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내 부탁을 들어줄 기회를 줄께요

by 신서윤

“내가 당신에게 부탁을 하는 건, 당신에게 내 부탁을 들어줄 기회를 주는 거예요.”


부탁하는 걸 늘 실례라고만 생각하던 내게, 어느 독서모임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런 생각도 해요.”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맞다거나 틀리다고 바로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시선이라는 건 분명했다.


비슷한 시기, 심리 상담 중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부탁을 받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부탁에 치여 살고, 거절을 결심하기까지 늘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든다고. 상담사는 잠시 듣더니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지 않나요?”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부탁을 어려워했고, 부탁하는 건 늘 실례라고 배워왔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예의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독서모임에서 들었던 그 말이 떠올랐다.

부탁은 실례가 아니라, 상대에게 ‘기회’를 주는 일이라는 생각.


아,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그 순간, 그동안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장면들이 하나씩 다시 떠올랐다.

‘부탁’이라는 이름으로 열 번쯤은 아무 말 없이 들어주고, 겨우 한 번 어렵게 거절했을 때 돌아오던 말,

“실망이야.”

왜 그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왔을까. 그동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고방식을 대입해보니 어렴풋이 설명이 되기도 했다. 내가 너한테 기회를 주는데.

이 사람을 만날 기회,

이 일을 해볼 기회를 주는데.
그걸 거절하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그들에게 나는 ‘거절한 사람’이 아니라 ‘기회를 걷어찬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상처가 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그 ‘실망’이라는 단어를 마음으로까지 이해하지는 못한다.


다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왜 그렇게 부탁을 어려워했고, 왜 늘 부탁받는 쪽에만 머물러 있었는지.

부탁을 ‘부담’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부탁을 ‘기회’로 믿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 인식의 차이 속에서 나는 수많은 부탁에 둘러싸여 조금씩 나 자신을 소모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당당했을지도 모르겠다.


부탁을 하고도 미안해하지 않고, 거절당하면 오히려 실망했다고 말하던 태도들. 그 기회를 거절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실망스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안다. 부탁을 거절하는 일이 무례함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부탁을 하지 않는 삶이 항상 건강한 선택은 아니라는 것도. 아직도 나는 부탁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 말의 출처를 안 채로 다시 생각해볼 수는 있게 되었다.

부탁은, 누군가에게는 실례이고 누군가에게는 기회라는 사실을.


하루가 걸린 자리: “내가 당신에게 부탁을 하는 건, 당신에게 내 부탁을 들어줄 기회를 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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