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면 장면이 모이면 일기가 된다.
어쩌다 가버리는 하루
“아, 오늘은 정말 하는 것 없이 하루가 가버렸구나.”
하루의 끝에 하루를 돌아볼 때, 탄식하듯 말하는 습관의 연속이었던 대부분의 날들.
무척이나 바쁜 나날 속에서도 여전히 허튼 생각을 하면서 보내는 시간은 존재했고, 막상 한가한 날들이 오면 무언가에 열중하고 싶은 의욕이 나지 않는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생산적인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의미일까 온전히 나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의미일까.
어찌 되었든 나의 하루는 ‘의미’가 필요했다.
매일이‘의미’ 있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매일을‘의미’ 없이 보내고 싶지는 않아.
내버려 두기만 하면 시간은‘흐르기’ 마련이고 하루는‘가’ 버리기 마련이기에, 그 하루를 단 한 순간이라도 붙잡아 보는 건 어떨까. 어차피 ‘소진’ 돼 버릴 하루라면 아주 잠시라도 소중히 여기자.
오늘은 오늘만 지나면 끝이니까.
이왕이면 소중히 여기고 단 한 컷이라도 기억해 두자.라고 생각했던 어느 날, 데일리 드로잉이 시작되었다.
‘일상’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시간을 나누는 방법은 사람들 마다 다르기에 아마 일상을 말하는 주기도 다를 것이다. 오전과 오후, 근무 중과 퇴근 후, 오늘과 내일, 주말과 주중, 한 주, 매 달, 분기, 일 년, 그리고 매일.
나는 매‘일’이라는 주기를 사용한다.
일상을 이야기하려면 매일매일이 필요해.
어쩌다 훌쩍 지나가서 하루쯤 기억이 몽땅 사라져도 상관없을 그런 하루 말고,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남겨두어서 오늘의 내가 조금씩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말하려면.
그래서 시작하게 되었다. 매일 그림 그리는 일.
매일은 매일 있다.
어쩌다 1일 1 그림
사소한 매일의 낙서들을 일종의 ‘일상에 의미 붓기’이다.
거대한 이벤트가 없는 심심한 일상에서 의미 붓기는 이렇게 간단해. 이로써 나는 오늘 하루를 온전히 기억할 순 없어도 지금 이 장면을 그렸던 순간의 장면만큼은 기억해 낼 수 있게 되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 재미를 느끼며 하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도 꽤 재미있어 보였나 보다.
주변 사람들이 종종 묻곤 한다.
“그림을 좀 그려보고 싶은데 시작할 엄두가 않나.”
“데일리 드로잉을 하려면 뭐부터 어떻게 시작해?”
이런 질문을 들을 때면 “지금 책상 위에 있는 물건 하나를 그리면서 시작해요.”라고 대답한다.
내가 자주 접하는 일상의 단면, 그것은 바로 내 앞에 있는 물건일 테니, 그 무엇보다 내가 자주 사용하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눈앞에 있는 것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고. 익숙한 나의 것을 새삼스럽게 관찰하다 보면 모든 일상을 다시 관찰하게 될 것이라고.
그럼 또 묻는다.
“나는 그림을 잘 못 그리는데 ”
그럼 또 대답하는 거다.
“세상엔‘잘’ 그리는 사람이나‘못’ 그리는 사람은 많아요. 그런데 이건 그냥 ‘내’ 그림이잖아요. 그래서 괜찮아요.
약간의 애정과 시간을 들이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시작해 보세요.라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하는 가장 흔한 대답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본 것을 제법 똑같이 따라 그릴 줄 안다는 의미의 ‘잘’ 그린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지만, 그림을 조금만 그려보면 얼마만큼 확실한 내‘스타일’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구현하고 있는가의 ‘잘’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림이든 아니든, 자신만의 무엇을 갖는다는 것. 그 점이 중요한 것 같다.
‘지금 그리고 있는 이 순간의 장면’
이 주제를 벗어나지 않았기에 주로 자주 가는 카페, 음식점, 공원, 여행지 등등 장소는 여러 곳으로 바뀌며 그림의 소재는 무궁무진했다. 그렇게 4년의 드로잉은 그동안 어느 곳에 있었는지를 남기는 발자취가 되고, 그 발자취는 그곳에 가기 전 후 무엇을 했었는지를 설명하는 일상이 되고, 일상이 모여 일기가 되었다.
2016년부터 데일리 드로잉, 공간 드로잉, 카페 드로잉, 여행 드로잉 등의 이름으로 그림을 그려온 5년의 시간.
계절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바뀌는 건 장소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새 입버릇처럼,
“오늘은 아직 그림을 그리지 못했어!”
“오늘은 여길 그려야겠어!”라며 일상과 그림을 일치화 시키는 경지에 이르렀다.
처음에 샀던 스케치북은 단순한 낙서들의 모음으로 나중에는 그림일기가 된 이 낙서장은 개인 SNS를 시작하게 되면서 매일 자정을 기준으로 하루를 매듭짓는 공간으로 활용하여 업로드하게 되었다. 스케치북에 날짜를 수기로 적어두는 것보다 업로드된 일자가 더 정확한 날짜로 기록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기는 일상을 기록하기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종의 의식이자 일과가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이 행위가 직업이나 일이 아니라 온전히 개인 취미였기 때문이다.
취미를 그만둔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때 신경 쓰는 사람도 오로지 자신뿐이다.
이것은 온전한 자유를 뜻하며 오히려 그러한 점이 자신에게 큰 원동력이 된다.
모든 취미활동이 그렇듯, 취미활동은 에너지를 소비하며 ‘활동’하고 있지만 오히려 휴식을 준다.
확실히 노동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리고 대가로 돈을 받기보다 더 나은 취미활동을 독려하는 ‘장비’ 구입으로 인해 돈을 지불하고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림 그리는 일은 노동이 아니라 쉬어가는 시간이었고 하루를 추모하고 힐링하는 시간이었기에, 하루를 보내며 반복되는 일상에 체하지 않으려고 그림을 그린다.
“하루가 끝나가, 이제 소화제를 먹어야지!”
다음 음식, 그러니까 내일을 맞이하려면 오늘은 정리해두자.
혹시 그날 언짢은 일이 있거나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림을 그릴 때면 펜 끝에만 집중할 수 있는 그 고요한 정적이 좋아. 때때로 펜 끝에서 나는 사각 거리는 소리가 매우 유쾌하게 마음의 위로와 안정을 가져다 줄 때도 있어. 오늘을 기록해. 내가 어떤 일상을 지내왔고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일상을 꿈꿨는지도 함께 기록해.
때문에 나는 이 취미의 장점을 묻는 사람들에게 곧잘 이렇게 말한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아무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내 시야에 들어오는 공간과 공간을 따라가는 펜 선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아.”
누구나 다 하루를 보내지만, 어떻게 보내고 기억하는지는 결국 나의 선택. 나는 펜 끝으로 흘러나오는 선으로 하루를 보내고 선이 연결한 공간으로 기억한다. 때문에 매일 그림을 그리는 일의 횟수가 언젠가는 줄어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통과의례처럼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바라건대, 이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더없는 기쁨이 될 것이며, 내게도 오래도록 곁에 남는 취미 생활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