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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준 Jan 19. 2018

질문이 필요한 시간

예술, 새로운 세계로의 안내

7. 질문이 필요한 시간

- 예술, 새로운 세계로의 안내


말이 그러한 것처럼, 예술도 필연적으로 빗나갑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머릿속의 뇌를 들어내서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지 않는 한, 우리의 대화는 항상 빗나갈 수밖에 없죠. 


빗나간다는 것은, 쉽게 말해 내가 말하는 것을 상대가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빗나감은 앞서의 질문과 함께 예술의 무척 큰 기능 중 하나입니다. 바로 이 두 가지가 우리를 사유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유는 우리를 새로운 지점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새로운 세계로의 인도.


이것이 교육이, 그리고 학문이 이르지 못하는 지점에서의 예술이 해야 할 역할이죠.      


그럼 우선, 빗나감과 질문의 관계를 간단하게 설명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예술 작품을 보여드리며 계속 언급할 이야기이므로, 우선은 글을 읽기 위해 도움이 될 정도로만 간단히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빗나감과 질문 사이의 관계는 이미 앞에서 한 차례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것을 명확하게 이 둘 사이의 관계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죠. 아마 "현대 속 근대 교육"편을 연재할 때 말했을 겁니다. 다만 그때는 질문을 하는 '선생'의 입장에서 말을 했다면, 이번에는 그 반대편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사유하는 주체, 즉 교육에서는 학생, 그리고 예술에서는 관람자 말입니다. 


질문은 중요합니다. 앞 선 연재에서 소크라테스를 예로 들어 설명했지만, 질문이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생각을 하게 됩니다. 능동적으로 되는 것이죠. 요컨대 정답을 맞히는 방식의 교육이 기계적(즉 인풋과 아웃풋이 동등한, 혹은 그보다 못한)이고 수동적이라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져 그들 스스로가 고민하고 사유하게 이끄는 것은 유기적이고 능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질문은 무언가를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빙하 속 화석처럼 얼어붙어 옴짝달싹 못하는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질문이죠. 

그런데 빙하에 붙박여 있다가 움직이려면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Barnett Newman Onement VI, 1953

일단 얼음이 깨져야 합니다. 단단한 얼음이 온 몸을 짓누르고 있는 상황에서는 움직이려야 움직일 수가 없죠. 하지만 얼음이 그냥 깨지지는 않습니다. 얼음이 깨지기 위해선 먼저 균열이 생겨야 합니다. 거기에 도끼를 박아 넣든, 폭탄을 설치하든, 어쨌든 조그마한 ""이라도 있어야 얼음은 깨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한 번 균열이 생긴 빙하는 조그마한 힘에도 가차 없이 박살나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의 생각도 이와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살아오며 지층처럼, 습관처럼 쌓인 사고방식은 무척 견고합니다. 이것을 깨는 것은 불가능 할 것처럼만 보이죠. 수 억 년을 쌓아온 빙하처럼, 수 천 년을 지켜온 성벽처럼, 그것은 도무지 깨질 것처럼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맞고, 언제나 완전하고, 완벽하고, 영원할 것처럼만 보입니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오류 없이 흘러가기 때문에 틀렸다거나, 혹은 그럴 수도 있다는 의심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인식과 딱 들어맞고바로 그렇기 때문에 틈이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거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불 속이 편안하고 안전한 것처럼, 이 익숙한 빙하 안은 안전해 보입니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음에도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아주 얄팍한 착각입니다. 사실은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상식이, 우리의 이성이 맞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세상에 적당할 만큼만 적응해 왔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마치, 

사해(死海)처럼,

빈틈없이 고요합니다.   

Inverary Pier, Loch Fyne- Morning, William Turner, 1845


하지만 예술은 빗나갑니다. 

예술은 마치 이 사해의 난파선에서 졸던 새 한 마리가 퍼뜩 위험을 느껴 날아오르는 것처럼, 고요하고 적막한 그 세계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예술은 그렇습니다. 


퍼뜩,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게 만들죠. 

그 빗나감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빗나감이라는 게 뭐고, 어째서 생기는 걸까요? 

 

그것은 다름” 때문입니다

 

예술이라는 것은 예술가가 자신이 본 세상을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술가는 예민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세상을 봅니다. 그러니 그의 세상인 작품이 우리와 딱 들어맞을 턱이 없습니다. 


