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餘人)

남은 사람

by 달박상

혹시 알고 있나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세상과 마주할 작은 빛 하나를 품고 온다는 걸요.


이건 제가 알고 있던

한 여인(餘人)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도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또 다른 길에 놓인 날 보며, 그녀를 추억합니다.


내가 알던 그 소녀는

꿈과 희망, 얼굴가득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이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 소녀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한 남자와 결혼하고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았지요.


남자는 아집이 강한 사람이었고,

아이는 --늘 그렇듯-- 사랑스러운 이기주의자들이었어요.


그녀는 자신에게서

뭔가 빠져나가고 있다고 느꼈어요.

아마, 착각일 거예요. 변한 것은 없거든요.


그녀는 여전히 한 남자의 부인이었고
두 아이의 엄마였어요.

경우에 따라 다른 역할을 맡기도 했지만

그저 남은 사람

餘人(여인)일 뿐이었답니다.


십 년 같은 하루를 수없이 반복하며

그녀는

자신의 가슴속에 가득했던 빛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알지 못했어요.


어느 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을 둘러싼 공간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을 떨칠 수가 없었지요.


하루는 안방 침대에서 싱크대까지

몇 걸음에 갈 수 있는지 세어 보기로 했습니다.


19 발자국


남편과 아이의 여인으로

정신없이 지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문득 다시 거리를 세어 보았어요.


11 발자국


착각이 확실해요.

아무도 그녀처럼 느끼지 않았거든요.

그녀는 매일 발자국을 세었어요.


6 발자국

작아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어요.


여인은 두려웠어요.

발자국 수가 자꾸 줄어 하나도 남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날 이후, 그녀는

더는 세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기 마련이죠.


몇 해가 지나자

집은 책장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아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장실도, 싱크대도, 식탁도, 침대도 모두 그 자리에 있었어요.

마치 겹쳐 놓은 필름처럼

서로 다른 공간 속에 중첩되어 있는 거지요.


단지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단 한걸음이면 모든 곳을 오갈 수 있었어요.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거실을 뛰놀고,

남편은 집 안 가득 담배 냄새를 물들이고 있었지요.


오직 그녀만이

고립 효과를 연구하는 실험용 쥐처럼

극심한 불안에 갇혀 있었답니다.


또다시 몇 해가 흐르고,

공간은 두꺼운 책 한 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아졌습니다.


그때, 그녀는...

그 좁은 공간 사이에 나를 끼워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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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인 것 같아.

이제 남은 공간마저도 사라지려 해.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았어.


얇아진 틈 사이로

수많은 하늘을 보았거든.


아마도...

몇천 겁의 중첩된 공간 속에서

난 잘못된 길을 걸었던 것 같아.


왜 몰랐을까?


내 빛이 다 소멸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이라도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을 텐데


가능하다면,

가능하다면 말이야.

나에게 남은 마지막 빛으로

너를 새로운 길 위에 올려놓을게.


그 길을 걷게 될 누군가, 이 일기를 통해
자신의 빛을 지킬 수 있도록...


... 나의 ... 그림자가 사라지고 있어...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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