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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준 Feb 16. 2018

시간 새롭게 보기: 베르그송과 히로시 스키모토

시간 새롭게 보기: 베르그송과 히로시 스키모토

    

시간이란 뭘까요?

시간은 사건의 연속일까요?

아니면 사건의 연속과는 별개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무엇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차원일까요?      


철학적으로 보자면, 시간은 인식의 한 장르, 혹은 형식으로써 해석되는 경우가 많고, 물리학적으로 보자면, 마지막 질문에 가깝습니다. 하나의 차원이죠.     

 

이런 시간에 관한 관심은 과학뿐만 아니라, 시, 소설, 만화, 미술, 영화 등 문화적으로도 수많은 작품들의 모티프가 되어 왔습니다. 최근에 국내에서 <콘택트>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영화도 시간에 관한 관점을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냈었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꼭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철학자들도 이에 관해 무척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고민해 왔습니다. 멀게는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에서부터, 가깝게는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이나 훗설(Edmund Husserl, 1859~1938),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것에 대해 고민하고 이야기해 왔죠. 물론, 지금까지도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고요. 그러므로 이 짧은 글에서 시간에 대한 철학적 단상을 깊게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우리의 삶에 쓸모 있을 정도로만 다룰 예정입니다. 사실, 뭐 예술도 철학도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 써먹기 위해 하는 것이니까요. 무엇보다도, 삶이 있고 철학이예술이 있는 것이지, 철학이나 예술이 먼저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시간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줄 수도 있는 이야기를 했던 사람, 즉 베르그송과 그와 비슷한 시간관을 가진 미래주의, 그리고 히로시 스키모토, 이재용 작가의 작품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시간에 대한 철학적 단상     

우리의 실제 생활에 있어서 시간은 한 방향으로, 즉 과거 --> 현재 --> 미래 순으로 흐르는 것, 순간적인 것, 다신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아무리 용을 써봐야 절대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죠.

맞습니다.

타임머신이라도 만들지 않는 한, 우리는 이런 시간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만, 조금 다르게 볼 수는 있죠.      


그리고 세상을 다르게 보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처럼, 시간을 다르게 보면 시간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시간이란 곧 우리의 삶이기 때문에 결국 삶도 달라지죠. 물론 여기에서 다르게 보기라는 말이 그저 일각이 여삼추다 [一刻如三秋]라는 식으로 다르게 해석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철학자들은 그런 개별적 경험을 철학적 논의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적어도 설득력 있는 말이 되어야 하죠.     


철학자라는 존재는, 뭐 그런 거라고 봅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것을,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게 말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단서가 붙습니다. 대신 그럴싸하게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단서죠. 그럴싸해서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비로소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계가 됩니다.    

  

시간을 대하는 철학의 태도도 그렇습니다. 철학은 시간을 그저 "과거, 현재, 미래로 이루어져 있고,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런데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다"라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그럴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더 그럴싸하고 면밀하고 정확하고 자세하게 대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이런 질문을 하는 거죠.


"그럼 현재는 언제부터 언제 까지냐?"라는 질문 말입니다. 이러면 아주 골치가 아파집니다. 현재를 1초라고 말할 수도 없고, 1분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루라고 말할 수도 없죠. 그런데 현재가 있어야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는 법이니 어찌 됐든 현재를 말 하기는 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시간을 철학적으로 말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탄생하게 됩니다.      

바로 "지속"이라는 개념이죠.      


"현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특정 시점을 과거와 미래라고 얘기될 어떤 순간과 구분해야 합니다. 구분을 한다는 것은 곧 다름을 가정하는 것이죠. 이것과 저것이 달라야 구분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다르기 위해서는 “이것”과 “저것”이 있어야 하죠. 한참을 양보해서 “저것”은 둘째 치고라도 “이것”이 있어야 어떤 것과(그게 무엇이든 간에) 다를 수 있죠. 그리고 “이것”이 되기 위해서는 동일성, 즉 같음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같음이 없으면 다름이 없고, 다름이 없으면 같음이 없죠.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정한 순간을 하나의 시간, 같은 시간, 동일한 시간으로 규정해야 합니다. 어떤 순간을 다른 순간들과 분리하기 위해 그 순간을 한 순간으로, 즉 현재로 규정해야 하는 것이죠.      


한 순간, 즉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같은-하나의 시간이다"라고 부를 수 있는 게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철학에서는 그 “같은 시간”을 하나의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이기 때문에 "지속"이라고 부르죠.     


이 지속이 어쩌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현재"입니다. 물론 이 지속의 시간은 모든 사람이 전부 다릅니다. 누군가에게는 한 지속이 하루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한 시간이 될 수도 있죠. 한 사람에게서도 경우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늘은 한 시간을 지속으로 보지만, 내일은 하루를 지속으로 볼 수도 있죠.

