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된 나, 그리고 우리
정적이 가진 무게에 짖눌릴 때면,
가끔 잊고 있던 오래된 질문이 불쑥 올라온다.
결국 이른 새벽 시간애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 문 틈 사이로 흐린 불빛이 새어 나오고
연필이 종이를 미끄러지는 소리가 새벽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작업실을 함께 쓰고 있는 선배였다.
그의 화폭에는 방금 지나온 낡은 작업실 문과
트리처럼 천장을 장식하고 늘어뜨린 오래된 둥근 형광등,
그리고 어슴푸레한 반지하로 스며든 네온사인의 빛이,
지금 모습 그대로 담겨 있었다.
내가 혼잣말로 낮게 중얼거렸다.
복제...
선배가 스케치하던 손을 멈추고, 뭐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사이를 두고 내가 물었다.
"선배는 '복제’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나요?”
“질문이 참... 너도 밤새...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도망 온 모양이군.”
그는 사선으로 자른 지우개의 날카로운 면으로
하이라이트 부분을 만들며
꽤나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복제’라고 하면...
나야 그림 쟁이니까 판화가 떠오르지.”
“왜요?”
“판을 제작할 때의 격렬함과 치밀함...
이런 에너지와 정신이 작품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믿으니까.”
그는 지우개를 만지작거리면서 잠깐 머뭇거리는가싶더니
무심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욕 들을 만한 발언이지만...
난 인간에 가장 가까운 예술이 판화라고 생각해.
다른 회화나 조각들은 그 자체로 작품이 되지만...
판화는 그렇지 않잖아."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판화의 원형은 '판'이지만,
그건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 매개가 될 뿐이야.
실제 작품은 그 판으로 찍어낸 것들이지.
왜 그런 말도 있잖아.
'하나님이 그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선배 말은...
인간은 신의 에디션이다?”
그가 지우개로 지운 일부를 엷은 선으로 메우며 대답했다.
“이를테면 그렇다는 거지.
단지 신은 인간 존재의 근원일 뿐이고,
중요한 건 '인간' 그 자체라는 걸 보여주는 장르가 판화 아닐까 하는...”
그는 무심히 지우개를 다시 움직였다.
나는 원형과 복제,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에서
지우개가 그려내는 사선의 하이라이트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2009.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