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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를 읽고

by mola mola

2019.02.03에 읽고 씀.


서사를 이끌어 나가는 인물은 ‘산티아고’라는 늙은 어부다. 그는 84일 동안 단 한마리 물고기도 잡지 못했다. 항구 주민들은 노인의 배가 불운한 것이라고 혀를 차지만 산티아고는 85일째에도 묵묵히 미끼를 갈고리에 매어 배낚시를 준비한다. 산티아고는 85번이 적힌 복권을 사보려고도 하지만. 돈이 부족해 포기한다. 그의 조수였던 마놀린은 돈을 빌려 복권을 사자는 제안을 하지만, 노인은 거절한다. “빌리기 시작하면 구걸하게 된다”는 게 그 이유다. 노력을 다하되 자신의 능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탐하지 않는 그의 심성은 이후 그와 그가 잡을 참치 사이의 일을 예시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마놀린이 85번 대신 87번이 적힌 복권을 사자고 제안하는 부분이다. 이후 서술에서 노인은 실제로 87일째 날에 큰 참치를 잡는다. 이는 참치가 복권 당첨에 준하는 큰 행운임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 행운은 구걸이 아닌 노인의 노력으로 잡은 것임을 암시한다.


노인이 바다를 ‘라 마르(La mar)’라고 부르는 부분 역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돛단배 한 척뿐인 가난한 노인과는 다르게 모터보트를 가진 부유한 젊은 어부들은 바다를 ‘엘 마르(El mar)’라고 부른다. ‘라 마르’의 ‘라’는 여성 명사 앞에 붙는 정관사고, ‘엘 마르’의 ‘엘’은 남성 명사 앞에 붙는 정관사다. 젊은 어부들은 남성 바다를 투쟁 상대로 생각하고 낚시는 물고기들을 바다에게서 뺏어 육지로 끌고 나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인에게 여성 바다란 은혜를 줌과 동시에 화를 끼칠 수도 있는 존재다. 소설에서 노인이 바다에서 배보다도 더 큰 참치를 잡는 은혜를 얻었으나, 동시에 그 참치를 상어에게 모두 빼앗기는 화를 입은 것처럼 말이다. ‘엘 마르’의 바다에서 물고기는 쟁취해야만 하는 전리품이다. 그러나, ‘라 마르’의 바다에선 물고기를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참치를 잃은 노인은 의연하다. 이 소설 전반에서 그려지는 노인은 오로지 참치를 사수하려는 노력만을 할 뿐이다. 잡히지 않는 참치에 대해, 또는 빼앗긴 참치에 대해 분노하거나 반항하지 않는다. 이 노인의 이름이 ‘산티아고’라는 점은 의미심장한 장치로 생각된다.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이다. 야고보는 본래 어부였으나 “예수가 부르자 배와 아버지를 버리고(마태4:22)”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가 순교한 성인이다. 노인 산티아고 역시 참치를 잡고 상어와 싸우느라 배의 조종간을 잃고 온몸에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노인은 “죽을지언정 결코 패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헤밍웨이가 그리는 인간은 매우 주체적임과 동시에 순종적이다. 산티아고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주동성을 갖췄지만, 바다의 뜻에 무조건적으로 수긍하는 수동성 역시 가졌다. 신의 뜻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구도하지만 그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신을 그대로 따르는 야고보처럼 말이다.


헤밍웨이는 이 모순된 인간의 고난이 어떻게 위로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답한다. 바로 마놀린을 통해서다. 마놀린은 매일 참치를 잡아내는 소년이다. 행운과 불운의 대비, 젊음과 늙음의 대비가 선명한 두 사람이지만 서로는 서로에게 없어선 안 될 존재다. 소년은 노인을 위해 매일 커피를 타고 아침을 준비하며 셔츠를 챙겨준다. 노인은 언제나 마놀린을 걱정해주고 야구 기사를 읽어주며 함께 커피를 마신다. 노인이 바다에 나가 물고기와 싸우는 동안 유일하게 반복하는 말은 “마놀린이 있으면 좋았을텐데” 이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통해 한 개인이 한계에 이르는 노력을 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 있음을 말한다. 허나 그는 그 실패 앞에서 어떻게 개인이 굴복하지 않고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지 제시한다. 그것은 각각의 개인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하며 의지하고 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토록 연약하고 늙은 노인이 어떻게 질기고 강인한 사람으로 변모하는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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