그게 얼마이든 간에, 어쨌든 시간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 "지속"이 필요합니다.

     

한 덩어리의 시간이죠.      


그렇게 지속이라는 것을 정하고 나면, 이제 쉬워집니다. 지속이 있는데, 그게 그냥 끝나는 게 아니죠? 시간이 계속 흐르는 것처럼, 지속 다음에도 시간은 계속됩니다. 또 다른 지속이 한 지속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시간을 사유하기 위한 두 번째 요소, "계속"입니다.     

 

지속이 계속되는 것이죠.      


그런데 역시 이것만으로 끝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지금 여기(설날이라 고향인 제주도로 왔습니다)에서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서는 다른 곳에서 동시에 지속을 계속하고 있었겠죠. 이게 세 번째 요소인 "동시성"입니다. 지속이 계속되는데, 그건 한 장소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곳에서 동시에 계속되는 것이죠.      


지속, 계속, 동시성     


바로 이 세 가지가 시간을 사유하기 위해 가장 기본으로 갖추어야 할 개념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시간은 이렇다느니 저렇다느니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지속, 즉 현재가 한 방향으로 지나가고 있고, 그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으며, 사라진다고 보죠. 즉 지나간 지속은 과거, 앞으로 올 지속은 현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조금 다르게 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베르그송이라는 사람이죠.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


베르그송은 과거는 그냥 지나가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가 현재와 공존한다니, 사실 말로 써 놓으면 뭔가 아무것도 아닐 것 같지만, 이건 생각보다 무척 복잡한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예를 통해 설명하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례는 역시 직접 경험한 사례가 가장 좋죠. 제 이야기를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사업체는 조그맣긴 하지만, 직원도 몇 명 있고, 아르바이트생도 몇 명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관리하는 게 아주 주요한 일 중 하나이죠.      


정말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갑니다. 한 달 정도 단기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부터, 일 년 넘게 같이한 친구도 있고, 운명공동체가 된 직원도 있죠. 한 사람 한 사람 정말 소중한 사람이고, 고마운 사람이지만, 아쉽게도 그 모두를 오래, 그리고 깊게 사귈 수는 없습니다. 여기를 발판으로 더 공부하고 더 발전해야 할 사람들을 오래 잡아두고 같이하는 것도 실례죠.


그래서 아쉽게도 제가 처음 입사하는 아르바이트생을 볼 때의 기준은 8,000입니다. 저희 회사에 처음으로 입사하는 아르바이트생의 시급이죠. 제가 첫 만남에서 그들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란,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 앞에서 그들의 현재는 시간당 8,000원으로 환산됩니다. 한 사람을 그렇게 본다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의 폐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업을 운영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조금씩 변해가는 시점이 생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퇴사한 한 친구가 그랬죠. 그 친구, 우선 A라고 해두죠.      


A는 처음 들어올 때부터 무척 말 수가 적은 친구였습니다. 게다가 실수도 많이 했고, 그 실수가 회사 재정에 직결되는 경우도 간혹 있었습니다. 시간당 8,000원이 문제가 아닐 정도였죠. 한 동안은 A를 선택했던 제 판단을 후회하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은 둘이서만 식사를 하게 될 기회가 있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장과 단 둘이서만 식사를 한다는 게 결코 편한 경험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건 사실 저도 마찬가지였죠. 직원들이 사장을 거북해하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사장도 직원과 단 둘이서만 있게 되는 경험이 편하진 않습니다. 참으로 뻘쭘한 상황이 연출되었죠. 게다가 그 친구 스타일로 봐서는 절대로 먼저 입을 열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용하기 가장 좋은 소재는 역시 "꿈"이었죠.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친구의 꿈에 관해 제가 가타부타할 것도 없거니와 그다지 큰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뻘쭘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고, 그래서 어쨌든 언젠가는 지그의 아르바이트를 그만 둘 텐데, 그럼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려고요."

라고 운을 띄우며 시작된 그의 대답은 대화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말이 적고 수줍음을 많이 타던 친구가 자신의 꿈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눈빛이 빛나더니 태도가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자기 앞에 놓인 식사가 고스란히 식어갈 때까지 자신은 어떤 작가를 좋아하며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그걸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째서 집안 사정이 안 좋아져서 휴학을 했고 지금 일을 하고 있는지 등을 쉴 틈 없이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래서 제가 운영하는 사업체에 들어왔다는 말도 덧붙였죠.


간혹 SNS를 통해 글을 쓰기도 하고, 이렇게 브런치를 연재하기도 하고, 책도 내다보니 저는 글쓰기에 관한 강의도 가끔 합니다. 여기저기서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도 종종 있죠. 그런데 그 친구가 우연히 그걸 알게 되었고, 그래서 저희 회사에 와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그래도 뭔가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지원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그 친구에게 제가 특별히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저 간혹 마주치게 되거나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되면, 글은 잘 쓰고 있냐고 물어보거나 간혹 글을 봐달라고 가져오면 보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는 정도뿐이었죠.      


