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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Yhoon Jan 06. 2021

무라카미 하루키의 8과 1/2

기사단장 죽이기 | 騎士團長殺, 2017


스무 살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처음 접했다.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이 시작이었고 당시에는 『상실의 시대』라는 한제를 달고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다소 민망하지만 격동의 80년대를 지나 세기말 90년대에 도착한 대한민국에 어울리는 작명이긴 했다. 이후 그의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태엽 감는 새 연대기』까지 발표된 모든 장편 소설을 섭렵했다. 단편소설집과 에세이집도 빼먹지 않았다. 내 또래 X세대들은 전공 서적보다 하루키의 소설과 왕가위의 영화에 더 빠져있던 시절이니 딱히 특별한 기억은 아니다. 발간과 함께 동시대에 읽기 시작한 첫 작품이 『스푸트니크의 연인』(1999). 그래서인지 작품의 완성도나 사이즈에 비해 개인적인 기억이 많은 소설이다. 그리고 Y2K를 농담으로 스치며 뉴밀레니엄이 되었다.


내가 변한 건지 하루키의 소설이 변한 건지 2000년대 초반의 장편들은 잘 읽히지 않았다. 『해변의 카프카』(2002)도, 『어둠의 저편』(2004)도 별 인상을 남기지 않았고, 소설보다 그의 에세이집들을 열심히 읽은 기간이다. 그리고 『1Q84』(2009)가 발표되었다. 3권이 나오길 기다렸다 이듬해에 천천히 읽었다. 지금까지 읽은 하루키의 장편 중 나의 페이버릿은 이 작품이다. 후속작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2013)도 좋았고,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2014)은 그의 단편소설집 중 나의 페이버릿이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녹색 짐승'과 '토니 다키타니'가 실린 『렉싱턴의 유령』(1996)이었고.)


2Q20년 12월 31일에 『기사단장 죽이기』 읽기를 마쳤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이 연출한 '영화에 관한 영화'이자 자전적인 작품 <8과 1/2>(1963)이 떠오르는 소설이다. 노년의 하루키가 이야기로 풀어놓은 '소설(예술)에 관한 소설'이랄까. 현현하는(명백하게 나타나거나 나타내다) 이데아와 전이하는(자리나 위치 따위를 다른 곳으로 옮기다) 메타포라는 1,2부의 제목부터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둘러싼 미스터리와 판타지까지, 창작과 삶에 대한 수수께끼를 언제나 그렇듯이 모호하지만 정확하게 짚어준다.    



그의 새로운 단편집 『일인칭 단수』(2020) 발간되었다. 올봄에 차근히 읽어볼 생각이다. 날씨와 독서가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왠지 추위가 조금 수그러들고 손에    들고 다니기 좋은 계절에 읽고 싶다. 『기사단장 죽이기』 2부에 책 모서리를 살짝 접어두었던 페이지가 아래이다. 커피 마시며 클리퍼드 브라운의 50년대 연주와 밥 딜런의 60~70년대 음반 듣기를 즐기는 나에겐 선물 같은 문장들이다. 단편집에는 이런 글들이 일인칭 복수로 넘치길 기대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수업 시작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여느 때처럼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마셨다. 스타벅스처럼 밝고 기능적인 가게가 아니라 초로의 주인 혼자 오래전부터 꾸려온 골목길의 커피숍이다. 진하고 새카만 커피를 묵직한 잔에 내준다. 오래된 스피커에서 오래된 재즈가 흐른다. 빌리 홀리데이나 클리퍼드 브라운 같은. 그 뒤에는 상점가를 어슬렁거리다가 커피 여과지가 떨어져 간다는 게 생각나서 샀다. 중고 레코드를 파는 가게를 발견하고 들어가 오래된 LP를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생각해보니 꽤 오랫동안 클래식만 듣고 지냈다. 아마다 도모히코의 레코드장에는 클래식 음반뿐이었기 때문이다. 라디오도 AM 방송 뉴스와 일기예보 말고 다른 프로그램은 전혀 듣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CD와 LP는-대단한 수는 아니지만- 히로오의 아파트에 전부 두고 왔다. 책이건 음반이건 내 물건과 유즈의 물건을 하나하나 가르기가 성가셨기 때문이다. 그냥 귀찮기만 한 것이 아니라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이를테면 밥 딜런의 <내슈빌 스카이라인>이나, <앨라배마 송>이 수록된 도어스의 앨범은 대체 누구 것으로 쳐야 할까? 누가 사 왔는지 따지는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일정 기간 같은 음악을 공유하고, 함께 들으면서 일상을 보낸 것이다. 물건을 나눠 가질 수는 있어도 그에 따른 기억을 나눠 가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전부 놔두고 오는 수밖에. 그 레코드 가게에서 <내슈빌 스카이라인>과 도어스의 첫 앨범을 찾아봤지만 둘 다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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