어딘가 삐딱하고, 건방지고, 오만하며, 혹은 불경스럽죠.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게다가 표현하는 방식도 우리가 무언가를 표현하는 방식과 다르죠. 우리는 보통 "말"을 하지만, 예술가들은 "말"보다 다른 것들이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색이든, 음정이든, 몸짓이든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술 작품은 평범하게, 그러므로 익숙하게 다가올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간혹, 예술 작품을 보곤

"이게 뭐야?"

라고 난처함을 느낌입니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하고,

거기에서 다름을 감지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즉 어떤 틈, 파문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고요한 세계에 돌 하나가 던져진 것이죠. 

마치 이방인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또 다른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일상에 균열을 만들기 시작한 예술은, 그러므로 우리의 인식 자체를 파괴하고, 우리의 공통된 언어를 파괴합니다. 마치 우리를 바벨탑이 무너진 직후 말이 안 통해 우왕좌왕 하는 사람들처럼 만들어 놓죠. 


예술이 작가와 관람객 간의 빗나감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익숙한 약속, "뭐 대강 그렇다 치자"는 착각을 깸으로서, 관람객과 관람객 사이의 당연함, 즉 공통성도 깨버리는 것입니다. 


"뭐 대강 그렇다 치자"는 우리 삶의 윤활유 같은 것입니다. 연인 사이에도, 가족 사이에도,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에도 이 "뭐 대강 그렇다 치자"가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안녕하세요?"라고 누가 인사한다면 안녕하지 않아도 웬만하면 안녕하다고 대답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이죠. 사랑하는 연인사이에도 "사랑해"라고 말하면, "도대체 니가 생각하는 사랑이 뭐니?"라고 물어보는 게 아니라 "나도 사랑해"라고 대답하는 게 바로 이 "뭐 대강 그렇다 치자"입니다.


이건 암묵적인 동의 같은 겁니다. 

너와 내가 같은 것을 보고 있고, 같은 느낌을 공유하고 있으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러므로 대화가 통하고, 우리는 “우리”가 된다는 동의 말이죠. 


우리라는 것은 그 어원이 그렇듯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같음의 공유”라는 울타리 말이죠. 


분명 상대가 말하는 "사랑해"와 내가 생각하는 "사랑해"는 다르겠지만, 그걸 하나하나 꼬치꼬치 캐물으며 따질 순 없으니 "뭐 대강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이 같은 것이라 치자"라는 겁니다. 물론 그러다 보니 나중에 사이가 안 좋아지면 이것 가지고 티격태격 할 수도 있지만요.

 

하지만 예술은 이 "뭐 그냥 대강 그렇다 치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이걸 무척 싫어하죠. 세상을 그냥 대강 그렇게 보려고 하지 않고 시비를 겁니다. 


나는 아닌데?

라고 말이죠. 


나는 너희들과 다른데?

라며 예술은 “우리”와 빗나가 “다름”을 보여줍니다. 


알고 보니 우리가 모두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게 예술입니다. 그럼 “우리”는 그걸 그냥 무시할 방법이 없습니다. 


생각해야죠. 

사유해야 합니다. 


예술로 탄생한 그 틈을 메우든지 갈아 엎든지 뭔가를 해야 합니다. 

예술은 그렇게, 

우리에게 으로, 다름으로, 균열로 다가옵니다. 

그리곤 우리에게서 공통의 언어를 빼앗아갑니다.  


평소라면 비슷하게 생각하고 비슷하게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더 이상은 그럴 수 없게 됩니다. 예술 작품이 공통된 언어를 깨버렸기 때문이죠. 이제 우리는 바로 옆사람과도 같은 작품을 보며 전혀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공통 언어를 상실한 소통의 부재로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제 각자 고유의 언어를 되찾게 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바벨탑의 붕괴가 해방을 가지고 오는 것이죠. 

우리는 이제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점까지 왔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특징이기도 하죠. 


근대가 "닮음"을 기준으로 구성된 사회라면, 이제 현대는 그 닮음이 무너진 "차이"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튀는 옷, 다른 옷을 입었을 때 부끄러워 했다면, 이제는 닮은 옷, 같은 옷을 입었을 때 부끄러워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각자의 언어를 찾아가기 위해, 각자의 옷을 찾아가기 위해 우리는 질문을 해야합니다. 예술이라는 질문을 받고, 다시 질문으로 대답하는,  


질문이 필요한 시간이 도래한 것입니다. 


틈으로 질문이 만들어지고, 질문으로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것이 바로 예술이 하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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