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스쳐 지나간 영화의 한 장면 같은데 어떤 영화였는지 이 대사가 정확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말이 있다. 한 남자가 황야와 같은 배경에서 차를 세워두고 중얼거리다 결심한 듯, 홀연히 다시 운전을 시작하며 내뱉은 대사였다.
I am my history
"I am the boss of me"라는 말과 함께,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한자어인 역사(歷史)에서의 '사'는 '기록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영어의 history는 '사건들의 연관, 이야기'를 뜻하는 말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어인 historia를 어원으로 삼는데 '시공간에 따른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 기억에 따른 지식'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결국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기록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은 곧 나의 이야기가 역사라는 것이다.
나는 나의 역사를 스케치북에 담는 일을 10년째 해오고 있다.
하루가 기울 무렵, 카페에 앉아 카페의 풍경을 그리는 일이 대다수이긴 하나 때때로 그 커피 테이블 위에 오늘을 기억할만한 상징적인 사물, 이를테면 오늘 읽은 책이나 받은 선물, 새로 산 아이템들을 올려두고 같이 그리면서 말 그대로 '시공간에 따른 어떤 사물과 기억에 따른 지식'들을 담아놓는다.
매일 일기를 써야지, 매일 그림을 그려야지 하는 거창한 목표도 없었고 이토록 오랜 취미활동이 될 줄은 몰랐지만 어찌 되었건 이일을 계속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때문에 네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사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스케치북이라고 답할 것이고, 정확하게는 스케치북에 담긴 기록들이라고 덧붙일 것이다.
나의 스케치북은 나의 하루하루이자, 낡은 일기장이자, 오래된 보물이자, 내 정체성 그 자체가 되었다.
2016년부터 매일매일이 기록된 스케치북은 어느새 38권이 되었고, 여행드로잉에, 낙서드로잉까지 더해지면 그 스케치북 수는 더 많아진다.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놓고 들여다보지 않는 사진 앨범처럼 내겐 수십 권의 그림앨범이 있는 셈이다. 혹시나 어쩌다 사진을 들춰보면서 그날을 회상하듯, 나 역시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날의 장소로 고스란히 시간여행이 가능하다. 때문에 매년 한 권씩 늘어나는 스케치북의 산을 들여다보는 것이 내겐 꽤나 큰 즐거움이다.
올해도, (좋은 날 나쁜 날 슬픈 날 화가 났던 날 아무것도 아니었던 날들을 모아 모아) 가득 채웠구나.
최근 보고 있는 미지의 세계라는 드라마에서 미지가 아침마다 주문처럼 외우는 대사가 마음에 드는 요즘이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나의 기록은, 끝난 어제를 돌아보거나 잊지 않기 위한 수단도 아니고, 내일을 다짐하기 위한 주문도 아니다.
단지 오늘 아침 백지였던,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오늘이 다 끝나갈 무렵, 오늘을 담아둘 뿐이다. 아침만 해도 몰랐던 오늘을 이제 나는 알았고, 아마 이대로 두면 흘러가거나 기억되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되겠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기록을 택했다. 이런 일들이 있었어. 내가 이 장소에 있었고, 이런 생각을 잠시 했고, 때때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도 했지. 그렇게 백지를 한 칸 채웠다.
나는 내 발걸음의 주인이고, 내가 지닌 사물들과 내가 머물렀던 장소들을 기억하는 내 이야기의 주인이다.
나는 나의 역사라는 이 말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추억을 남기고 싶은 모습으로 남겨둔 우리 '어른의 기억'들은
그리운 장소로 언제든 데려다주는 '유효기간 없는 티켓'을 들고
어른인 자신을 지키는 '토대'가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 마스다 미리, 어른 초등학생의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