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문자처럼 보이는 긴 메시지에 마음이 허탈해질 때가 있다.
마음이 담긴 짧은 메시지를 보내고, 그로부터 긴 기다림 끝에 받은 답이지만, 받아 든 순간부터 내게 보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해 미리 준비된, 편집 가능한 공손함으로 작성된 듯한 느낌이 든다.
작가 생활을 하며 나는 종종 이런 답장에 마주하곤 한다. 단체 전시, 공동 작업, 출판 과정 등 예술과 창작의 세계에서 늘 접해야 하는 수많은 인연들 사이에서 우리는 자주 ‘정중한 공통어’를 사용한다. 이 정중한 공통어는 겉으로는 충분히 따뜻하고 예의 바르지만, 읽고 나면 묘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아무리 가까워지려 해도 완벽히 가까워질 수 없는 유리벽과 같다.
얼마 전 참여했던 단체 전시가 끝난 후, 나는 전시의 큐레이터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진심을 다해 “짧지만 따뜻하고 인상 깊은 전시였다”고, “세심한 기획 덕분에 좋은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약간의 실망감과 동시에, 내가 보낸 이 메시지가 어쩌면 너무 나만의 감정에 취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마침내 돌아온 답장에는 정중함이 넘쳤다. 그러나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그것이 나 개인을 향한 말이 아니라, 모두에게 전달되는 일괄적 감사 메시지였음을 직감했다. 구체적으로 “작가님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이 담겨 있었고, 공간의 한계를 언급하며 함께해준 모든 작가들에게 감사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의 정중함 속에는 내가 기대했던, 나라는 존재에 대한 특별한 이해와 관심은 없었다.
단체 문자는 늘 받는 이를 어딘가 허탈하게 만든다. 나는 왜 이것이 이토록 마음을 허탈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내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내가 당신을 봅니다’라는 조용한 인정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다수가 참여한 전시의 구조상, 기획자는 모든 참여자를 하나씩 개별적으로 바라보는 대신, ‘우리 모두’를 바라보아야 했고, 나는 ‘우리 모두’의 일부로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었다.
사실 작가라는 위치에서 자주 느끼게 되는 외로움도 비슷하다. 개인의 이름으로 글을 쓰고,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작가는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 되곤 한다. 작가들은 때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를 향한 관심보다는 스스로를 더 뚜렷이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들 사이에서 정작 우리는 서로를 잘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늘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기로 결심한다. 비록 단체 문자처럼 무심하게 느껴질지라도,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정중함에 상처받기보다는, 나 또한 언제나 정중함으로 응답하기로 한다. 그것이 결국 나를 보호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나만의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언제까지 이 정중함 속에 숨을 수 있을까. 언제쯤 이 유리벽 너머로 건너갈 수 있을까. 언제쯤 단체 문자 속의 나를 개별자로 바라봐 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이 허탈감도 결국 지나갈 것이다. 또 다른 메시지가 오면 나는 다시 품위 있게 답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고, 앞으로도 살아갈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쯤은 기억하고 싶다. 우리가 보내는 정중함 속에서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심이 오가는 순간들이 반드시 있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정중한 공통어를 사용하지만, 그 안에 나의 진심이 지워지지 않기를 바란다. 허탈한 마음 끝에도, 나의 진심이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