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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준 Feb 09. 2018

낯선 감각 다른 너: 아니쉬 카푸어

10. 낯선 감각 다른 너: 아니쉬 카푸어


저는 제 일을 사랑합니다.

제가 하는 일, 즉 예술과 철학에 대해 말하고 쓰는 일 말이죠. 예술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인데, 여기에서 느낌 감동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무척 축복받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이런 일을 할 수 있음에, 이런 일로 먹고살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보고 감탄하고, 그 감동을 나눌 수 있는 일이란 보기 드물게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데 직업병이랄까요? 간혹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웬만하면 예술 작품을 작품만으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죠. 아니, 사실은 대부분 그렇습니다. 어떤 작품을 보게 되면 그 작품에 감탄하기보다는 제가 아는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판단하기 시작하죠. “작품의 구도와 소재와 표현 방식이 어떻기 때문에 이 작품은 이렇다”라고, 평가를 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사실 지난주 연재에서 언급했던, 작품을 “멀리서 보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술 작품을 보고도 감탄하는 경험하는 경우가 무척 드문 일이 되어 가죠.

피렌체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베아트리체 첸치(Beatrice Cenci) 초상화를 보고 무릎의 힘이 풀렸던 스탕달만큼은 아니더라도(그래서 이런 감동을 스탕달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작품에 감탄하며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들여다보며 경험은 이제 무척 희귀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베아트리체 젠치(Beatrice Cenci)의 초상, 귀도 레니


반면, 그래서 그런 작품들을 만나게 되면 더욱 소중해집니다.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작품이 그렇습니다.

그의 작품은 감동적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감동적이라기보다는 충격적이라고 해야겠네요.


<turning the world upside down>, 아니쉬 카푸어, 출처: wikimedia.org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이 주는 충격은 무엇보다 “이상해서”입니다. 그의 작품을 보면, 우리는 가장 먼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감이 안 잡히기 때문입니다.


아, 그런데 오해하면 안 됩니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말이 보통 야한 것을 보았을 때 쓰는 말이기 때문에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도 그럴 거라고 기대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아쉽게도 그의 작품을 말할 때의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그의 작품에는 시선을 놓을 장소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는, 시선을 한 곳에 고정하여 그것을 말 그대로 눈으로 “보고” 그 시각적 정보를 기존의 기억에 끼워 맞추는 작업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죠. 우선, 첫 번째로 눈으로 보기 위해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시각을 한 점에 고정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렇게 시각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에 끼워 맞추어야 하죠.


그런데 아니쉬 카푸어는 첫 번째 작업부터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는 작품의 표면을 특수하게 처리하여 우리의 시각이 한 자리에 머무르지 못하게 만들죠. 상이 맺히질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눈이 그의 작품을 볼 때만 장님이 된다거나 초점이 흐려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눈의 기능은 정상적이죠. 다만 뇌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이미지 출처: www.wanderlustatlanta.com)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하실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잠시 심리학적인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지 심리학의 한 분야인 게슈탈트 심리학(Gestalt psychology)에 따르자면, 인간은 어떤 대상을 개별적 부분의 조합이 아닌 전체로 인식한다고 합니다. 게슈탈트라는 말 자체가 구조, 혹은 형태, 모양이라는 의미의 독일어이죠. 아무튼 게슈탈트 심리학이 주장하는 바를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로 보는 것이지, 눈썹, 속눈썹, 동공, 땀구멍, 점, 콧잔등, 콧볼, 콧구멍, 입술 등등으로 보질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은 그런 부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부분의 조합’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라는, 의미화된 덩어리이죠. 그래서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합 이상”, 플러스알파가 필요합니다.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삶의 의미이고, 가치이죠.

이 플러스알파를 해석하려 했던 많은 철학자, 심리학자, 과학자들이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여기에 명확한 해답을 제시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쩌면 이 플러스알파가 자아 그 자체일 수도 있죠.    


그런데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은 이 플러스알파를 만드는 우리의 인식 능력에 훼방을 놓습니다. 거울처럼 매끈하게 표면을 처리한 그의 작품은 주변의 거의 모든 것을 비추고 있지만, 우리는 그 반영을 단 하나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아왔던 이미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그러져 반영되기 때문이죠. 그의 작품에 반영되는 상(象)은 끊임없이 섞이고, 끊어지고, 비틀리고, 늘어지면서 왜곡됩니다. 그래서 뻔히 눈앞에 보이지만, 심지어 우리 자신의 얼굴조차도 그것이 무엇인지 포착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죠.


“하나의 상”이 하나의 상이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하나”로 패턴화 되어야 하는데, 그의 작품에 비친 상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하나로 보아야 할지 애매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당연한 인식 작용을 깨버리는 것이죠.


이미지 출처: www.novastructura.net
작품에 미친 모습(이미지 출처: www.thewaywardtraveller.com)

이것은 무척 재미있는 효과를 가지고 오게 됩니다.

관객을 귀찮게 만들게 되죠.

