ‘세상에 없던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 한다면 저는 창의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그 개념을 조금 나이브하게 잡아 ‘흔치 않은 것을 만드는 것’, ‘흔치 않은 생각을 하는 것’ 정도로 잡는다면 다소 창의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맥락으로 말씀을 드리면 ‘창의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대답도 동시에 된다고 봅니다. 다만 조금 더 보태 보자면... 창의적인 사람은 유비적 사고를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유비적 사고는 전근대적인 사고이기도 하지만, 보통 새로움이라는 것도 이러한 유비적 사고의 결과물인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 사이에서 공통적인 것을 보고 그것을 조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죠.    



예전에 했던 인터뷰라 뭔가 엄청나게 어설픕니다. 사실 수정해서 좀 더 멋들어지게 바꿔보고 싶지만,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이라는 생각에 간신히 참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흑역사를 꺼내는 이유는 제 대답 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 사이에서 공통적인 것을 보고 그것을 조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 이라는 부분 때문입니다. 꽤 오래전 인터뷰이지만, 저는 아직도 이 생각을 유효하다고 봅니다. 창의력이라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 하나는 알겠는데, 무언가 전혀 없었던 것을 뿅하니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는 점이죠. 비슷한 말이 성경에도 나옵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전도서 1:9~10)


저는 지독한 무신론자이지만, 성경의 이야기나 잠언 등을 좋아해서 자주 인용하는 편인데, 이 말을 특히 좋아라 합니다. 이건 아마도 제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 능력이 안 되기 때문일 가능성이 꽤 큽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쓸모 있죠.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저와 비슷한 일반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스티브 잡스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나 맡겨 두고 우리는 좀 “가능한 걸”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습니다. 


우리가 새롭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사실은 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그 유명한 발명품들, 새로운 기술들, 대박친 상품들이 대부분 그렇죠. 스마트폰은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연결한 것이고, 삼 색 볼펜은 빨강, 파랑, 검정 볼펜을 연결한 것이고, 지우개 연필은 지우개와 연필은 연결한 것입니다. 완전히 없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도무지 같이 있을 수 없어 보이는 것을 같이 있게 만든 것일 뿐이죠. 


사실은 예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엄청난 명작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새로운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다른 것들을 같은 장소에 가져다 놓은 것일 뿐이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을 정확하게 꼬집어 작품으로 보여줬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이 하는 말을 들어 보도록 하죠. 

바로 이 작품. 

그 유명한 <샘>입니다. 

중학교 미술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작품이죠. 


뒤샹의 <샘>, 사진: 알프래드 스티글리츠


우리는 이 작품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합니다. 

‘와! 아이디어 좋다!’라고요.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뒤샹의 창의력에 감탄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뒤샹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런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두 가지 있는데, 이게 바로 오늘의 주제입니다. 


첫 번째는 이 작품이 만들어졌던 방식입니다. 

미술 작품에는 언제나 누가 만들었다는 “인증”이 필요합니다. 쉬운 말로 서명이 필요한 거죠. 작가의 사인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뒤샹의 <샘>도 어쨌든 작품이니 작가의 사인이 들어가 있습니다. 다만, “Marcel Duchamp”이라는 사인은 아닙니다.


 

이미지 출처: www.autoritratti.org


여기에는 대신 “R.mutt”라는 사인과 작품이 만들어진 해인 1917이라는 숫자가 있죠.


이미지 출처: www.flickr.com


뒤샹은 이 작품을 발표할 때 자신의 본명이 아니라 R.mutt라는 가명으로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말하는데 난데없이 사인을 얘기하는 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작품 그 자체보다도 그 작품이 전시되고 소비되는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우선 R.mutt라는 서명에 담기 이야기를 좀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뒤샹의 전설적인 작품인 <샘>이 처음으로 사람들에게(심사위원들 뿐이긴 했지만) 모습을 드러낸 전시회는 미국 독립 예술가 협회(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의 첫 전시회였습니다. 미국의 독립 예술가 협회는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파리의 앙데팡당(Indépendant)을 대놓고 밴치마킹한 조직이었습니다. 그 형식부터 전시 방식까지 파리의 앙데팡당을 그대로 따라했죠. 


앙데팡당도 모르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요? 아, 그럼 먼저 그것부터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파리의 앙데팡당은 Indépendant 이름 그대로 모든 권력에서 독립 하여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하자는 목적 아래 만들어진 전시회입니다. 그래서 앙데팡당은 심사도 시상식도 없이 소정의 참가비만 내면 일정한 수의 작품을 제출하고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는 전시였죠. 간단하죠? 이름 그대로 독립전입니다.  


미국의 독립 예술가 협회도 이런 앙데팡당을 따라서 누구든지 6달러 만나면 작품 두 점을 제출할 수 있는 전시였고, 뒤샹은 자신의 <샘>을 바로 여기에 출품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가명으로 말이죠. 

왜 그가 굳이 가명을 썼을까요? 그 행위 까지도 <샘>의 목적과 정확히 부합하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한 것이었죠.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뒤샹은 <샘>에 몇 가지 함정을 팝니다. 


가장 먼저, 작품을 심사하는 심사위원이었죠. 사실, 독립전이기 때문에 딱히 심사위원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았었지만, 자신의 작품으로 인한 혼란을 예상 했었는지, 그는 <샘>을 심사하기 위한 인물로 한 사람을 고릅니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죠. 한 마디로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격이었습니다. 자기가 가명으로 작품을 내고 자기가 심사하는 꼴인 것이죠.


