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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준 Feb 02. 2018

제프 쿤스와 어린 왕자: 타자를 마주하는 방법

제프 쿤스와 어린왕자: 타자를 마주하는 방법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 <어린왕자>, 생텍쥐페리

 

제주도 제주시 한립읍 귀덕리 해안도로에 가보면 “바다의 술책”이라는 북카페가 있습니다. 조그만 카페인데다가 제주도 오지(?)에 있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이죠. 요즘 소위 핫한 가게들처럼 SNS로 유명한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난데없이 북카페를, 그것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이 작은 북카페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곳의 커피가 기가 막히게 맛있어서도 아니고, 브런치가 절묘해서도 아닙니다. 이 카페의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는 책들 때문이죠. 바다의 술책이라는 카페의 한 벽면에는, 모두 다른 언어로 쓰인 한 종류의 책이 가득합니다. 바로 <어린왕자>죠. 사장님이 아마도 여행을 좋아 하시는 분이었는지, 그분이 전 세계 각지를 돌며 수집한 어린 왕자의 판본이 카페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이 동화책에는 아주 단순한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라는 진리 말이죠.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이 간단한 진리가 참 어렵습니다. 어쩌면 진리라는 건 간단할수록 지키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수업 시간에 집중하고 예습 복습 잘 하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라는 진리처럼 말이죠. 


그래서 이 단순한 진리를 말한 짧은 동화가 그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도 오랫동안 사랑을 받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갈망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을 알아 가는 과정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 관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를 경험해 보아야 하죠. 가까이 가서 보고, 만지고 접촉하고, 경험해 보아야 그 사람을 조금이나마 더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그 사람을 전부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그렇게 깊고 고고한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강은 아마도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일 것입니다.  

다만, 흐르는 그 강을, 언젠가는 건너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배를 띄우죠. 말이라는 배, 이해라는 배, 사랑이라는 배를 말입니다.  


하지만 가끔, 실수를 하는 날도 있습니다. 우리는 배를 띄우진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팔짱낀 채로 바라보곤, 그것으로 상대를 평가해 버리는 것이죠. 그저 눈에 보이는 것들, 학력, 연봉, 차, 몸무게, 데이터, 수치, 흔히 조건이나 스펙이라고 불리는 것들로 사람을 보고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그게 정확하니까”, “사람은 변해도 돈은 안 변해라고 말이죠. 


그런데 사실 그렇게 사람을 보는 일은, 우선 정확하지도 않지만, 무엇보다 비겁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멀찍이 떨어져서 사람을 보는 것은 쉽죠. 자신에게 위협이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떨어져 있으니 그 사람으로 인해 영향을 받지도 않고, 그러니 당연히 상처를 받지도 않습니다. 마치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거나, 브라운관 너머로 세상을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간혹은 동정심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곧 잊죠. 가끔은 그런 말도 합니다.  

“거봐, 내가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이죠.


그렇게 우리는 멀찍이서, 

봅니다.” 


하지만, “본다”는 행위는 위험에 노출 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지만, 대신 감동도 없죠. 가까이 가지 않으니 냄새도 없고, 가시에 찔리는 일도 없겠지만, 대신 그 사람의 향기도 못 느끼고, 만지질 않으니 따스함도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어쩐지 요즘에 유행하는 뭔가와 비슷하죠? 네. 썸을 탄다고 할 때의 썸도 이와 좀 비슷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그러니 다들 썸은 그만 타고 연애를 합시다. 

아, 썸이라도 타게 해달라고요? 죄송하지만 썸은 셀프입니다. 


아무튼 이것은 그 사람을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도 누군가가 겉모습만 보고 우리를 판단하면,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경험해 봐야 합니다. 그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같이 이야기도 하고, 밥도 먹고, 싸워도 보고, 웃어도 보고, 흔히 말해 부대껴 봐야 합니다.

이에 관한 것도 어린 왕자에 잘 나와 있죠. 



아이들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왔다고 하면 부모님은 “그 애는 나이가 몇이지? 형제들은 몇이나 되고? 몸무게는 얼마지? 그 애 아버지는 얼마나 버니?” 등을 묻습니다. 집에 대해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죠. 어른들에게는 ‘수치’를 말해줘야 합니다. “10만 프랑짜리 집을 봤어요”라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어른들은 “정말 예쁜 집이겠구나!”라고 소리칩니다. 


이게 바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보자면, 친구네 아파트 브랜드는 무엇인지, 임대 아파트인지, 전세인지, 월세인지, 자가인지 따위를 물을 겁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아이는 어떤 학원에 다니고, 반에서 몇 등을 하고, 부모님은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등을 묻겠죠. 


