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52번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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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52번 손님"
큰 마트 안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흔히 들리는 호명이다. 직원들은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으로 주문한 손님을 부른다. 물론, 위트 있는 닉네임을 미리 설정해 둔 손님이라면 원하는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다.
궁금한 이는 없겠지만, 나의 호명음은 나의 이름이다.
그저 "날 불러다오"라는 단순한 의미 외에는 담겨 있지 않은 호명.
오늘도 나는 내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며 커피를 시켰다. 후식으로 마실 생각으로.
직원에게 성가시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픽업 테이블에서 다섯 걸음쯤 떨어진 곳에 반듯하게 서서 기다렸다. 눈은 무의식적으로 일하는 직원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불리는
"A- 52번 손님"
내 눈은 자연스레 내 앞에서 주문을 한 젊은 아가씨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녀는 벌써 호명이 두번이나 되고 세번째 들리고 있는 사이에도 자신이 불려지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살짝 급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날 의식하기 전에 눈을 거두었다. 다행히 그녀는 황급히 일어나 자신의 주문음료를 찾아서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내 커피를 들고 그 커피숖에서 하나 밖에 남지 않은 테이블인 그녀 옆 테이블에 앉았다.
주섬주섬이라는 흔한 의태어를 흉내내며 어제 도서관에서 충동적으로 빌린 얇은 소설책을 꺼냈다. 내가 이렇게 소설을 읽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는 약간의 반성과 함께.
옆에 앉은 그녀는 위층 다있는 몰에서 샀는지 작은 포장지를 조심히 벗기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포장지를 벗기더니, 가벼운 플라스틱 조립식 핸드폰 거치대를 꺼냈다. 어느정도 마음에 들었는지 흐믓한 손짓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내 눈은 작은 소설책으로 .... 얼른 읽고 마음의 무게를 덜어낼 일을 해야지 하는 급함이 몰려왔다.
그때였다.
옆에 앉은 그녀는 핸드폰 거치대에 핸드폰을 올려두고, 통화를 시작했다. 손으로.
아… 잠깐.
조금 전, 빨리 주문한 음료를 받아가길 바라며 쏟아부었던 내 성급한 눈빛들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곧, 나 자신에게 또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내가 감히 누구를 불쌍히 여긴다는 거지?
그녀는 나보다 더 능력이 뛰어날 수도, 나보다 더 예리한 눈을 가졌을 수도, 나보다 더 행복할 수도 있는 사람. 단지 수어로 대화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잠시라도 그녀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부끄러웠다. 손톱만큼이라도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게 말이다. 여기선 그냥 아까 늦게 가져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았다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눈은 다시 내 소설책으로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코너 벽 자리의 손님이 짐을 챙겨 카페를 나서고 있는 걸 보곤 난 메뚜기처럼 자리를 옮겼다. 구석 벽에 붙어 모든 사람이 다 보이는 맨 끝자리로.
소설책을 한 3분의 1쯤 읽었을거다.
그때, 정신없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한 중년 남성이 마치 카페 직원이라도 된 것처럼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의 일행이 “뭘 시킬 거야?” 라고 묻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면, 이 카페의 사장인가 싶었을거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짐을 챙겨 내 옆자리로 자리를 옮기려던 아까 내 옆자리 그녀. 하지만 중년 남성이 이미 그녀가 가려고 했던 목적지인 테이블을 옮겨버렸다. 어느새 그 자리는 텅 빈 공간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당황한 듯 그 빈자리와 남성을 번갈아 바라봤고, 이윽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녀는 말없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중년 남성은 정중하지만 정중하지 않은, “왜?” 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할 말이 있었겠지만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난 그 이유를 알았고, 그 중년 남성은 끝까지 모른채 카페에서 나가는 걸 나는 보았다.
어쨌든 그 순간, 그들은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남성은 다시 정신없이 테이블과 의자를 옮기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공간을 재배치하는 듯했다. 심지어 내 테이블에 속해 있던 의자마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옆으로 밀어냈다. 최선을 다해, 오로지 자기 일행과 자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옮기려던 자리를 잃어버린 그녀는 잠시 서서 고민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하는 고민이 눈으로 들려왔다.
결국, 별다른 선택지도 없이 원래 앉아 있던 테이블로 돌아갔다. 맞은편 의자마저 사라진 자리로.
"A-78번 손님."
또다시 낯선 호명이 카페 안을 울렸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고, 나는 책장을 넘기며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년 남성은 드디어 더 이상 테이블을 옮기지 않았다.
모두가 다시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갔다.
작은 소란은 사라지고, 다시 일상이 흘러갔다.
그리고 우리는, 조용히.
눈으로, 그리고 대화 속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