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이 머무는 곳

필터 없이 세계를 바라보는 --

by 달박상

카메라 가방 앞 주머니에서 납작하고 동그란 통을 빼내 필터를 꺼냈다.

격자 홈이 세밀하게 파인 필터였다.

그는 에어블로어로 필터의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어낸 뒤 내게 건넸다.


"크로스 필터야.

여기, 이 홈들이 빛줄기를 만들어줘.

제법 매력적인 빛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지.

사실 필터가 없어도 카메라의 조리개를 조여서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어.

피사체의 심도가 깊어지면서 빛이 길게 뻗거든."


그 미소가 너무 부드러워서 금방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처음 필터를 접한 나는

서둘러 필터를 끼우고, 이리저리 카메라를 움직였다.


그가 내 손을 조용히 잡아 내렸다.


"카메라부터 들이밀면 제대로 볼 수 없어.

먼저 실눈을 뜨고 봐.

네 시선이 머무는 곳, 그곳이 카메라의 렌즈가 향해야 할 곳이야.”


기대감으로 한껏 달아올라 있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공간 속으로 한걸음 다가갔다.


“충분히 어두워져야 별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빛줄기가 도드라지려면 일정량의 어둠이 꼭 필요해.

선명한 광원이 있는 편이 빛을 물기에 좋거든."


나의 시선은 물결치는 갈대밭 사이,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이 빚어낸 고요한 빛 무리에 닿아 있었다.

긴장 속에서, 공간의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는 순간을 기다리며
빛줄기가 온전하게 형성될 때까지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찰칵—


"좋네. 네 시선."

뒤에서 조용히 다가와 함께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던 그는,

내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필터를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 필터 없이 사진 찍는 게 두려워져.

뭔가 밋밋하게 느껴지거든.”


그가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자기 시선을 믿지 못하면 방향을 잃은 거야.

그 시간이 길어지고서야 결국—

필터를 제거해야 실체를 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지.

현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막 지고 있는 붉고 강렬한 석양 위로

오늘의 마지막 파란 하늘이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복잡한 그의 눈빛 때문이었을까,

그 말은 마치 자신에게 하는 다짐처럼 다가왔다.


어느새 주위는 어둑해졌고,

희미하던 가로등 불빛이 점점 더 선명해지면서

거대한 어둠을 지탱하고 있었다.


필터는 빛과 색을 걸러내어,

우리가 보고자 하는 이미지를 만들어준다.

때로는 더 선명하게, 결점을 감추기도 하고,

또는 어떤 분위기를 한층 강조하기도 한다.


필터가 선사하는 특별함에 익숙해질 무렵—

그제야 알았다.

필터 없이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그리고 내 시선을 가로막고 있던 두려움과 마주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제 필터 없이 세상을 보는 연습을 시작하려 한다.

현상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2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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