하지만 그 이후로 제가 A를 바라보는 시각은 완전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글을 쓰기 위해 지새왔던 밤들이 있었고,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휴학을 했던 적이 있었고, 재능에 좌절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예전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A를 바라보는 눈에 나 자신의 경험이 투영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의 현재가 A의 현재를 바라보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과거의 제 경험과 기억,

문성준의 과거A의 과거와 만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나와 A의 관계는 단순한 현재와 현재의 만남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현재를 살지만, 그 현재는 단순히 순간의 현재가 아닙니다. 현재라고 인식되는 순간은 사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즉 인식하고 있는 대상이 이제까지 쌓아온 과거의 모든 총체,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나-주체의 모든 총체의 만남이죠.      


나의 전부와 그의 전부가 만나는 것입니다.

베르그송이 바라본 현재란, 이처럼 과거의 모든 응축으로서의 현재, 모든 세계의 반영으로서의 현재입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과거는 그냥 지나가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시간은 측정의 단위가 아니라 경험의 단위라고요.  

   

그러므로 베르그송에 따르자면, 시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과 기억이 모든 순간 속에 잠재되어 있고, 그 순간(지속)이 계속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전체로서의 순간의 모임이 곧 우리 자체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 경험하는 세계의 합이 곧 우리의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히로시 스키모토, 출처: www.vincentborrelli.com

  

일본의 사진작가 히로시 스키모토의 사진은 베르그송의 시간관을 무척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히로시 스키모토의 극장 시리즈는 장노출 촬영을 통해 찍은 사진입니다. 장노출이란, 카메라의 조리개를 긴 시간 동안 열어 둬서 빛이 이미지센서나 필름에 많이 머물게 하는 촬영 기법이죠. 보통 빛이 적은 야간 촬영을 할 때 많이 쓰는 촬영기법입니다. 낮에 장노출 촬영을 하게 되면 빛이 너무 많이 들어와 사진에 잔상이 많이 남거나 완전히 하얗게 변해 버리게 됩니다. 히로시 스키모토는 그런 장노출 촬영으로 영화가 상영되는 스크린을 찍었죠. 그렇기 때문에 스크린에 상영되는 장면이 긴 시간 동안 필름에 맺혀 완전히 하얗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장노출 촬영을 통해 만들어지는 그의 사진은 분명 눈앞에 있는 극장의 현재를 찍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에는 영화의 시작과 끝, 즉 순간 너머의 시간을 보여주고 있죠. 현재라는 순간에 구속될 수밖에 없는 사진이, 역설적이게도 현재의 경계를 넘어 그 안에 모든 과거를 함축하는 것입니다.    


       

<줄에 묶인 개의 역동성>, 움베르토 보치오니, 1912년


미래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움베르토 보치오니의 <줄에 묶인 개의 역동성>처럼, 그들의 그림은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장면에서 시간은 순간이 아닙니다. 개의 움직임, 변화, 시간의 과거와 현재가 모두 한 장면에 들어 있는 것이죠.


장 밥티스트 레뇨(Jean-Baptiste Regnault)의 <회화의 기원>은 길을 떠나려는 연인의 그림자를 따라 그리며 그를 기억 속에 잡아두려는 것에서, 즉 시간 속에서 순간을 들어내 고정시키기 위해 회화가 시작했다고 말하는 작품이지만, 미래주의 화가의 작품들은 그 반대입니다. 그들의 작품은 오히려 한 장면에 시간을 응축합니다. 그래서 한 장면-현재에 과거가 응축되어 들어가 있죠.     


<회화의 기원>, 장 밥티스트 레뇨, 1785년

물론, 미래주의자들이 추구했던 미적 이상은 제 해석과는 별개입니다. 그들은 무척 혁신적이었지만, 동시에 파쇼적이었고, 정치적이었죠. 니체와 베르그송의 사상에 모두 영향을 받았던 그들의 미래주의 선언은 지금 보기에 약간 과도한 감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한 게 사실입니다. 다만, 저는 그들의 그림과, 히로시 스키모토의 작품으로 시간을 새롭게 보는 방법, 그럼으로써 한 사람을 새롭게 보는 방법을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저 순간의 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보는 방법 말이죠.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의 현재, 그의 순간뿐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역사가 나의 모든 역사와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죠.

 

그만큼, 한 사람은 소중하고 거대한 존재입니다.


(제한된 분량의 관계로 히로시 스키모토, 미래주의, 이재용 작가의 작품 설명은 4월에 출간될 책에서 더욱 자세히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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