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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 A MI Dec 01. 2020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을 그립니다.

1일 1 그림,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날도 그립니다.

넌 그림 그린다고 맨날 밖에 나가겠네?
이불을 몸에 돌돌 말고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던 어느 날의 기록


어느 날 집순이 친구가 물었다.

"넌 진짜 많이 돌아다니는 것 같아"

"아닌데, 그냥 회사-집의 반복이야."

"그림 그린다고 맨날 어디 가지 않아?"

"집에 가는 길에 카페 들리는 정도지 뭐. 그것마저도 안 하고 아무 데도 안 가는 날도 많아."


그림 그리려고 밖에 나가는 게 아니라, 그냥 하루의 부분을 그리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날에는 집에서 그림일기 그리듯 끄적거리지.


텅 빈  인간의 '멍'한 하루
정말 아무것도 안 한 하루 요약


"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격렬하게 더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


농담처럼 자주 쓰이는 이 말, 때때로 누구나 경험하는 문장일 것이다. 그런 날이 찾아온다. 일전에는 이런 모습을 때때로 무기력이나 게으름쯤으로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다 보니 문득 이런 순간이 찾아왔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번아웃 인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오롯이 침대에 누워있다가 문득, 머리가 뻥 뚫려있는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 문득 어린 시절에 만들었던 캐릭터 '텅 빈 인간'이 떠올랐다. 그 시절 역시도 치열하게 살았음에도 한편으론 모든 것이 '의미 없다'라고 느껴져 허망함의 상징으로 만든 거였는데, 오랜만에 이 캐릭터가 떠오른 하로는 허망이 아닌, 멍함을 느끼면서였다.


"뭐, 가끔은 이래도 되지 않나, 늘 이런 것도 아니고"


'당 떨어졌어 단 게 땡겨' 라던가 '매운 거 먹어야겠어'라고 하는 것처럼 몸이 필요로 하는 것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라고, 그러니까 이런 멍함과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도 몸이 필요로 하는 거라고 합리화시켜보지만, 스스로에게 조차 잘 설득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직 사회화가 진행 중인 어른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곧 도태됨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휴식날에는 철저하게 쉬려고 하는 편이다. 그런 날에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림이 내게 휴식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콕의 순간
소처럼 순간의 '장면'을 그릴 때도 있지만, '나열'식 그림을 그릴 때도 있다

집콕의 순간은 당연히 약속이 없어서 일어났을 일일 테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약속이 있는 날에도 잘 놀고 돌아와서 집에서 되새김질하듯이 그날 있었던 일들을 그리기도 하니까. 비슷한 맥락에서 야근을 하고 돌아온 뒤에 그리는 경우도 있다.


집콕의 순간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건 날씨이다. 그날 한파라서, 내내 장마여서, 너무 더워서, 나른해서 등의 날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


배탈이 자주 나고 피곤이 눈으로 오는 타입이라 자주 아프기도 한다. 그런 날은 당연한 듯 집에서 쉬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일상들을 담아내기도 한다. 때때로 만화책을 잔뜩 쌓아놓고 완독을 하거나, 이불을 말고 동영상들을 보면서 과자를 부스럭 거리는 완벽한 집순이가 되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은 야근에 지쳐 무거웠던 발걸음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일터에서의 장면을 담아 집 앞에 도달하기 10cm 전의 장면을 담아보기도 했다.

날씨, 건강상태, 귀찮음, 야근 등 다양한 이유가 배어있는 집콕의 순간들

그래서 그날의 장면에 충실하게 집 안에서의 장면을 그린 적도 있었고, 그날 있었던 일들이나 짧은 감상을 적은 날도 있었다. 만화처럼 나열하듯이 줄줄이 의식의 흐름 그림을 그릴 때면, 그날그날의 사소함들이 하루를 만들어 간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한동안 고체 물감을 자주 쓰던 때에는 물감으로 책상 위에서 물건들을 나열하며 그리기도 했다.