이쯤 되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와! 이런 야비한 인간!”이라고 말이죠. 

자기 작품을 자기가 심사한다니,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결과가 뻔한 행위고, 요즘 같았으면 비리와 적폐라고 발칵 뒤집혔을 일입니다. 하지만 뒤샹이 그렇게 뻔한 인물은 아니었죠. 뒤샹은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샘>에 관해 어떤 옹호적인 발언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후에 편지 등을 통해 여러 가지 생각을 밝혔지만, 당시 심사위원의 자격으로서는 어떤 의견도 피력하지 않았죠. 


그는 다만 자신의 작품으로 인해 벌어지는 혼란(작품이 외설적이다, 무례하다, 정신나갔다 등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온갖 논쟁이 벌어지는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샘>이 독립전에서 전시 불가 판정이 내려지는 것까지 묵묵히 지켜보았죠.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예술의 독립성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협회가 자신들의 규칙(6달러만 내면 누구든지 전시할 수 있다는 규칙)까지 깨 가며 뒤샹의 작품에 전시불가 판정을 내린 것이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뒤샹은 가장 먼저 독립 예술가 협회의 위원직을 사임했습니다. 그리곤 <블라인드 맨>이라는 잡지에 논문을 한 편 발표합니다. (재미있게도 이 잡지 역시 그와 친구들이 발간한 잡지입니다) <Richard Mutt의 입장>이라는 제목으로 말이죠. 그는 그 논문에서 말합니다. 


“<샘>은 비도덕적이라는 평가는 불합리하다. ... 그것은 당신이 철물점 쇼윈도에서 매일 볼 수 있는 가구류일 뿐이다. Mutt가 <샘>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느냐 안 만들었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일상생활의 평범한 오브제를 취하여, 그것의 일상적 의미가 사라지도록 배치했다. 그리곤 새로운 제목과 새로운 관점을 통하여 그는 그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 냈다.”   


그리곤 한 자신의 의견을 마지막 한 문장에 정리 합니다. 


“결국 미국이 성취한 유일한 예술 작품은 바로 배관 제품들과 다리뿐이다.”


정리하자면, 미국의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샘> 속에 감추어진 예술성은 보지 못하고, 결국 소변기로서의 물건 밖에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죠. 


그럼 뒤샹은 <샘>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명백합니다. 

창조에 관한 것이죠. 


조금 더 자세히 말한다면, 예술의 창조성에 관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샘>은 말합니다.

“이게 예술이 아니라면, 너희들이 말하는 예술 작품도 마찬가지다.”

라고요. 


뒤샹의 <샘>은 레디메이드, 즉 이미 만들어진 사물-변기을 가져와, 즉 선택하여 다르게 재배치-예술로 만든 작품입니다. 그럼으로써 원래의 사물에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죠. 기성품인 변기에 예술작품으로서의 <샘>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 즉 창조하는 것이죠.


그런데 (뒤샹의 주장에 따르자면) 이건 이제까지의 회화가 해 왔던 것과 전혀 다른 점이 없습니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용하는 물감도 뒤샹이 <샘>을 만들기 위해 사용했던 소변기처럼, 사실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사물인 물감을 가지고 와서 캔버스 위에 색으로 재배치 한 것일 뿐이니까요. 화가들이 직접 재료를 갈고 빻아서 안료를 만들어 기름에 섞어 쓰지 않는 이상은 그들이 사용하는 모든 재료들도 결국에는 기성품일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림은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배치한 것이죠. 그 "특정한" 방식이 사회적으로 다수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뒤샹의 작품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뒤샹의 의견이었습니다.  

다만, 뒤샹은 그것을 소변기로 했을 뿐이고, 화가들은 물감으로 할 뿐입니다. 


이미지 출처: pixabay.com


재료가 다를 뿐, 근본적으로 그 둘이 하는 것은 같다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재미있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뒤샹의 <샘>이 단지 기성품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예술이 아니라면, 기성품인 물감을 가지고 작업한 회화도 예술일 수 없습니다. 


반대로,

회화가 예술이라면, 

<샘>도 예술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뒤샹이 한 일은 간단합니다.


저 위에 떠있는 창조라는 것을, 그럼으로써 뭔가 대단해 보이고 고귀해 보이는 그것을 아래로, 지상으로 가지고 내려온 것입니다. 마치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뒤샹은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합니다.


“소변기에 대해 절충적인 방식으로 몽테뉴, 니체와 레미 드 구르몽을 상기시킨 탁월한 심리학자 루이스 노턴만이 아마 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녀는 그러기 위해서 베르그송에게 구원을 청할 것이다”라고 말이죠. 


쉽게 말해 <샘>의 수수께끼를 풀려면 니체의 철학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저 하늘 위에 떠있는 이데아나 진리나 신을 땅 위로 끌고 내려와 땅 위의 모든 것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 니체처럼, 뜬 구름 위에 있는 “창조”를 아래로 가지고 아래로 내려 온 것이 바로 뒤샹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창조라는 것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일상생활의 평범한 오브제를 취하여그것의 일상적 의미가 사라지도록 배치했다그리곤 새로운 제목과 새로운 관점을 통하여 그는 그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 냈다.”는 뒤샹 자신의 말처럼, 일상적인 것을 일상적이지 않게 만들기, 너무 흔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에 주의를 기울이기, 그래서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가지고 오고,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여 그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창조죠.


아니, 적어도 그런 것이어야 저 같은 평범한 사람도 도무지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는 그 “창조”라는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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