작품을 그저 한 번 흘깃 보고 지나가지 못하도록, 작품 안으로 들어와 적극적으로 작품에 개입하고 참여하도록 강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의 연재에서도 여러 번 설명했지만, 당연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여 당연하다는 생각조차 못합니다. 자신의 얼굴을 볼 때도 평소와 같은 얼굴일 때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죠. 하지만 얼굴에 뾰루지가 났다거나 피부가 거칠어졌다거나, 혹은 주름살이 하나 더 늘었을 때에야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더 유심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뭔가 이상하고 달라야 “생각”이라도 하게 되는 것이죠.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이 그런 작품입니다. 그의 작품은 압도적 규모나 특유의 표면 처리로 하여금 우리를 낯선 감각으로 이끌어갑니다.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죠.


관람객에게 낯선 감각을 선사하여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하게 만드는 그의 작업방식은 관객이 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곤 작품과 관람객, 관람객과 공간 사이의 관계를 보다 사색적인 관계로 이끌어 가게 되죠. 새로운 감각적 인식의 과정을 통해 작품과 관객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런 작품 전체의 구성은 우리가 바라보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게 됩니다.


예술이란, 이처럼 마주침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그저 예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우발적이고 우연적으로 낯선 대상을 만나 기존에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깨 주는 것도 예술이죠.


이것은 예술 중에서도 현대 예술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현대 예술은 낯섦을 선사합니다.


아니쉬 카푸어처럼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낯섦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들의 억압을 표현한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의 작품이나 에바 헤세 (Eva Hesse)의 작품처럼 혐오감으로 낯섦을 주기도 하죠.


<femme>(louise bourgeois, 출처: www.artnet.com)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이야 일단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만한 작품들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루이즈 부르주아나 에바 헤세처럼 혐오스러운 예술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렇게 불편한 작품을 만들고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지?”라는 생각 말이죠.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작가들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외면하려고 했던 진실 말이죠. 그들이 보기에 현실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습니다. 여성은 항상 억압받아야 했고, 아이를 낳는 기계여야 했으며, 성적 욕망의 해소 도구여야 했다고, 그들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을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혹은 자신들이 외면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거나 말입니다. 그러니 부르주아나 에바 헤세는 그걸 보여 주는 것입니다.

무시하며 편하게 있지 말고 조금 불편해지더라도 진실을 직면하라는 것이죠.    


이러면 “예술에서까지 굳이 그 불편한 현실을 마주해야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즐겁자고 예술을 하는 거잖아”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삶을 즐겁게 살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인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즐거움 이전에 생존의 문제이죠.

  

그리고 반대로 “예술은 꼭 아름다운 것만 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술이 반드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꼭 아름다운 것만 보여줘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불편한 현실, 그리고 그 현실의 고발, 그것도 예술이죠.

   

둘째는 우리가 너무 무뎌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식은 항상 편한 방식으로만 작동해 왔습니다. 무언가를 알아볼 때, 무언가를 파악하고 이해할 때 사용되는 능력인 “인식”은 감각이 받아들인 것을 이성이(칸트라는 철학자는 이때의 ‘감각’을 감성, ‘이성’을 오성/지성으로 말합니다) 해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하죠.


이 말은 결국 우리가 내가 알고 있는 대로, 해석할 수 있는 대로만 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습관화된 인식능력이 세상을 아주 고요하게 받아들이죠. 마치 단단한 빙하처럼 흔들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잡하고 다양한 세상을 그저 내 방식대로, 내 습관대로 끼워 맞춰버리는 것일 뿐, 여기에는 대상에 대한 어떤 고민도 사유도 없습니다. 그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시 알아보는 것일 뿐이죠.


습관적인 것에, 일상적인 것에, 아름다움에, 당연함에 너무 적응하다 보니 그것이 사실은 전혀 일상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아름다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제가 여기에서 “소중한 것을 잊지 맙시다” 따위의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죠. 당연함은 당연하기 때문에 인식이 되지 않듯이, 우리의 폭력도 너무 당연하게 저질러져 왔기 때문에 인식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정상이라는 말이 있죠. 우리는 “정상”이라는 말로 너무 많은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인간의 범주는 무한하게 넓은데, 70억 명이 있다면, 70억 가지의 인간이 있고, 삶이 있는 것인데, 우리는 그중 일부만을 “정상적 인간”이라고 구분 지어 나머지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놓아버렸습니다. 그리곤 그들에게 “정상적으로 살아”라고 강요하고 있죠. 하지만 여기에는 한 마디가 숨어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나처럼) 정상적으로 살아”라는 말이죠.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무심코 저지르는,

의식 없이 저지르는 폭력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합니다.

낯설어져야 합니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고 불렀던 그것을 벗어나려면 평범하지 않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죠.


어떤 예술 작품들은 우리를 그럴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평범에 잠시 브레이크를 걸어 주죠.


오늘 이야기한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들이 그렇습니다.


현대미술의 주요한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죠.

 

우리를 낯선 감각으로 이끌고 가,

다른 세상을 발견하게 만들고,

그 세상 속에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나와 다른 나를 발견하게 해 줍니다.


그리곤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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