보잘것없는 하루를 남겨두고, 소소한 해프닝을 기록하거나, 그날의 상징적인 물건들을 하나라도 남겨 놓으면, 후에 그 그림을 다시 들춰봤을 때 긴 수식어 없이도 적립된 그날의 하루를 되찾는 기분이 든다.  

되찾는다 해도 '맞아 맞아 그때 그랬지'의 짧은 감상뿐이겠지만, 그 하루의 자신과 그 이후의 자신의 연결 지으며 또 다른 의미를 찾아가는 것도 자신의 몫이니까 나쁘지 않은 감상이다.

이불 빨래 중 고장 난 세탁기라던가, 하루 종일 일한 노동의 대가로 사 온 거봉을 크게 그리기도 한다.


집콕에서의 집이, 내가 사는 집이 아닐 때도 있다. 명절 같은 경우 친척집에서 하루 종일 콕 박혀있기 때문에 그 틈을 타서 집안의 장면을 그리기도 한다.

명절날 친척 집에서


그래도 한 발자국 나가본다, 집 앞의 순간


집콕이라 함은, 본래 집에 '콕' 박혀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안 나가는 경우를 말하던가, 아니면 외출 후에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외출을 하기 전까지의 경우를 말하던가.

어쨌든 '외출 상황을 그리지 않은 날'이라고 정의한다 해도, 정말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날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거나 마트 정도는 다녀오는 등 몇 발자국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마트에서 그리거나 마트를 다녀온 후 그린 그림들

주로 자주 이용하는 것은 결국 장보기. 식사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에 편의점이 있지만 냉동식품이라던가 챙겨놓고 먹을 음식들을 사기 위해서는 마트가 필요하다. 요즘 마트의 상품 진열 방식이나 기술이 무척 화려해서 그걸 보는 재미가 종종 있다. 인상 깊었던 음식이나 디스플레이를 그리며 남기는 편이다.

현관문만 빼꼼 열고 나와 집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그린 장면들

비가 오는 날, 멍하니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을 '툭툭이'라고 부르는데, 툭툭이가 직접적으로 떨어지거나 아니면 창문에 툭툭 맺혀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한다.

때때로 집 건물에서 나가지 않는 날은, 이렇게 집 앞의 풍경이나 창문 틈 사이의 풍경을 그리기도 한다.

일상과 혼재되어 있기도 하다.


보통의 하루


365일이 사실 매일 특별하고 기억에 남는 일 투성이라면 우리의 추억들은 오히려 과부하가 걸리지 않을까.

모든 일상이 대체로 소소하고, 때때로 좋든 싫든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들이 벌어지기에 한해 한 해가 무난히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아하는 시가 하나 있다.

뭔가가 시작되고 뭔가가 끝난다.
시작은 대체로 알겠는데 끝은 대체로 모른다.
끝났구나 했는데 또 시작되기도 하고
끝이 아니구나 했는데 그게 끝일 수도 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아, 그게 정말 끝이었구나
알게 될 때도 있다.
그때가 가장 슬프다.  

황경신, <그때가 가장 슬프다>

 

이 시구에서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라는 문장에서 눈이 머물렀다.
때때로 '힘들다'라고 말하는 지금보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 '아, 나 그때 힘들었었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보니 섣불리 '지금'을 말하지 않는다.

비슷한 화법으로 '즐겁다'도 마찬가지이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 '아, 나 그때 진심으로 즐거웠었던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래서 설령 지금,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특별한 일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0'이고 '의미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늘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 곳도 가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보통의 하루.

이렇게 시간이 흐린 뒤에 그림을 들춰 봤을 때, '아, 그때 나 참 편하게 잘 쉰 것 같아' 그래서 오늘을 또 잘 보낼 수 있게 된 것 같아.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날이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을 그림으로 기록해 보는 건 어떠한가.

어떻게 지내왔고, 어떻게 쉬고 있는지를 남겨보는 것은 또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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