하지만 아이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친구를 사귑니다. 어른들이 친구를 본다면, 아이들은 친구를 경험하죠. 친구가 자신과 얘기할 때면 어떤 표정인지, 웃음소리는 어떤 색인지, 친구는 무슨 놀이를 좋아하는지, 나비를 좋아하는지, 꽃을 좋아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실제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은 친구들을 사귈 때 눈으로 본다기보다 몸을 씁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스킨십이 많죠. 친구를 만지고, 간지럽히고, 잡아당기고, 깨물고, 놀래키죠. 물론 간혹은 못살게 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 아이의 서툰 표현의 방식일 뿐입니다. 이건 비단 친구를 사귈 때만이 아닙니다. 선생님을 알아갈 때도 그렇죠. 종종 영재원이나 초등학교로 강의를 나가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쉬는 시간이면 안겨오기도 하고, 업히기도 하고, 이것저것 만져보기도 합니다. 아니면 조금 소심한 아이들은 주변을 서성거리기도 하죠. 아이들에게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아이들은 알아간다는 생각조차 없겠지만)은 이런 것입니다.   


마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는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아이들은 친구를 자세히, 그리고 오래 경험합니다. 다만 시와 다른 점이라면, 아이들은 본 다기 보다는 경험한다는 점이 다르겠죠.  



<Rabbit>, Jeff Koons, 1986, stainless steel(출처: www.thebroad.org)

제프 쿤스의 <Rabbit>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프 쿤스의 작품을 볼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생각은 “풍선 토끼다”라는 생각입니다. 놀이 공원이나 생일 파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곤 생각합니다. 하다하다 이젠 저런 걸 가져다 놓고 예술 작품이랍시고... 라고요. 


하지만,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법입니다. 

예술도, 제프 쿤스의 “풍선 토끼”도 그렇습니다. 


제프 쿤스의 작품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가까이 가 보아야 하죠. 그리고 그것을 만져 보아야 그의 작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그 비싼 작품을 만져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랬다가 작품에 손상이 가서 덥석 작품을 구매해야 한다면... 대대로 노예 신세를 면치 못하죠. 그러니 그저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 합니다.


그런데 아마 처음 들여다 볼 때는 멀리서 봤을 때와 뭐가 다른지 잘 알 수는 없을 겁니다. 표면을 특별하게 처리한 것도 아니고, 들여다본다고 거기에 오묘한 무늬가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참고 살펴보세요. 자세히 보아야 예쁘죠. 


그의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우리가 멀리서 보고 그것에 대해 내렸던 판단, 즉 “풍선 토끼”라는 판단이 완전히 잘 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제프 쿤스의 작품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눈에 보이듯이 비닐로 만들어진 풍선이 아닙니다. 우리가 <Rabbit> 보고 놀라는 이유, 낯설음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재료인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Rabbit>은 “스틸” 토끼일까요? 스틸 “토끼”일까요?

그 작품의 정체성은 토끼에게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스틸에 있는 것일까요? 


즉, 보이는 것에 있는 것인지, 그것을 이루는 재료 자체에 있는 것인지가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Balloon Rabbit>, 2005-2010, stainless steel with transparent color coating(출처: www.artsy.net)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멀리서 보면 스틸 토끼가 아마 풍선 토끼로 보이는 것처럼, 사람도 멀리서 그저 바라만 보면 제대로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Rabbit>이 사실은 풍선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 사람의 “진짜”는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제가 얼마짜리 연봉을 받는 문성준, 몇 점짜리 학점의 문성준, 몇 CC짜리 자동차를 타는 문성준이 아닌 것처럼, <Rabbit>의 진짜 정체성도 사실은 토끼가 아니라 “스틸”입니다. 그저 멀리서 흘낏 보고 마는 외면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하나하나가 바로 <Rabbit>의 정체성이죠. 제 삶을 이루어 왔던 모든 것이 바로 저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외면적인 모습이나 스펙, 자격 등이 아니라 그 사람을 만드는 재료, 즉 그가 살아오며 경험했던 것들, 그의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진짜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판단할 때 멀리서 바라보곤 성급히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이러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아마,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경험해 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 과정에서 입을 상처와 힘겨움이 두렵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친구를 사귀려면, 여우와 어린왕자처럼, 재프 쿤스의 <Rabbit>을 보는 것처럼, 좀 더 가까이 가 봐야 합니다. 


무슨무슨 인간관계론, 어쩌고저쩌고 처세술 따위의 책으로 습득한 매뉴얼이 아니라, 그를 직접 경험해 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죠. 


예술을 느낄 때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한 사람은, 


그 자체로 무엇보다도 예술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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